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리뷰

[실업자와 행복] 노동안정성 비슷한 외국보다 행복지수 훨씬 낮아… 실직 불행감 줄이려면 고용안전망 강화해야


10여 년 전, 독일 베를린에서 유학 생활하던 어느 날 참으로 신기한 구경거리를 만났다. ‘행복한 실업자’라는 단체가 지방고용노동청 앞에서 “실업자를 선별하는 조치를 폐지하고 실업급여를 차별 없이 지급하라”고 외치고 있었다. 흔히 볼 수 있는 집회이거니 생각하고 지나치려다 마이크를 잡은 이의 발언을 듣고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는 “우리가 불행한 것은 일이 없어서가 아니라 생활에 필요한 돈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불행은 실업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잘못된 노동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말했다. 말인즉슨 무의미하고 지루한 노동이 불행의 원인 제공자라는 것이다. 불행을 안겨주는 노동이 존재하는 한 다시 일할 마음이 없고, 적은 액수라도 실업급여를 받으면서 차라리 자기 시간을 가지고 삶을 누리는 편이 더 낫다는 뜻이었다. 이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 발언자의 의중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당시의 기억이 새롭다.


과연 실업자는 불행할 수밖에 없는가?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가진 상식 중 하나가 “실업자가 되면 소득이 줄어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경우 일자리 유지 여부가 행복의 주요 척도로 작용하는 게 일반적이다. “실업자는 불행하다”는 명제를 증명하기 위해 이루어지는 경제학적 분석의 논리는 대략 이렇다. 일자리 상실은 근로소득 감소를 초래하고, 개인의 소비 여력 등을 반영하는 후생복리 수준을 떨어뜨려 행복감은 하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 전개는 다양한 실증연구를 통해 “실업상태에 있는 이들의 주관적 안녕감, 즉 행복감이 취업상태에 있는 사람들보다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그러나 실업과 행복 사이에 존재하는 부(-)의 상관관계에 대한 일반적 통념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례들도 존재한다. 먼저 실업이 자발적이냐, 비자발적이냐에 따라 행복에 미치는 영향은 달라질 수 있다. 경제학자 앤드루 클라크·앤드루 오즈월드가 쓴 ‘불행과 실업’이라는 논문을 보면, 자발적으로 일을 그만둔 이는 실업에 처해지더라도,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자유시간과 여가를 얻게 됨으로써 행복감을 높일 수 있다. 자기선택에 의한 여가 확보는 행복을 촉진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뿐만 아니다. 실업 기간이 길어질수록 개인이 느끼는 불행의 증가 속도가 조금씩 줄어들고, 어느 시점을 지나면서 불안감은 정체되는 경향을 보인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이스털린의 역설’(Easterlin’s Paradox)에 따르면, 소득이 일정 수준 이상 올라가면 행복감의 증가 속도가 정체되듯, 소득이 일정 수준 이하로 낮아지고 그 상태가 지속되면 불행감도 더 이상 증가하지 않을 수 있다.


‘실업자는 불행할 수밖에 없다’는 사회적 통념에 정면으로 반론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다. ‘피로사회’라는 용어가 보여주듯 현대사회에서 과로노동은 불행의 주요 원인이다. 한국 사회처럼 성과지향 과잉의 사회에서는 일 대신 여가가 행복을 가져다주는 조건으로 작용할 수 있다. 장시간 노동 체제에 찌들어 있는 ‘과로사회’ 개념에서도 이런 생각을 떠올릴 수 있다.


한국 실업 위험 기이하게 낮은 까닭

※이미지를 누르면 더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실업자 개인마다 불행감에 대한 느낌이 다르듯, 특정 사회·국가에 따라 일자리를 잃어버린 이들이 느끼는 불안 정도가 달라지기도 한다. 고용 관련 사회안전망이 얼마나 튼튼하고 촘촘한지가 이런 차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아마 실업급여 수준이 높고 수급 기간이 긴 독일 실업자가 느끼는 행복만족도가 우리나라 실업자보다 훨씬 높을 것이다. 실업보험제도에서의 차이가 인간의 행복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연구한 스위스 경제학자 알로이스 슈트처·라파엘 라리브는 ‘실업보험제도가 약한 나라에 사는 실업자가 느끼는 삶의 만족도가 그렇지 않은 나라의 실업자보다 떨어진다’는 사실을 국가비교연구를 통해 확인한 바 있다. 고용보험 등 사회안전망이 실업자의 행복감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우리나라 상황에 결부시켜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지난 1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노동시장의 안정성 측정과 개인적 행복에 대한 의미의 평가’ 보고서에서는 “실업위험과 고용보장의 정도가 개인의 주관적 안녕감(행복)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고 결론지었다. 또 34개국 비교연구를 통해 각 국별 행복 편차가 발생하는 이유를 실업률 지표보다 ‘어떤 실업이냐’를 의미하는 실업의 성격에서 찾고 있다.


2013년 OECD 통계에 따르면, 실업자가 될 가능성과 예상 실업 기간을 종합 산출하는 ‘실업위험’은 한국이 34개국 중 가장 낮다. 일반적으로 고용불안이 일상화돼 있다고 평가받는 우리나라 실업위험이 이렇게 낮게 나온 이유가 뭘까? 실업 기간이 짧기 때문이다. 한국의 경우 실업자가 될 가능성은 OECD 회원국 중에서 중간 수준이지만, 평균 실업 기간은 2개월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최하위다. 고용보험이 부실하기 때문에 실업 이후 당장 생계위협을 느껴 원하지 않는 일자리라도 빨리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나라의 낮은 실업위험이 세계 최하위 근속연수 및 높은 임시직 발생빈도와 연관돼 있음을 보여준다.


실업위험은 실업보험 수혜율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노동시장 불안정성을 결정한다. 실업급여율과 소득대체율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실질실업보험률’을 계산하면, 한국은 OECD 34개국 중 실업보험 혜택이 15번째로 낮다. 이런 이유로 한국은 지표상으로는 노동시장 안정성이 34개국 중 5번째로 높은데도, 주관적 안녕감을 표현하는 행복지수는 26위에 머물러 있다.


한국도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노동시장 불안정성과 행복감 사이에 부(-)의 상관관계를 보이지만, 동일한 노동시장 안정성하에서 삶의 만족도가 다른 나라보다 현저하게 낮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느끼는 삶의 만족도는 노동시장 안정성이 한국과 비슷한 오스트리아·룩셈부르크에 비해 훨씬 낮다. 한국 실업자가 다른 나라의 실업자보다 불행감을 훨씬 더 느끼는 이유는 여러 요인이 작용하겠지만, 노동시장의 불안정성을 제어하기에는 역부족인 사회안전망 부실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인간의 주관적 안녕감을 표현하는 행복도, 개인 문제로 환원할 수 없는 사회적 맥락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즉, 실업을 개인 문제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성과지향적 경쟁사회로 인해 노동시장에서 ‘탈락’되거나 ‘배제’되는 현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실업이 불가피한 것이라면 실업자를 포용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으로서 고용안전망 확대·강화가 요청되는 것이다.



이상호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 lshberlin0612@hani.co.kr


등록 : 2016-05-20 17:45

한겨레21에서 보기: http://h21.hani.co.kr/arti/HERI/H_special/4175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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