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리뷰

[노동과 행복] 장기 휴가 그림의 떡… 비정규직은 연차도 없어, 장시간 노동은 ‘시간 빈곤’ 부르고 상품화 강요


2014년 6월의 어느 날 밤 서울 서초동 삼성전자 본사에서 직원들이 야근을 하고 있다. <한겨레> 김영진

지난해 여러 차례 제조업체 노동자들을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다. 밤샘작업이 사라진 작업장에서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보기 위해서다. 우선 수면건강이 좋아졌고 가족과의 대화 시간이 늘어나고 ‘함께’ 하는 활동이 많아졌다. 그동안 해보지 못한 여가 활동도 늘어났다. 몸의 변화, 관계의 변화, 삶에 대한 태도의 변화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 가운데 A씨의 대답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서울에 지하철이 생기고 이렇게 편하게 될지 누가 알았겠느냐”는 것이다. 밤샘작업이 사라진 결과를 이렇게 비유하다니 지금까지 잊히지 않는다. 덧붙여 그는 돈을 한 보따리 싸다줘도 절대로 이전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다고 했다. 어떠한 시간 구조에 발을 딛고 있느냐에 따라 삶의 관점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다.


더욱 재미있는 점은 그 자신조차 이전에는 밤샘작업을 없애는 게 어떻게 가능할 수 있겠느냐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사실 50여 년 동안 밤샘노동을 이어온 업계의 상황에 비춰볼 때 사람들에게 밤샘작업의 폐지는 오랜 바람이었을 테지만 꽤 낯설고 두렵고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밤샘작업 없어지니 새 세상 열려

장시간 노동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 밤샘작업이 사라지기 전 그의 생각과 똑같지 않을까 싶다. 이를테면 2주간의 장기 휴가에 대한 대한민국 국민의 생각은 비슷할 거라 본다. “좋은 얘기이긴 한데 그게 가능할까?” “현실적으로 어렵다” “터무니없다” “프랑스에서나 가능한 일이지”라는 반문과 냉소가 대부분이다.


현실과 이상의 간극이 크고 오래 지속될 때 우리 대부분은 그 이상을 포기하고 자조적 태도를 취한다. “현실적으로 바꾸기 어렵다”고 보기 때문이다. 장시간 노동사회가 사람들을 자조적으로 만든다는 사실 또한 참담한 일이다. 법정 근로시간만 일하고, 정시 칼퇴근하고 출산휴가나 연차휴가를 모두 쓰는 것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도 마찬가지다. 당연한 권리의 실천을 가로막는 짙은 그림자,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자조적 태도 말이다.


프랑스에나 있을 법하지만 2주 휴가는 대한민국의 모든 노동자가 제도적으로 보장받은 권리다. 저 먼 나라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 될 수 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연차휴가의 소진율은 채 절반이 되지 않는 곳이 수두룩하다. 이는 제도가 도입된다 하더라도 제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따라 효과가 전혀 다르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제도와 현실의 간극은 언제나 발생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좋은’ 사회, ‘행복한’ 사회라고 한다면 그 간극이 적은 사회가 아닐까! 간극을 최소화하는 관리감독 장치와 제도의 운용을 최대화할 수 있는 운동과 실천이 필요하다.


그런데 앞서 말한 ‘대한민국의 모든 노동자’에서 ‘모든’은 정규직 노동자로 제한된다. “연차로 어디 어디를 다녀왔다”는 표현은 한국 사회에서 정규직만 쓸 수 있는 특권적 언어다. 비정규직 노동자는 한 회사에 몇 년을 근무해도 연차휴가가 발생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에서 절반이 넘는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연차휴가는 불가능하다. 모든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보편적 권리가 어느새 특권적인 혜택이 됐다. 어디 연차만 그러한가! ‘더 좋은’ 사회, ‘더 행복한’ 사회라고 한다면 제도가 사회 변화의 속도를 더 빠르게 따라가는 것이다. 그런데 비정규직이 절반에 이르는 한국의 노동 현실에서 연차휴가 부여 기준은 너무 높다. 노동세계의 변화에 부합하도록 관련 제도를 조정하는 작업이 요구된다.


특정한 리듬이 반복되면 거기에는 일정한 패턴이 생겨난다. 이는 다른 리듬과의 차이를 만들고 거기서 발생한 고유 패턴은 자기 확산하는 존재가 된다.



리듬 반복되면 패턴으로 굳어져

오랫동안 기계적으로 반복되어온 장시간 노동이라는 리듬은 우리 몸과 마음에 새겨져 자연스러운 질서 그 자체가 돼버렸다.


장시간 노동사회에서 우리는 ‘시간 빈곤’(poverty of time)에 허덕이는 존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우리는 장시간 노동이라는 돼지우리에 갇혀 악취에 익숙해진 탓에 냄새를 맡더라도 얼마나 고약한지 인지하지 못하는 저인지 상태에 놓여 있다.


눈여겨볼 만한 자료가 있다. 유럽연합(EU) 국가와 비교해 한국의 노동시간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조사다. 한국은 EU 국가보다 노동시간이 상대적으로 길었음에도 장시간 노동에 대한 한국인의 주관적 인식은 EU 국가보다 상대적으로 낮았다. 우리는 수면시간이나 개인시간을 줄여가면서까지 오래 일해도 이를 문제화하지 않거나 못하는 상태에 놓여 있다.


저인지 상태의 심각성을 말해주는 증거는 또 있다. 인터뷰에서 노동시간의 실태를 묻는 질문에 B씨는 “그래도 우리는 평균이에요”라고 답했다. 그런데 B씨가 말한 ‘평균’은 월 초과 노동시간만 60시간에 육박하는 것으로, 수요일 빼고 매일 2시간 잔업에 매주 특근을 포함한 수치다. B씨의 평균이란 표현 속에는 이러한 장시간 노동이 감내할 만한 것으로 크게 문제되지 않는 정도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물론 그것이 문제라는 점을 잘 알고 있지만 “어디들 안 그렇겠어!”라는 냉소와 체념의 태도는 장시간 노동을 문제 제기의 대상이 아니라 견딜 만한 것으로 용인하게 한다.


시간이 빈곤한 존재에게 한갓진 삶은 불가능하다. 한갓진 삶에 대한 상상과 실천이 퇴화된다는 말이 더 적합할 것이다. 장시간 노동사회는 시간의 권리를 언제나 주변화한다. 한갓진 삶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기획해야 할 그 무엇이다. 시간 권리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끔 문화적 토대를 탄탄히 하는 기획들, 자유시간을 주체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상상하고 자극하는 실천들이 지속적으로 마련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다른 삶, 다른 세계를 그려나갈 수 있다. 장시간 노동을 해체하고 ‘더 좋은’ 사회, ‘더 행복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제도 차원의 노동시간 단축은 물론 사회관계, 일상생활, 정신세계 등 모든 차원에서 대안적인 내용을 갖추어야 한다. 그 가운데 여가문화 교육을 꼽을 수 있다. 쉬고 노는 일에도 방법과 훈련이 필요하다. 밤샘노동이 사라진 이후 A씨가 새롭게 고민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자유시간에 대한 열망을 자극하고 그것을 주체적으로 전유할 수 있도록 하는 여가문화 교육! 여가문화 교육은 장시간 노동과의 거리 두기를 선택하도록 이끄는 유도제이자, 장시간 노동으로의 회귀를 차단하는 방부제이자, 근면 신화에의 구속력을 떨어트리는 완화제다.


그렇지 않으면 자유시간을 스스로 포기하고 다시 노동으로 회귀하는 모습도 생겨난다.


“공친 날 함바/ 손톱 밑 때 빼고/ 깔끔한 옷 갈아입고/ 현장 입구 횡단보도 앞에 선다/ 하루쯤은 현장 아닌 곳에도 가보고 싶은데/ 어디로 가야 하나/ … 노동 이외엔 어울릴 친구가 없다고/ 빨간 신호등이 자꾸 깜빡거린다.”

이 시는 자유시간을 갖게 된 ‘개미의 역설’을 보여준다. 장시간 노동사회의 오랜 신화인 ‘개미와 베짱이’만을 학습하는 환경에서는 자유시간의 가치를 온전히 인식하고 실천하는 일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장시간 노동의 대안(적 삶)’이 무엇인지 각 개인에게 떠맡기는 것이 아니라 사회 차원에서 고민하고 제시해야 하는 이유다.


장시간 노동으로 인한 시간 빈곤은 접촉 부재-관계 단절-공감 상실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낳는다. 또한 장시간 노동은 사회 참여를 떨어뜨려 폭넓은 사회관계를 차단하고 사람들을 고립시킨다. 시간이 부족하기에 참여는 ‘피곤하고 성가신 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장시간 노동사회에서 민주주의의 토대가 허약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평화운동가이자 정치사상가인 더글러스 러미스는 “사람들이 모여 의논하고, 합의하고, 정치에 참가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린다. 그런 틈이 없으면 정치는 불가능하다. 여가시간이 있어야 정치 외에 문화를 만들고, 예술을 만들고, 철학을 한다”고 말했다.


시간 빈곤의 또 다른 효과를 보자. 장시간 노동으로 사람들은 그나마 남는 여분의 시간을 만족도 높게 보내기 위해 상품 서비스에 더욱 의존한다. 시간 비용과 상품집약적인 여가소비의 상관성이 높다는 이야기다. 맞벌이 부부를 생각해보면 된다. 사회학자 줄리엣 쇼어는 시간이 빈곤한 사람들에게 상품 서비스가 어떻게 파고들어가는지 탁월하게 보여준다. 이를테면 아이와 놀아줄 시간이 없으니 키즈카페로 대체하거나 장난감으로 때우는 식이다. 아이를 돌볼 시간이 없으니 학원으로 ‘뺑뺑이’를 돌린다. 쉼과 여유 부리기로 체력을 회복할 수 없으니 자양강장제와 ‘비타민 주사’를 투여한다. 요리할 시간이 없으니 외식이나 배달 음식으로 끼니를 때운다. 밤늦은 퇴근으로 몸이 그야말로 ‘시루떡’이 되니 부부관계도 발기부전치료제에 의존한다. 장시간 노동과 돌봄의 상품화, 먹거리의 상품화, 가족 여가의 상품화, 건강의 상품화는 이렇게 연결된다.


더욱 역설적인 것은 늘어난 소비지출을 메우기 위해 사람들은 또다시 장시간 노동을 감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교육과 육아, 가사, 놀이 등 상품 서비스에의 의존 확대가 노동자를 또다시 장시간 노동으로 내몬다는 이야기다. 장시간 노동과 소비주의와의 내밀한 관계, 일과 소비의 악순환이다. 많아진 소비 항목, 높아진 소비 규범 그리고 빨라진 소비 속도가 사람들을 장시간 노동에 결박시킨다는 쇼어의 지적은 그래서 새겨볼 만하다.



소비지출 메우려 또다시 장시간 노동

쇼어의 논의는 소득이 높아지면 장시간 노동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라는 일반적 통념의 허점을 잘 짚고 있다. 사람들은 ‘더 좋은’ 학원, ‘더 좋은’ 체력보충제, ‘더 좋은’ 도우미, ‘더 좋은’ 먹거리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잔업 특근을 하나라도 더 뛰려 한다는 점이다. 소비주의의 압력은 장시간 노동을 영속화하는 새로운 변수인 셈이다. 역설적으로 불황과 위기 시대에 일-소비 악순환의 고리는 더욱 견고해진다.


제도 차원에서 노동시간이 단축되어도 상품 서비스 의존 경향은 장시간 노동을 스스로 감내하도록 만드는 압력으로 작용한다. 이는 노동시간 문제를 접근하는 데 작업장 중심의 노동시간 단축 운동이 ‘작업장 밖’ 생활문화운동과 왜 결합되어야 하는지 보여준다. 더욱 많아지고, 더욱 높아지고, 더욱 빨라진 소비패턴과 거리 두는 방식의 생활문화운동은 장기적으로 장시간 노동에의 예속 상태를 해체하는 우회로가 될 수 있다.


시간의 민주화(democratization of time)를 앞당기는 데는 여러 가지 상이한 접근이 필요하다. 노동시간의 상한 설정, 저임금 구조 개선, 지체된 제도 정비, 근면 신화 해체, 시간 권리에 대한 인식 확산을 포함해 소비주의 압력을 줄이는 일 또한 반드시 필요하다. 여기에는 개인적 차원, 집단적 차원, 사회적 차원의 실천이 요망된다. 개인 차원에서는 소비 패턴을 ‘체면 소비’에서 ‘가치 소비’로 바꾸거나 목공하기, 텃밭 가꾸기, 요리하기, 바느질하기 같은 삶의 기술을 배우는 게 가능할 것이다. 집단적 실천으로는 먹거리 생협, 공동육아, 공동교육, 마을장터 등의 생활문화운동을 들 수 있다. 사회적 차원에서는 주거, 교육, 의료 등의 공공성을 높이는 방식 또한 소비주의 압력을 줄이고 우리를 더 ‘행복한’ 사회로 안내하지 않을까.


김영선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노동시간센터 연구위원



등록 : 2016-05-20 15:04

한겨레21에서 보기: http://h21.hani.co.kr/arti/HERI/H_special/4173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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