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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를 비롯한 북부 아프리카에서 펼쳐지고 있는 인터넷 혁명에 대해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많은 사람은 독재체제에 저항하는 이 지역 시위자들이 디지털 기술에 힘입어 혁명을 시작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힘을 모았다고 생각한다. 문자메시지나 트위터로 검열을 피할 수 있고, 세계에 언제든 연결되는 인터넷을 통해 독재정권의 부당함에 타격을 줄 수도 있고, 유튜브에 정부의 잔혹행위 동영상을 순식간에 올릴 수도 있다. 이런 새로운 미디어들은 어느 정도는 변화를 만들어내는 핵심 요인이다.
그러나 벨라루스 출신의 예브게니 모로조프는 최근 출간된 <네트 딜루전>(Net Delusion)에서 ‘사이버 유토피아’ 환상을 깨뜨렸다. 그는 디지털미디어가 가진 잠재력이 폭발한 것으로 기대됐던 2009년 이란 ‘녹색혁명’의 실패를 예로 든다. 모로조프는 뉴미디어의 민주주의적 잠재력에 열광하는 행동가들에게 독재자들도 인터넷을 맘껏 활용한다고 경고한다. 독재자들은 인터넷 사용자들을 추적해 계정을 차단하고, 사이트를 폐쇄한다. 심지어 직접 반체제주의자들의 모임을 주선하여 참석한 사람을 한꺼번에 체포하기도 한다.
이런 사실들은 변화하는 정치에 대해 즉각적인 설명을 가능하게 해준다. 그러나 아무리 멋들어진 설명이라도 우리를 완전히 이해시키지는 못한다. 우선 이것 아니면 저것과 같은 논쟁은 우리를 양극화하고, 미묘한 차이나 세부사항에서 우리의 주의를 흩뜨린다. 더욱 중요한 점은 변화에 관한 테크놀로지의 역할과 그 결과를 확인하려는 노력에만 치중하면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된다는 점이다. 어떤 하나의 기술이 혁명으로 바로 연결되기는 불가능하다. 마찬가지로 테크놀로지의 정확한 영향을 측정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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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만 주의 깊게 살펴보면 이집트, 리비아 등지에서의 봉기에는 빈곤, 경기침체, 부족간 갈등과 같은 역사적·사회적 요인이 크게 작용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미디어 기술 사이에도 그 역할에 차이가 있었다.
“신기술이 혁명을 가져온다”고 믿는 열광론자와 “테크놀로지의 역할은 기대할 수 없다”는 신중론자가 서로 갑론을박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더 중요한 점을 간과할 수 있다. 즉, 좋든 싫든 우리는 ‘상징정치’의 시대에 들어서 있다는 것이다. 이는 지금의 정치가 지난 세대의 모든 참가자들이 적응해야만 했던 지배적인 환경과는 다른 새로운 정보환경에 들어와 있음을 뜻한다.
테크놀로지는 주역 아닌 조정자
테크놀로지는 상징정치에서 필수적이다. 그러나 테크놀로지의 역할은 주역이 아니라 막후조정이다. 조정 역할은 대중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지지자들을 동원하고, 시민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분석해 알려주는 것이 핵심이다. 좀더 단호하게 말하자면 오늘날의 정치는 이런 환경에 맞도록 이루어지지 않으면 대중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면, 지난 몇 년 사이 눈에 띄는 현상 하나는 시민이 정치집회에 참석해 정책에 대해 의견을 내거나 정치인과 응답하는 기회가 줄어든 것이다. 기성 정당들은 공공집회보다는 텔레비전을 겨냥한 선전을 더욱 중시한다. 이런 선전활동은 이제 정치커뮤니케이션의 주된 수단이다. 물론 중요한 연설이 행해지는 정치집회는 여전히 열린다. 하지만 횟수는 매우 제한적이며 그나마도 교묘히 연출된다. 대부분의 집회에는 초청자만 입장할 수 있다. 이렇게 연출된 집회는 언론의 입맛에 맞도록 멋들어진 구호나 반대파에 대한 좌충우돌식 인신공격으로 채워진다. 이것은 이미지와 메시지를 세심하게 다듬는 정치기획가인 피아르(PR) 전문가들이 만드는 무대이다.
상징정치는 피아르 전문가의 도움을 받은 직업정치인들이 집에 틀어박힌 수동적인 시민들을 어르고 달래고 조작하는 현상이다. 이런 정치환경에서는 텔레비전 화면이 잘 받는 정치가들이 선호된다. 집 안에서 편안히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는 오늘날의 시민들에게, 구름같이 모인 열광하는 대중을 현란한 말솜씨로 휘어잡던 왕년의 정치가들은 괜히 소란하기만 하고 장광설을 늘어놓는 사람처럼 보일 뿐이다.
오늘날의 정보환경은 어지럽고 뒤죽박죽이다. 기성 정당에 의한 ‘위로부터의 조정’은 기계적이고 일률적이었지만, 블로그나 트위터 같은 새로운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밑으로부터의 조정’은 종종 무례하고 무책임하다. 출처도 모르는 익명의 정보들이 끼어들어 공식 선거기구의 의사전달을 방해한다. 이런 일은 기존의 방법보다 훨씬 저렴하기 때문에 선거운동 캠프에도 이제는 기본적인 선거운동 수단으로 쓰인다. 웹사이트를 만들고 지지자들이 사용할 서버를 구축해 다른 정치인들의 발언을 비판하고 자신의 의견을 띄우는 데에는 별로 돈이 들지 않는다. 이렇듯 상징정치는 점점 더 복잡해지고 다루기 어려운 정보환경을 만든다. 동시에 조직적 청원과 같은 형태로 반대의견을 결집하는 데 기여한다.
최근 수년 동안 가속화되고 있는 미디어와 생활의 글로벌화도 ‘밖으로부터의 매개’(mediation from beyond)를 불러오고 있다. 국내 미디어는 국내 문제에 우선을 두며 대중들에게 자국어로 전달하기 때문에 여전히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정보의 흐름에서 국경의 개념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전례 없던 분량의 뉴스와 의견이 위성방송, 이메일의 형태로 오고 간다. 사업이나 관광 목적으로 외국을 드나드는 방문자도 늘어났다. 비교적 정적인 공동체에서 온 사람들에게 외국의 거리에서 매일 마주치는 이런 모든 생경함은 엄청난 도전이자 혼란이다. 사람, 음식, 종교, 언어, 의복, 라이프스타일, 이 모든 것이 다르다.
디지털은 언제나 흔적을 남긴다
오늘날 선진사회의 특징이 되어버린 이런 정보환경은 무척이나 혼란스럽다. 정당과 정치가들에게도 자신들의 메시지를 성공적으로 관리하는 노력은 쉽지 않다. 피아르 캠페인의 성공을 장담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것이 예측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노력을 포기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정치가의 임무는 대중을 설득해 자신의 의견과 정책을 지지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결코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이제는 쉽게 정보를 찾을 수 있고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기 때문에 정치가들은 자신의 이력과 과거 모든 행동이 검증과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대비해야 한다. 이렇게 시시콜콜 따지는 정치는 많은 뛰어난 후보들을 주저앉힐 수도 있다. 결국 정치를 성인(聖人) 아니면 열광자의 손에 전적으로 넘길 수도 있다. 그럼에도 디지털 기술이 주는 변화는 반드시 받아들여야 한다. 버락 오바마는 2009년 아주 바람직한 걸음을 뗐다. 그는 디지털 기술을 통해 핵심 지지자들과 소통해 그들을 움직이게 하고 다수의 소액 기부로 큰 정치자금을 모았다.
디지털 기술은 지나간 흔적을 항상 남긴다. 지지를 하든 반대를 하든 간에 우리의 행동은 과거에는 생각하지도 못했을 정도로 아주 세심하게 분석될 수 있다. 정보사회는 사실 감시가 가능한 사회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은 이를 우려한다. 정보가 나쁜 자의 손에 들어간다면 시민의 자유가 위협받을 수 있다. 하지만 정치를 하고자 하는 이들은 대중의 마음을 가까이 보기 위해 디지털 궤적을 따라가야 한다. 어떤 청원에는 얼마만큼의 기부금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우리의 구호에 가장 공감할 소상공인이 어디에 있는지, 지난번 대화에서 우리에게 동조했던 청년들은 정확히 어디에 거주하는지 등의 정보는 매우 중요하다.
상징정치의 부정적인 요인에 대해서는 당연히 반대한다. 그러나 상징정치를 거부하는 것은 정치를 온통 부정하는 셈이 된다. 우리가 항해하고 있는 ‘매개된 정치’의 바다에서 물의 흐름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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