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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강수(66) 한국가스공사 사장은 최근 대영박물관에서 발간한 <100가지 유물 속의 세계 역사>라는 책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이 책의 저자인 닐 맥그레거 대영박물관장은 ‘유물과 역사의 차이’라는 관점에서 세계의 100가지 유물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역사는 승리자가 쓴 것이지만, 유물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유물은 늘 두 개의 관점에서 볼 수 있다. 하나는 정복자의 것이고, 또 하나는 피정복자의 것이다.
실은 한국가스공사가 늘 하고 있는 ‘개발’도 마찬가지다.
선진국과 자원보유국 사이의 갈등
“개발은 한편으로는 착취이기도 합니다. 개발자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자원을 확보하는 일이지만, 그곳에 사는 원주민 입장에서는 늘 착취일 수도 있는 것이지요. 선진국과 자원보유국 사이에 늘 일어나는 갈등이 바로 이것이지요. 우리 기업의 지속가능경영은 피개발자 입장을 고려한 개발과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가스공사는 운명적으로 사회적 책임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특히 사업을 공격적으로 키우고 있는 지금, 그 책임은 더욱 절실히 요구된다. 공급망 확충으로 천연가스 사용 가구 수를 2010년 말 1300만에서 2015년에는 1500만으로 늘릴 계획이다. 외국 자원 확보도 적극 추진해, 중동, 동남아, 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호주) 등까지 진출하며 현재의 자주개발률 2.3%를 2017년 25%까지 늘리려 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일찍부터 관련된 활동을 시작했다. 2007년 유엔글로벌콤팩트에 가입했고, 2009~2010년 다우존스 지속가능성 한국지수에도 편입됐다. 최근에는 ‘온누리사업’이라는 이름의 사회공헌활동을 통해 사회복지시설 등에 대한 가스요금 할인과 난방시설 개선 활동을 강화하고 있다.
지난해 ‘동아시아 30’에 이름 올려
2010년 말, 가스공사는 한겨레경제연구소가 한·중·일 전문가들과 함께 708개 동아시아 기업을 평가해 사회책임경영 우수기업 30곳을 추린 ‘동아시아 30’에 이름을 올렸다. 아시아 맥락을 반영한 사회책임경영 평가에서, 이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한국 기업 5곳 중 하나가 된 것이다.
“사실 사회책임경영에서 이야기하는 상생의 정신은 이미 공생, 홍익인간, 이화세계 등의 이름으로 옛 생각 속에 있었습니다. 그 정신을 지금 실천하는 것이지요.”
또 한 가지, 자원사업이 지속가능성과 관련을 맺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대부분의 계약이 장기라는 점 때문이다.
“20년짜리 계약을 추진하다 보면, 20년 뒤를 생각하면서 경영할 수밖에 없습니다. 단기 성과를 생각해서는 안 되며, 환경, 사회, 경제 성과가 함께 가는 지속가능경영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지 않은 이유
주 사장이 취임했을 때, 가스공사에는 ‘비전 2017’이라는 계획이 세워져 있었다. 대부분의 공기업에서 새 사장이 전임자의 계획을 폐기하는 것과 달리, 그는 새로운 비전을 세우지 않았다. 역시 ‘장기적 관점’에 대한 신뢰 때문이다.
“자원과 관련된 기업의 책임자는, 그 긴 시간 중 잠깐 동안을 경영하는 것입니다. 긴 안목의 경영을 해야 합니다. 3년 동안의 성과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에너지 기업을 생각하면, 역시 기후변화 이슈가 떠오른다. 지나친 탄소배출로 기후가 변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제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가스공사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고 있을까?
“실제 측정해 보면, 놀랍게도 공장이 많은 수도권보다 그렇지 않은 지방의 탄소배출량이 더 높습니다. 수도권에서는 천연가스가 잘 공급되고 있는 반면, 지방에서는 아직도 엘피지와 연탄을 사용하기 때문이지요. 천연가스는 화석연료이기는 하지만, 그중 탄소배출이 상대적으로 낮은 에너지원입니다. 신재생에너지가 대중화되기 전까지는 탄소배출을 억제하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봅니다.
한편으로는 여전히 화석연료 기반 기업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탄소 저감 노력을 진행중입니다. 기업 자체로 탄소배출 목표를 정하고 관리하고 있으며, 직원들에게 개인별 탄소포인트 프로그램을 시행하면서 개인들도 변화하도록 노력중입니다. 또 기후변화를 기회로 활용하도록 녹색산업 기회를 개발하고 있는데, 상반기 중 구체적 방안이 나와 추진될 것입니다.”
주 사장은 ‘현대맨’이면서 동시에 ‘자원맨’이다. 서울대 지질학과를 졸업한 뒤 1978년 현대중공업에 입사해 1998년 현대종합상사 부사장을 지낼 때까지, 늘 현대와 자원이 함께했다. 그동안 그는 한 차례도 퇴근시간을 넘겨 사무실에서 일한 적이 없다고 한다. 나머지 시간에는 늘 걷고, 책을 읽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이렇게 장기적인 일을 할 때는, 현재에 매몰되기보다는 아주 멀리 내다보며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게 그의 경영 철학이다. 당장 방만하게 한다는 비난을 듣더라도, 장기적으로 필요한 일을 반드시 해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대영박물관장이 꼽은 100대 세계 유물 중에는 통일신라 시대의 토기 기와 한 점이 들어 있다. 당시 신라에는 백제와 고구려로부터 강제로 압송된 호족들이 몰려들어, 때아닌 주택 건설 붐이 일었다. 그래서 도기 기와가 아닌, 대량생산이 가능한 토기 기와가 유물로 남았다. 역시 정복과 피정복의 희비가 엇갈리는 지점이다. 신라의 기와 생산자가 서 있던 바로 그 지점에, 한국가스공사도 서 있는 게 아닐까.
이원재 한겨레경제연구소 소장 timelas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