HERI 리뷰

 

떠도는 행복…견고한 모든 것이 인공지능 속에 녹아내린다

제4차 산업혁명 시대 일과 노동, 갑작스런 불안과 기대 교차
행복한 낙원인가, 일자리 놓고 로봇과 싸우는 세상인가

일, 행복 그리고 일자리

“주 30시간 노동제 사회는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을 위한 시간뿐 아니라 시민들 간의 새로운 연대를 구축할 시간, 개인적 즐거움을 누릴 시간, 새로운 삶의 방법과 주체성의 모델을 창조할 시간을 허락할 것이다. … ‘일’을 노동시장의 고용체계로 규정하는 산업화 시대의 사고방식에서 이제 벗어나야 한다. 무엇이 일이고 일이 아닌지 그 정의를 일자리와 고용 여부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 일을 통해 돈뿐만 아니라 수많은 다른 가치를 추구할 수 있게 하는 사회, 그 덕에 각자의 일을 스스로 정의할 수 있는 사회, 그런 사회에서 오롯이 자기결정권을 행사하며 놀듯이 일하고 일하듯이 노는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그 사회에서 우리는 어쩌면 지금보다 더 많이 ‘일’할지도 모르겠다.”

떠도는 행복…견고한 모든 것이 인공지능 속에 녹아내린다

제4차 산업혁명 시대 일과 노동, 갑작스런 불안과 기대 교차
행복한 낙원인가, 일자리 놓고 로봇과 싸우는 세상인가

“과학은 창조하고, 기업은 응용하며, 인간은 적응하자.” 1933년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세계박람회가 내건 구호였다. 과학기술이 놀라운 기세로 세계를 변혁하고, ‘생산’ 임무를 떠맡은 기업과 노동자는 이를 충실히 응용하고 적응하기에 바빴다.

그 무렵 세계가 온통 대공황의 우울에 빠져 있었음에도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박람회가 내건 기술 진보의 기치를 굳게 믿었다. “인류는 지상에 창조된 뒤 처음으로 실질적이고 영원한 문제, 즉 절박한 경제적 근심에서 벗어날 것이며 경제문제가 그 본래 자리인 뒷전으로 물러날 날이 멀지 않았다. 그러면 우리의 가슴과 머리는 실재적 문제들에 의해 점유되거나 재점거될 것이다.” 100년 뒤 손자 세대는 그렇게 얻은 자유와 여가를 사용하면서 어떻게 현명하고 즐겁게 잘 살지 고심하게 될 것이라고 그는 장담했다.

돌이켜보면 잘못된 예측이었다. 우리에게 경제적 근심은 여전하다. 하지만 빅데이터·로봇공학·인공지능·공유경제·사물인터넷·초연결사회…. 숨가쁘게 돌아가는 제4차 산업혁명의 갑작스럽고 어질어질한 물결 속에 우리는 ‘일과 노동의 미래’를 야릇한 불안과 기대라는 묘한 기분으로 그려보게 된다. 살아가는 동안 우리의 가슴과 머리를 사로잡는 ‘행복’, 그것의 장래를 놓고 찬찬히 생각에 잠기게 된다.



어질어질한 물결, 야릇한 불안 그리고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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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를 누르면 더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1957년, 인간이 만든 지구 태생의 한 물체가 우주로 발사되었다. 몇 주 동안 이 위성은 태양·달·별 같은 천체를 회전시키는 동일한 중력에 따라 지구를 회전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이때의 기쁨은 승리감이 아니었다.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을 때 인간들의 마음을 가득 채운 건 인간 능력과 지배력이 엄청나다는 자랑도 놀라움도 아니었다. 그 순간에 표현된 즉각적 반응은 인간이 지구라는 감옥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제1보를 내디뎠다는 안도감이었다.” 이 물체가 발사되고 한 해 뒤 펴낸 <인간의 조건>에서 한나 아렌트는 그렇게 말했다.

인공위성·원자폭탄 등 위대한 과학기술이 이끄는, 그러나 아직은 알 수 없는 혼란에 사람들이 거의 압도되고 있던 무렵 아렌트는 그것의 정체를 “인간조건에서 벗어나려는 반란”이라고 규정했다. 과학기술의 진보는, 수고와 고통이자 동시에 즐거움이기도 한 ‘인간조건으로서의 노동’에서 해방되려는 강력한 기도라는 것이다. 2016년 우리 시대 인공지능 로봇도 그런 꿈을 품고 있는 것일까.  

시카고 박람회로부터 80여 년, 인공위성의 경이로부터 50여 년이 지난 지금 전 세계는 제4차 산업혁명의 충격과 흥분에 휩싸이고 있다. 시간과 거리를 초월해 사람들이 연결되고 거리의 경계는 소멸하고 있다. 가공할 위력으로 ‘파괴적 혁신’을 거듭하는 신기술이 산업혁명의 속도를 간단히 제압하면서 수많은 신제품을 현기증이 날 정도로 매일 쏟아내고 있다. 20세기에 자동차·석유가 그랬듯이 컴퓨터 제어 로봇과 스마트폰 통신기술이 ‘세상을 바꾼 기계’로 등장한 지 벌써 10년이 넘었다.

“기원 후 1000년, 어느 스페인 농부가 잠이 들어 500년 후에 그러니까 콜롬버스 시대에 깨어났다고 가정해보자. 그가 깨어난 세상은 매우 친숙하고 편안해보일 것이다. 하지만 만일 콜럼버스의 선원 중 한 명이 같은 잠에 빠졌다가 21세기 아이폰 벨소리에 깬다면, 자신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세상에 와 있다는 것을 알고 이렇게 자문할 것이다. ‘여기는 천국인가 아니면 지옥인가?’”(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이 이해할 수 없는 신세계에서 누가 언제 무엇을 파괴·혁신하고 그에 따라 우리의 노동 세계와 행복이 함께 요동치게 될 것인가?

사실 생물학적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인간의 공상은 인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다. 수천 년 전에 이미 아리스토텔레스는 환상처럼 상상했다. “시인이 전하듯이 다이달로스의 동상과 헤파이스토스의 걸상이 자발적으로 신들의 모임에 걸어들어온 것처럼, 모든 도구가 명령에 따라 자신의 일을 수행할 수 있다. (…) 베틀의 북이 실을 짤 것이며, 손 없이도 채가 수금을 켤 것이다.”



"이번은 다르다” vs 인간은 70kg 만능 컴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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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아차 슬로바키아 공장에 설치된 산업용 로봇(위쪽). 2016년 6월 미국 캘리포니아의 한 쇼핑센터에서 순찰을 돌고 있는 로봇경찰(Robot Cop). AP 연합뉴스

그러나 그로부터 2천 년 뒤 우리가 현실에서 목도하는 제4차 산업혁명은 일의 세계라는 관점에서 보면, 환상이라기보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파괴적 충격에 가깝다. 제4차 산업혁명은 흔히 “이번은 다르다”는 말로 수식되곤 한다. 그 범위와 규모, 속도에서 누구도 예상치 못할 정도로 산업 분야와 직종을 가릴 것 없이 노동세계를 완전히 바꿔놓을 격변 속에 우리가 이미 들어서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 수십 년간 운송·물류·사무행정지원 직종에 있는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생산직 노동자들과 함께 컴퓨터와 로봇에 의해 대체되고, 날로 똑똑해지는 인공지능 로봇이 회계사와 시장분석가 등 지식노동자의 일자리를 갈아치우고, 자동화의 위험에 민감한 직종에서 실업자가 쏟아져나올지 모른다. 과거에는 주기적으로 혹은 가끔 느닷없이 닥치는 불황과 경기둔화 국면을 제외하고는 항상 일할 곳이 있었다. 하지만 4차 산업혁명의 세계에서는 훨씬 넓은 범위에서 일자리가 붕괴되고 노동시장은 더욱 양극화되고 불평등과 사회적 긴장감이 높아질 것이라는 우울과 절망감이 ‘대예측’이란 제목 아래 제시되고 있다. 물론 지금 우리가 상상하는 로봇은 정원 가꾸기보다 훨씬 더 심오한 일을 하는 기계다. 인공지능은 빠른 자기계발 사이클 속에 이미 비약적으로 발전해 인간 지능을 넘어서고 있다.

극소수 부자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일과 노동은 역사상 거의 전 기간 동안 인류를 규정하는 조건이었다. 단지 소득을 얻는 수단일 뿐이어서가 아니다. 일에 많은 시간을 쏟아붓기 때문에 노동세계가 우리에게 끼치는 영향은 아예 “우리를 형성한다”고까지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시 말해 인공지능이 촉발하는 노동세계의 변화는 우리 삶에서 행복 혹은 불행이 얼마나 가깝게 또 먼 곳에 있게 될지를 좌우하는 결정적 조건이다.

물론 신기술이 창출해낼 수많은 새 일자리가 하나의 가능성으로 대두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결코 무시할 수 없다. 1964년 컴퓨터 시대의 여명기에 사회이론가 그룹은 린든 존슨 당시 미국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 “컴퓨터에 의한 자동 제어가 거의 무한한 생산 능력을 가진 시스템을 낳게 되고, 인간 고용을 감소시킬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그 경고는 세상에 필요한 노동의 총량이 고정돼 있다는 잘못된 전제에 기초한 오류임에 틀림없다.

더구나 자율주행차와 로봇, 인공지능 슈퍼컴퓨터가 인간을 궁극적으로 경제에서 몰아내 무용지물로 만들 것이라는 묵시록은 한 가지 중요한 인간의 본성을 빠뜨리고 있다. 즉, 우리는 로봇이나 인공지능에만 전적으로 의존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우리는 연극이나 스포츠행사에 참석해 인간의 표현력이나 능력에 찬사를 표한다. 로봇이 노동의 수고를 줄여줄 수 있을지라도 레스토랑에서 서빙하는 한 사람의 봉사를 수십 개의 로봇기계가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다. 바로 이것이 완전자동화된 경제로 가는 길에 놓인 가장 큰 장벽이다. 사람들과 정서적으로 직접 접촉하는 노동이 제공하는 안심·행복·만족·흥분·정열은 ‘만질 수 없는 것’들이다. 아직 인공지능 기술이 미칠 수 없는 수많은 가치 있는 일을 오직 사람만이 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인간 본성에는 사람 사이의 정서적 관계에 기반한 ‘인간관계’의 욕망이 있다.

게다가 어쩌면 아직 우리는 어떤 기계보다 훨씬 더 민첩하고 재치 있으며, 상대적으로 가볍고 에너지 효율적이다. 1965년 미 항공우주국(NASA) 보고서는 “인간은 비숙련 노동으로 대량생산할 수 있는, 70kg의 가장 저렴하고 비선형인 만능 컴퓨터”라고 했다. 인간은 감각이 빠르고 다차원적 피드백을 제공하므로 정밀하게 움직이고 제어할 수 있다. 예컨대 그릇에 가득 담긴 동전을 평범한 아이만큼 잘 분류할 수 있는 로봇이나 레스토랑 웨이터 보조만큼 테이블을 잘 치울 수 있는 로봇은 아직 전세계 어디에도 없다.



아침 사냥, 저녁 토론하는 ‘멋진 신세계’?

제4차 산업혁명은 우리의 일과 행복에 유익한 것이면서 동시에 위협일까? 사실 노동 그 자체가 인간에게 고통스러운 활동인지, 아니면 순수한 즐거움이나 여가만큼 만족스럽고 행복한 활동이 될 수 있는지 묻는 건 대답도 어렵거니와 유익한 질문도 아니다.

우리는 “왜 일합니까”라는 질문에 단순히 “살아가기 위해서” 또는 “돈벌이를 위해서”라고 대답한다. 그것이 오히려 상쾌한 대답일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까지 그래왔듯 삶을 지속하기 위해 계속 노동할 것이다. 그런데 인공지능 기계는 인간의 일에 역습을 가하기보다 오히려 자유를 제공하는 선물이 될 수 있다. 우리의 일이 예전보다 훨씬 더 즐거워질 수 있다. 더 짧은 시간에 덜 힘든 일을 하면서 더 많은 부와 소득을 늘릴 수 있을지 모른다. 시장에서 자유롭게 노동계약을 맺거나 풀어버리면서 자신의 시간을 유연하게 사용할 수 있는 기회를 얻고, 일에서의 자유를 누리는 세상이 다가온다는 낙관도 있다. 똑똑한 인공지능 덕분에 인간(과 기계)의 독창성이 만개하고, 이를 바탕으로 무제한적인 부와 풍요가 지구 곳곳에 퍼져나갈 수도 있다.

반면, 하루하루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일거리를 전전해야 하고 고용안정도 노동권도 단체교섭권도 없는 불안정 노동의 세상으로 향하는 어두운 여정의 시작 지점에 우리가 서 있는지 모른다. 19세기 초 러다이트가 기계와 싸우려했듯이 우리는 로봇과 싸우게 될 것인가, 아니면 서로 협력하며 일하는 동료가 될 것인가. 물론 인간의 제한된 능력을 생각하면 아직은 ‘멋진 신세계’일지 두려움과 공포가 기다리는 세상일지 어떤 확고한 예측도 무모하고 성급하다. 소설가 올더스 헉슬리는 과학기술과 행복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행복이란 어려운 과제요. 가령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이도록 습성이 형성돼 있지 않을 경우, 그것은 진리보다도 더 어려운 것이오. (…) 그러나 진리는 위협이고 과학은 대중에 대한 위험이오. 지금까지 유익했던 것만큼 위험한 거요.”

인공지능과 초연결사회는 단순한 기술적 혁명을 넘어선다. 어쩌면 재정·통화 정책과 저축률·이자율을 통해 투자가 결정되고 그에 따라 자동적으로 생산·고용·소득이 정해진 20세기 경제 시스템으로부터의 탈피를 의미한다. 20세기는 가격과 정책·제도 아래서 사람들의 삶이 결정되고 그에 따라 행복의 수준도 대략적으로 예상 가능했던 사회였다.

그러나 인공지능 시대에 행복은 매우 유동적이고 부유하는 것이 될 공산이 커졌다. 우리의 일, 우리가 일하는 기업이 파괴적 혁신의 물결에 휩쓸리면서 견고한 모든 것이 녹아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를 다루려고 일과 행복을 위협하는 여러 잠재 요소가 뭔지 정확하게 뽑아내기도 어렵다. 불확실성의 시대다.

일하는 장소는 벌써 격변의 도상에 들어서 있다. 지난 200여 년간 공장은 자연적이거나 단순한 기술적 장소가 아니라 그 자체가 자본주의적 사회조직체제였다. 더 많은 이윤을 향한 효율적 상품생산을 위해 강제 및 통제 규율이 작동하는 장소였다. 20세기 대량생산 혁명을 이끈 헨리 포드의 어셈블리 공장 조립라인도 뜯어보면 전적으로 새로운 기술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기계적 발명이나 단순한 물리적 힘의 배치가 아니라 효율적 노동을 위해 인간을 조직하는 사회질서의 원리에 불과했다. 어쩌면 바로 그것이 포드의 새로운 점이었다.


‘좋은 삶, 좋은 사회’인가? 윤리적 질문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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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 이미지(왼쪽). 인공지능 작곡가 에미(Emmy)의 작품. 위키피디아

그러나 이제 은유적으로 “무수한 인간 기계노동기관들이 열광적으로 결합되고 난무하고 폭발하는” 것으로 흔히 묘사되곤 했던, 견딜 수 없이 단조롭고 고통스러운 공장에는 이미 산업로봇들이 들어와 있다. 전통적인 굴뚝 공장은 점차 줄어들고, 일터는 창의와 혁신이 폭발하는 장소로 바뀌고 있다. 하지만 분명하게도, 작업장의 두뇌를 인공지능 로봇이 맡게 된다 해도 여전히 자본주의 상품생산경제라는 틀 안에서 우리의 노동은 계속될 것이다. 다시 말해 이윤을 위한 관리적 통제 아래 일터에서 차별과 위계가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그에 따라 저항과 투쟁이 집단적 행동으로 분출할 수도 있다.

빠른 제품혁신과 파괴 속에 노동생산성에 대한 강요가 숨막힐 정도로 몰아치고, 일자리를 잃지 않으려 스스로 노동강도를 높여야 하는 불안하고 지친 노동의 생애를 보내게 될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오늘은 이것을 하고 내일은 저것을 하며 아침에는 사냥을 하고 오후에는 그림을 그리고 낚시를 가며 저녁에는 양을 기르며 저녁 식사 후에는 토론을 벌인다. 화가나 어부, 목사나 학자가 되지 않고서도 이것들을 적절히 잘할 수 있다.” 로봇과 초연결사회가 만들어낼 노동의 세계는 19세기 두 공산주의 사상가가 상상했던, 모든 직업이 곧 취미가 되는 그런 사회가 아닐 것이다. 자본이 주도하는 시장경제가 여전히 우리 삶의 원리일 것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문제는 기계 자체가 아니라 그 기계의 자본주의적 사용에 있다. 이는 1980년대 이후 지식 기반 경제에서 이미 나타난 현상이 입증하고 있다. 지식정보가 모든 경제활동에 핵심이 될 뿐만 아니라 부가가치 창출과 기업·개인의 경쟁력 원천이 되는 새로운 지식기반경제에서 소득불평등 격차는 더 확대되고 승자 독식이 강화되었다. 점점 더 많은 노동자들이 지식노동자로 전환했지만 저임금·비정규 노동이 두텁게 확산되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를 고려하면 소득불평등 심화와 노동강도 강화, 저임금, 노동시간 연장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파괴적 기술혁신이 인간의 일과 직업, 그리고 행복에 미치는 영향을 둘러싼 이야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이제부터가 행복에 대한 더 흥미로운 이야기일 수 있다. 역사인류학자 잭 구디는 “사회과학에 행복의 정도를 측정할 기구는 없다”고 했다.

그러나 경제학자들은 오직 숫자로 측정해 표현할 수 있는 것만 그것을 안다고 할 수 있다고 믿어왔다. “측정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측정하라. 측정하기 어려운 모든 것을 측정 가능케 하라. 측정이 불가능하면 개선을 위한 노력도 할 수 없게 된다.” 제러미 벤담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설파하면서 ‘쾌락의 수량적 계산법’을 만들려고 시도했다. 오직 일에서 얻는 소득이 곧 쾌락이고 행복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시장 원리에 기초한 근대의 경제적 이기주의는 행복이라고 불리는 ‘개인적 쾌락’에 대한 잔인한 탐색이었다. 여기에는 공동체의 가치와 사람들과의 관계 같은, 비록 측정하기 어렵지만 우리가 추구할 만한 ‘진정하고 바람직한 행복’은 빠져 있다.

어느 시대이든 인간은 살아가면서 늘 ‘가치’와 도덕의 문제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성취하려는 것은 소비 효용에서 얻는 행복이 아니라 ‘좋은 삶’의 증진이다. 질문과 관심은 이것이다. 즉, 인공지능 시대가 도래하면 우리의 윤리적 특성에 어떤 변화가 태동할 것인가? 인공지능으로 노동의 수고를 덜고 부가 증가하면 사람들의 품성과 태도가 바뀌고 탐욕과 물질주의가 수그러들까? “일부러 시간을 내어 선행을 베풀며 사는 법을 가르쳐주는 사람들, 수고도 길쌈도 하지 않고 들에 핀 백합에서 직접적인 기쁨을 찾아낼 줄 아는, 보기만 해도 즐거워지는 사람들….” 과연 케인스가 말한 그들을 존경하는 세상이 올 것인가. 물론 인공지능 시대에도 우리 세대와 후손은 여전히 증오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탐욕스러울지 모른다. 질투와 탐욕은 사랑할 수 있는 능력만큼이나 인간에게 뿌리가 깊다.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도 우리는 경제성장률이 몇 %냐, 어떤 기업의 주가가 얼마냐, 어떤 노동자의 연봉이 얼마냐는 이야기를 여전히 하게 될지 모른다. 하지만 인공지능과 초연결사회는 사람들 사이의 광범위한 협력과 연결에 기반해 있다. 기술의 변화가 만들어내는 협력과 관계의 사회경제 속에서 우리는 당연하게도 우리가 사는 곳이 ‘좋은 사회’인지,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윤리적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게 될 것이다. 과학과 기술, 경제사회 제도에 행복을 둘러싼 가치·윤리의 문제가 개입돼야 한다는 요청이 커질 것이란 얘기다.

1980년대 초 물리학자 프리초프 카프라는 <새로운 과학과 문명의 전환>에서 이렇게 말했다. “더 많은 생산과 경쟁에서 협동과 사회정의로의 변화는 우리의 행복에 제약이 아니라 오히려 풍요로움이라는 것을 발견해야 한다. 인간의 생에 있어서 심각한 부족은 경제적 차원의 것이 아니라 실존적 차원의 것이다. 이것은 여가와 평화, 사랑, 공동체, 자아실현에 대한 우리의 요구이다.”

신기술이 혼자서 즐기는 쪽으로 더 발달할지, 아니면 페이스북처럼 사회적 관계에 더 치중할지 아직 판단하기 어렵다. 하지만 초연결사회가 점점 견고해질수록 ‘사람들의 관계’가 행복을 결정하는 주요 요인이 될 것이다. 관계가 만들어내는 행복 재화는 다른 사람과 상호 교류에서 획득(생산)되며 다른 사람과 함께일 때만 즐길(소비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혼자서는 그 생산과 소비가 불가능하다. 다른 사람과 더불어 활동하고 참여하는 가운데 생산·소비된다. 행복은 이처럼 수수하고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이다. 소득이 늘고 물질적 삶이 윤택해져도 인간 행복이 그에 비례해 증가하지 않는 것은 각자의 이익에 기초한 시장 영역에서의 상품 거래 활동이 과도하게 팽창하는 반면, ‘인간 관계가 만들어내는 재화’의 생산·소비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시장과 성장은 우리의 ‘관계’를 위협한다. 행복은 협력하며 일하는 공동체 속에서 상호 의존적이고 서로에게 파급되는 긍정적 외부효과를 낳는다. 초연결되면서 서로 더욱 의존하게 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일수록 한 사람이 노동하는 일상에서 얻는 즐거움은 다른 사람의 기쁨을 증가시킨다. 각자 혼자 여행하는 것보다 우정 어린 사람들과 함께 여행할 때 더 즐거워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행복에 관한 저 유명한 ‘이스털린의 역설’은 근대 주류경제학의 예상을 벗어났다는 점에서 기이하고 놀라운 현상이었다. 성장과 행복에 역설 혹은 한계가 있다는 경고는 오래되었다. 이른바 ‘풍요의 뿔 학파’로 불리는 다수 경제학자들은 성장에 물리적 한계가 없다고 믿었다. 그러나 지구환경과 자원고갈, 그리고 사회적 측면에서 비롯되는 성장의 한계가 지난 40여 년간 끊임없이 출몰했다. 부유한 자든 가난한 자든 우리의 위장에도 한계가 있다. 소비의 생물학적 한계다.

행복에도 한계가 있을까? 이스털린의 역설은 그것을 조심스럽게 시사한다. 일시적인 부와 지위가 가져다주는 행복은 열망의 쳇바퀴 속에 다시 멈추게 마련이고, 소득이 주는 행복은 앞으로 전진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달리고 있는 러닝머신 같은 것(트레드밀 효과)이다. 근본적으로 행복이 자기 자신의 조건보다 준거집단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은 심리학자들이 그동안 밝혀낸 한계들이다.


"행복의 사적 소유는 무서운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과의 협력과 우정 같은 ‘관계’가 만들어내는 행복은 그 샘물이 결코 마르지 않는다. 초연결사회에서 나 혼자로는 행복을 늘리기 어렵고, 시민 공동체로서 나와 타인이 동시에 서로를 향해 관계를 가져야 행복이 커질 수 있다. 물론 남들과의 인간적 협력과 관계를 통한 행복은 취약성도 안고 있다.

“나의 사랑과 관계가 그 다른 사람의 사랑과 관계를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면 그것은 무력하고 의미 없는 것이 될 뿐”이다. 인간은 협력을 통해 진화해왔다. 우리가 정치적·경제적·사회적 결합을 강화하고 발전을 이룩한 주요 설계자는 협력이다. ‘더불어 협력하는’ 인간들이 ‘더불어 행복한’ 사회를 건설해간다.


미래가 항상 황홀한 것도 또 실망스러운 것도 아니다. 우리는 똑똑한 인공지능과 로봇의 도움을 받아 의미 있고 보람 있는 일을 더 잘 찾아나설 수 있다. 모든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관건은 4차 산업혁명의 기술을 어떤 목적에 또 어떤 방향과 속도로 사용할지 모두가 민주적으로 결정하는 일이다. 명백하게 중요한 건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여부다. 더 많은 시민이 함께 ‘바람직하고 진정한 행복’을 누리는 것을 목표로 설정한다면 그 측정 지표를 어떤 가치 기준 아래 설정할 것인가? 무릇 어떤 측정 지표든 일단 만들어지면 그것은 기업과 노동자, 정책가들의 인식과 판단·행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 목표를 고려할 때, 일과 노동 나아가 행복의 근원은 생산에 참여하는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에 있다. 모든 노동은 생산 제품의 품질, 낭비 없는 효율적 생산 그리고 생산과정에서 자본과 노동 간 ‘권력’의 문제를 품고 있다. 권력이 낳는 사회적 관계의 한 예로, 지금 한국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은 양극화되고 있다. 한편에서는 장시간 노동이, 다른 한편에서는 풀타임을 원하지만 파트타임 노동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 두텁게 존재한다. 과잉노동과 과소노동의 동시적 존재는 사회 전체적으로 노동시간의 효율적 배분에 실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이 만든 기술이 낳는 불평등을 교정하기 위해 다시 인간이 고안한 제약들을 부과할 지혜와 능력을 갖고 있다.


노동과 일자리는 언제나 사회관계 속에서 불평등하게 차별적 영향을 받는 계층의 열패감과 박탈감이란 문제를 낳는다. 기술혁신이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고 불평등을 심화하고 어떤 지위의 계층에게 고통과 불행을 더 많이 만들어낸다면 인간 노동자들은 항의 한마디 없이 온유하게 있을 리 없다. 80여 년 전 시카고 박람회의 표어와 달리, 적응하기만 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경제적 운명을 피하기 위해 들고일어나 투표하고 저항할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노동을 장려하고 지원하는 쪽으로 기술을 후퇴시키거나 중단시킬 수도 있다. 4차 산업혁명 시대 노동의 미래는 소리 없거나 혹은 매우 치열하고 어려운, 협상과 투쟁으로 동요하게 될지 모른다.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끊임없이 분투하려는 욕망은 인간의 본성이다. 파괴적 혁신을 거듭하는 기술의 물결 속에 인간은 ‘노동과 행복’을 향해 분투할 것이 분명하다.


아무리 기계가 똑똑해진다 한들 기계로부터 답을 찾을 수는 없다. 역사적 경험이 말해주듯 우리는 스스로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 직업정치가와 기업가, 과학자에게 그 결정을 맡길 수도 없다. 독일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노래했다. “미래는 훨씬 전부터 이미 우리 안에 들어와 변화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인공지능 시대는 이미 우리 안에 들어와 ‘행복의 비밀’이 개인을 넘어 시민행복으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요청하고 있는 건 아닐까? “(자기만) 행복하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그들은 행복한 것에 얼마나 만족하고 있는가! 얼마나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가! 인생의 그릇된 목적인 행복을 소유함으로써 참다운 목적인 ‘의무’를 얼마나 잊고 있는가!” 곧 죽음을 앞둔 말년의 장 발장이 마지막 어둠, 마지막 새벽에 외친 말이다.


조계완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동향분석센터장 kyewan@hani.co.kr


등록 : 2016-11-07 20:58 수정 : 2016-11-14 23:55

한겨레21에서 보기: http://h21.hani.co.kr/arti/HERI/H_special/4259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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