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리뷰

[좋은 일자리] 노동연구원·국가인권위 등 평가 기준 마련했지만 기업들의 데이터 접근 한계로 조사 신뢰도 미흡

무서운 속도로 번져가는 ‘열정페이’가 보여주듯 질 낮은 일자리에 대한 분노가 바닥에서부터 일고 있다. 청년을 비롯해 노동으로 생계를 꾸려가는 사람들의 행복도 곤두박질치고 있다. 들끓는 분노에도 일자리를 둘러싼 담론은 여전히 ‘양적 확대’ 추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양적 논의는 과잉이고 질적 논의는 빈곤하다. 고용률 수치는 조금씩 개선되고 있지만 일자리의 질은 처참한 수준이다. 전체 취업자의 1인당 연평균 노동시간은 2124시간(2014년)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국 중 가장 길다. 성별 임금 격차도 크다. 한국 여성은 남성보다 36.7%(2014년) 적은 임금을 받는다. OECD 평균(15.6%)의 두 배를 넘는다. 한국인은 독일인보다 1년에 4개월 더 일하고 시간당 임금은 절반 수준이다.

일자리 질을 들여다보려면 각 기업의 일자리 현황에 대한 상세한 정보가 필요하다. 정부가 정례적으로 발표하는 업종별·규모별·지역별 통계를 넘어 사람들이 실제로 어떻게 일하며 살고 있는지 파악해야 한다. 하지만 기업별 산업재해 건수 현황조차 공개되지 않고 있다. 노동시간, 직장 내 차별 등에 대한 개별 기업 정보는 접근할 엄두조차 내기 힘들다. 경제활동인구조사, 지역별 고용조사, 고용형태별 근로실태조사, 사업체 임금근로시간조사 등에서도 기업별 정보는 얻기 힘들다.

그런데도 국내에는 지속가능경영대상, 여성친화기업 등에 대한 시상·표창·인증이 줄을 잇는다. 대부분 육아휴직제도와 복지정책의 유무, 임원 중 여성 비율, ‘지속가능경영보고서’ 발행 같은 단순한 정보를 바탕으로 허술하게 점수를 매긴다. 직원들이 자신이 다니는 회사에 대한 평가를 직접 매기게 하는 잡플래닛 조사 기준으로 2015년 현재 국내 10대 대기업 계열사 직원만족도를 조사한 결과, ‘일과 가정의 양립’ 분야에서 5점 만점에 2.5점도 받지 못한 기업이 41개다. 그중 20곳이 여성가족부가 지정한 ‘가족인증기업’이었다.



ILO “괜찮은 일자리는 인간 존엄 보장”

국내와 달리 외국에선 ‘일자리 질’을 제대로 측정하기 위한 논의가 이미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국제노동기구(ILO)는 1999년 ‘괜찮은 일자리’(Decent work) 개념을 제시했다. 고용의 질을 노동자 입장에서 정의한다. 즉 고용 기회, 적당한 수입과 생산적 노동, 적절한 노동시간, 고용 안정성, 일과 가정의 양립, 고용 평등, 안전한 작업환경, 사회보장, 사회적 대화 등 11가지 차원으로 구성된다. ILO는 “괜찮은 일자리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는 일”이라고 천명한다. “괜찮은 미래 전망과 근무조건, 일과 삶의 균형을 가리키며, 남녀평등과 공평한 인정, 여성 스스로 선택하고 자신의 삶을 독립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게 하는 일자리를 의미한다. 시장에서 경쟁하고 새로운 과학기술을 습득하고, 건강을 유지하는 개인 능력과도 관련이 있다. 또 사업가적 역량을 개발하고, 가치 생산에 기여한 정당한 몫을 받고 차별당하지 않는 것이다. 소속된 직장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도 포함한다.”


2000년부터 회원국의 ‘고용의 질’ 측정·개선에 관심을 가져온 유럽연합집행위원회는 ‘고용의 질’을 측정하는 10개 기준을 발표했다. 숙련도, 남녀평등, 직장 보건과 안전, 유연성과 안정성, 작업조직 및 일과 생활의 균형, 사회적 대화와 노동자 참여 등이다. 고용과 삶의 질 개선과 관련된 정보 수집·분석을 지원하고 감독하는 4개 기관이 설립됐다. 아일랜드 소재 생활 및 근로조건 개선을 위한 유럽재단, 스페인의 직업안전과 보건을 위한 유럽에이전시, 그리스의 직업훈련개발 유럽센터, 오스트리아의 인종주의와 외국인 배척에 관한 유럽 모니터링 센터가 그것이다. 


OECD는 2014년 ‘고용전망 보고서’를 통해 ‘좋은 일자리 기준’을 발표하고 이후 국가별 실태를 조사하고 있다. 그동안 꾸준히 ‘삶의 질’(Well-being) 논의를 발전시켜온 OECD는 ‘일자리의 질’과 ‘삶의 질’ 사이에 긴밀한 연관성이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그림 참조) 일자리의 질과 행복은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이다. OECD는 ‘일자리 질’의 기준을 소득의 질, 노동시장 안정성, 노동환경의 질로 크게 분류한다. 노동환경 영역의 상세 지표는 신체적 위협 요인, 업무 강도, 직장 내 차별, 업무 스트레스, 주관적 고용 불안, 업무 권한과 자율성, 교육훈련·경력발전 기회, 자아실현 가능성, 조직 참여와 직장 내 발언, 좋은 관리자, 근무시간 외 업무, 노동시간 유연성, 직업 만족도 등이다. OECD는 보고서에서 “질 좋은 일자리는 단순히 좋은 임금, 밝은 전망만을 뜻하지 않는다. 개인이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근무환경, 직장을 통해 포부를 갖고 자신이 사회적으로 쓸모 있으며 세상에 기여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느끼며 자존감을 주는 일자리를 의미한다. 근무환경의 질은 근로자의 정신과 신체적 건강에 영향을 미친다. 이런 다양한 면을 관찰해야 한다”고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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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를 누르면 더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신뢰도 높은 기업 일자리 데이터 수집 한계

좋은 일자리를 위한 논의는 국내에서도 간헐적으로 이어져 왔다. 한국노동연구원은 2007년 ‘고용의 질-거시·기업·개인 수준에서의 지표 개발 및 평가’ 보고서에서 ILO와 유럽연합의 일자리 질 연구를 토대로 한국적 맥락의 일자리 질 개념체계를 제시했다. 고용기회, 고용안정, 능력개발, 소득불평등, 근로조건(근로시간·작업환경), 고용평등, 일과 가정의 양립, 참여·발언, 사회보장이 그 기준이다. LG경제연구원은 2008년 고용안정성, 근로환경, 전문성 제고, 소득분배, 기회평등 등 여섯가지 기준의 고용의 질 측정법을 제시했다. 통계개발원은 2010년 고용안정성, 수입과 복지혜택, 근로시간 및 일과 삶의 조화, 고용 보장과 사회적 보호, 사회적 대화, 기술개발 및 교육훈련, 직장 내 관계 등 7개 기준을 통한 고용의 질 측정법을 발표했다.


국가인권위원회도 2009년 ‘기업인권경영 모범사례 연구 및 자가진단도구 개발’ 연구용역을 통해 인권보호, 균등한 기회와 비차별, 안전, 노동자 권리, 부패 방지, 소비자 보호 등을 아우르는 지표를 개발했다. 하지만 개별 기업의 상세한 일자리 데이터 접근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 연구에 참여한 홍성수 숙명여대 교수(법학)는 “개별 기업의 데이터에 접근하기 어려워 대신 어쩔 수 없이 ‘자가진단도구’를 설계하게 됐다”고 밝혔다. 신뢰도 높은 일자리 데이터 수집의 어려움은 일터에 대한 질적 평가를 시도한 다른 연구에서도 나타난다. 노사발전재단이 낸 ‘2014년 일터혁신지수로 본 한국기업체 진단평가’ 보고서는 “부족한 예산으로 다수 기업체를 조사하다보니 신뢰성 높은 조사결과를 확보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2009년부터 노사관계, 인적자원 관리, 인적자원 개발, 작업조직 등 4개 부문에 걸쳐 100인 이상 사업장 1천 개 표본에 대해 실태조사를 진행하고 있는데, 회사나 노조의 설문조사에만 기대다보니 답변 신뢰도가 낮다는 얘기다. 개별 기업의 일자리 질을 논의하려면 △어떤 기준으로 일자리 질에 대해 논의할 것인가 △그에 따른 구체적인 데이터를 어떻게 수집할 것인지가 중요하다. 한국형 ‘좋은 일자리’의 구체적 기준을 확립하고 이와 관련된 데이터를 기업이 투명하게 공개해 노동자와 소비자·투자자에게 제대로 된 정보를 제공하는 제도가 필요하다. 행복을 위한 ‘일자리 질’ 논의는 여기서부터 시작될 수 있다.


임지선 <한겨레> 기자 sun21@hani.co.kr 


[나쁜 일자리]  일터  행복의  적  ‘노동 감시’

노동자와  경영진  신뢰  ‘더불어  행복’의  조건


# 영국의 주요 일간지 <텔레그래프>는 지난 1월 직원들이 책상에 앉아 있는지 감시하는 신체 열감지기를 전 직원의 책상에 설치했다가 들통나 안팎의 비판에 부닥치자 하루 만에 철수하는 해프닝을 벌였다.


# 지난해 포스코와 KT는 정규직 직원은 물론 협력업체 직원들에게 개인 스마트폰 정보에 접근 가능한 회사 보안 애플리케이션(앱)을 설치하도록 요구했다. 개인 사생활 침해 등의 이유로 앱 설치를 거부하는 직원들은 작업장 출입 거부, 근무 태만 등의 사유로 징계하겠다고 밝혀 논란이 일었다.

정보통신 기술이 급속히 발전하면서 ‘스마트워크’는 기업들이 구축해야 할 필수 요건으로 꼽힌다. 직원들은 노트북, 태블릿PC, 모바일 등 스마트기기를 통해 언제 어디서든 빠르고 효율적으로 업무를 처리할 수 있게 됐다. 동시에 정보 보안을 목적으로 직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기업의 노동 감시도 정교해지고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기업의 노동 감시가 직원들의 컴퓨터와 스마트폰에 한정됐다면, 최근에는 직원들의 물리적 이동, 위치 추적까지 범위가 넓어졌다.”(이성훈 한국인권재단 상임이사). 택배운송 기사나 영업직원들은 스마트기기를 통해 업무 시간은 물론이고, 퇴근·여가 시간까지 이동 경로가 낱낱이 보고된다. 사무직원들도 예외가 아니다. 회사 출입카드 접촉을 통해 출근부터 회의실, 휴게실, 화장실 등 모든 동선 정보가 회사 중앙컴퓨터에 수집된다. 기업들은 업무 생산성 향상을 도모하고 효율적인 공간 배치를 위한 단순 데이터 수집이라고 주장한다. 반면에 민주노총을 비롯한 시민단체는 “광범위한 노동 감시는 직원들의 스트레스와 업무 경직성을 높여 오히려 생산성을 떨어뜨린다”고 우려한다.


직장 내 노동 감시는 경영진과 회사에 대한 직원들의 신뢰를 크게 떨어뜨린다. 취업포탈 ‘커리어’가 지난해 직장인 1102명을 대상으로 직장 내 감시에 대해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전체 응답자의 약 74%가 직장 내 감시를 당하고 있다고 여기고 있었다.

노동 감시가 미치는 영향을 물었더니 프라이버시 침해 등 부정적 의견이 64.2%로 대다수를 차지했다. 정보 유출 불안 해소 및 업무성과 향상 등 긍정적 영향을 준다는 의견은 16.0%에 불과했다. 회사의 제도와 방침에 대한 직원들의 낮은 신뢰는 조직 불신을 낳고 개인 이기주의의 팽배로 이어진다. 이런 조직에서는 누구도 행복할 수 없다.


“신뢰는 구성원들이 자기 일에 자부심을 갖고, 자발적으로 몰입·헌신할 수 있도록 하는 ‘강한 조직’의 기초다. 또 노동의 행복과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촉진제이다.” 미국 경제전문지 <포천>이 해마다 발표하는 ‘일하기 좋은 기업’의 주창자인 로버트 레버링 박사의 말이다.

<포천>의 주요 평가 항목 중 핵심 요소는 상사와 경영진에 대한 조직 구성원들의 신뢰다. 조직 내 신뢰는 커뮤니케이션을 활발하게 하며, 구성원 간 정보 공유와 협력의 질을 높여 더 나은 성과를 창출한다. 그런 점에서 신뢰는 일터에서 노동자와 경영진이 더불어 행복할 수 있는 근간이다.


박은경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원 ekpark@hani.co.kr




등록 : 2016-05-20 15:18

한겨레21에서 보기: http://h21.hani.co.kr/arti/HERI/H_special/4173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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