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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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복지수준 높이려면 - 노조간부·기업가·정치인 설문조사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와 연세대 SSK(한국사회기반연구사업) 작은복지국가연구팀(책임자 양재진 행정학과 교수)은 한국 복지국가 발전과 관련한 3대 핵심 행위자인 노동조합 간부, 기업가, 정치인 등 총 410명을 상대로 복지정책에 대한 인식조사를 벌였다. 이번 조사 결과는 한국의 복지 수준이 왜 민주화와 경제 수준에 비해 낮은지, 그리고 복지국가 발전을 위해선 우리 사회가 어떤 정치사회적 개혁을 해야 할지를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최근 정치권과 시민사회 등이 ‘복지증세’ 이슈를 놓고 모처럼 정책 논쟁을 벌였다. 박근혜 정부가 지난 13일 발표한 ‘2013 세법개정안’이 그 불씨였다. 논란은 초기엔 “부자감세 놔두고 월급쟁이 쥐어짜는 세제개편안” 또는 “대기업 증세 빠진 세제개편안” 등 정부안에 대한 비판에 집중되는가 싶더니 급기야 “부자감세를 먼저 철회하라”는 민주당의 중산층·서민 세금폭탄론과 “서민·중산층이 낼 테니 부자도 내라”는 복지국가운동 단체들의 ‘보편증세론’으로 맞서는 양상으로 비화됐다. 이런 모습은 이른바 ‘복지정치’의 시대가 우리 사회에도 도래했음을 보여준다. 복지국가는 본질적으로 복지를 둘러싼 정치사회세력 간의 갈등과 대립, 타협의 역동적 과정, 곧 ‘복지정치’의 산물이다. 복지국가의 건설과 그 형태와 수준은 무릇 복지를 둘러싼 여러 정치 및 사회세력의 힘의 역학 및 상호작용 등 복지정치적 요소들이 작동된 결과인 것이다. 특히 노동조합의 조직화 정도와 진보정당의 힘의 세기 등이 중요시된다. 이 점에서 볼 때 복지증세는 가장 치열한 복지정치적 화두다. 이런 복지정치에 영향을 끼치는 핵심 행위자는 노동조합과 자본가집단 그리고 정당 또는 정치인이다.

우리 사회에서 그동안 복지국가 건설의 목소리가 커졌지만 정작 이들 복지정치의 핵심 행위자들이 제각기 어떤 정책을 더 바라는지를 묻는 복지정책 선호 경향 조사나 복지정책 결정 과정에서 나타난 권력관계 등에 대해선 관심이 적었다. 즉, 왜 한국은 경제 수준과 민주화에 비해 복지 수준이 낮은가, 기업가와 우파 정치인들은 공공복지를 반대한다는데 과연 사실인가, 한국 복지의 저발전은 혹 노조가 복지국가 건설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와 같은 유의 질문에 대한 답찾기에는 아주 미흡했다. 이에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와 연세대 양재진 교수팀은 복지정치의 3대 주요 행위자인 노조 간부와 기업인 그리고 정치가들의 복지정책에 대한 태도 및 정책 선호 경향 등을 알아보는 설문조사를 벌였다. 이 조사는 2012년 10월부터 12월까지 이뤄졌으며, 전국 및 산별노조 소속 노조 간부 182명, 대·중소기업의 기업가 106명, 국회의원 122명(새누리당 50명, 민주당 59명, 기타 13명) 등 모두 410명이 응답했다. 응답은 10점 만점에 5점은 중립을, 그 이하의 낮은 점수는 반대 내지 축소를 뜻한다. 리서치플러스에 의뢰해 이뤄진 이번 조사의 결과 분석은 양 교수가 맡았다.

노조간부 
보육 서비스 첫손에…증세엔 미적 
단위노조, 공공보다 기업복지 선호

기업인 
복지 확대 총론 공감, 증세엔 반대 
노사정위 놓고 노조와 인식차이 커

정치인 
선거 겨냥 복지보다 지역개발 중시 
산별·중앙노조 강화 필요성 공감

■ 노조 간부들은 어떤 복지제도를 선호할까? 노조 간부들이 선호하는 복지제도는 보육서비스, 기초생활보장제도, 유급출산휴가·육아휴직, 실업수당, 공공직업훈련, 건강보험, 국민연금·퇴직연금, 기업복지, 공공근로사업 등의 차례로 나타났다. 노조 간부들은 전반적으로는 기업복지(기업들이 제공하는 학자금, 체력단련비, 육아 지원, 의료비 및 학원비 등 다양한 복리후생제도)보다 공공복지를 선호했으나, 개별기업 단위 노조 간부들은 전국 규모의 중앙노조 간부보다 상대적으로 기업복지를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개별기업 노조 간부들의 기업복지에 대한 선호도는 10점 만점에 8.21로 나와, 산별노조 간부(7.36)와 중앙노조 간부(7.42)에 비해 훨씬 높았다. 기업복지에 대한 선호는 조합원들의 요구, 낮은 공공복지, 각 기업노조 간부들의 요구가 주요 원인으로 지목됐다. 양 교수는 “결국 공공복지가 취약하다 보니 일반 노조 조합원들이 기업복지를 요구하고, 이를 실현시키지 않으면 조합원 투표에서 노조 지도자의 위치를 잃게 되는 기업노조 간부들이 기업복지 확대를 꾀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풀이했다. 기업 단위 노조 간부들은 공공복지 확대를 위한 증세에 대해서도 가장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다만 복지증세 방안에 관한 선호 경향에 대해서는 사회보험료 고용주 부담분 인상과 법인세 인상을 각기 1~2위 순으로 선호했고, 금융·주식 관련세, 재산세 인상, 사회복지세 신설, 개인소득세, 사회보험료 근로자 부담분 인상, 소득공제 축소 등의 차례로 나타났다.

■ 기업인들은 복지제도의 확대를 지지할까? 기업인들 또한 강도는 낮으나 노조 간부들과 마찬가지로 전체적으로는 사회보장제도를 폐지 또는 축소하는 것보다 확대하기를 지지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다만 이들이 확대하기를 바라는 복지제도는 자신들의 부담이 늘어나는 건강보험이나 국민연금 등 사회보험보다, 국민의 조세로 재원이 조달되는 보육서비스, 유급출산휴가·육아휴직, 기초생활보장제도 등이었다. 노조와 직접교섭에 의해 조율하고 생색도 낼 수 있는 기업복지에 대한 선호도 또한 높게 나타났다. 복지증세 방안에 대해서는 기업 규모가 작을수록 복지의 필요성에는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으나, 복지증세와 비용부담에 대해서는 사실상 반대 의견을 보일 정도로 선호도가 낮았다. 다만 눈길 가는 대목은 30인 미만 사업장 기업인들이 진보정당과 복지국가운동 단체들이 주창하는 사회복지세 신설을 상대적으로 가장 선호했다는 점이다. 기업인들은 또 공공복지 정책 이슈화와 정책 결정에 대한 물음에 대해, 노동조합의 긍정적 영향력은 아직 낮다고 바라보았으며, 노사정위원회가 그나마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조직이라고 인식했다. 노사정위원회가 유명무실하다고 여기는 노조 간부들의 인식과는 간극이 컸다.

■ 정치인들은 재선을 위해 어떤 정책에 힘을 쏟을까? 여야 의원들은 2016년 총선에 당선되기 위해선 여전히 지역개발사업이 가장 중요하다고 답했다. 이어 보육·사회서비스 정책, 노동·고용정책, 노인·연금정책, 중기·자영업자 대책, 보건의료정책, 소수자·취약계층 정책, 경제통상정책 등의 차례로 중시한다고 답했다. 이런 인식은 ‘지난 18대와 19대 총선에서 당선에 가장 크게 기여한 정책 공약이 무엇이었느냐’는 물음에 대한 응답 결과와도 대체로 일치했다. 지역구 관련 공약이 당선에 가장 기여했다는 게 중론이었다. 다만 비례대표 의원보다 지역구 의원이, 초선보다 재선 의원들이 경제사회정책보다 지역구 관련 공약을 더 중시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의원들은 또 ‘복지 문제의 이슈 제기와 정책화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제도 및 조직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선, 산별노조 및 중앙노조 강화를 1~2위 순으로 꼽았다. 비례대표제 확대도 높은 순위로 선택했다. 다만, 이 물음에는 새누리당과 민주당 간의 인식 차가 있었는데, 새누리당 소속 의원들은 노사정위원회를 1순위로 중요시한 반면 민주당 의원들은 산별 및 중앙노조 강화, 비례대표제 강화에 이어 4순위로 노사정위원회라고 답했다.

이번 조사를 총괄한 양재진 연세대 교수는 총평에서 “노동운동이 (지금처럼) 기업 수준으로 이루어질 때, 근로자들의 분배 욕구는 공공복지정책을 통해서 다수 국민이 함께 만족되기보다는 기업 울타리 안에서 좀더 높은 임금과 기업복지로 충족될 가능성이 높다”며 “이로 인해 공공복지가 발달할 기회가 줄어들게 되고, 지체된 복지국가의 발전은 다시 임금과 기업복지에 대한 선호를 촉발하는 악순환 구조를 그리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양 교수는 이와 함께 “정치인들의 당선이 사회경제적 이익보다 지역개발과 지역구 관리에 의해 결정되는 경향이 큰 (현행)소선거구제로는 복지국가 발전이 지체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번 조사가 주는 함의를 짚자면 아무래도 우리 사회의 공공복지 및 복지국가 발전을 위해서는 새 복지제도를 도입하거나 예산을 조금 더 늘리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산업별 노조운동 강화, 경제민주화를 통한 대·중소기업 상생의 경제구조, 비례대표제 확대·강화 등 복지국가의 제도적 기반을 쌓는 정치사회 개혁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재확인시켜준 점이 아닐까 싶다.

이창곤/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장 goni@hani.co.kr


공공복지 선호도 낮아…복지운동 외연 넓혀야

설문조사를 마치고

양재진 연세대 교수(행정학)
진보진영의 복지국가운동 단체들은 이번 중산층 세금폭탄론의 후폭풍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번 사태로 2012년 총선과 대선을 거치면서 우리나라를 강타한 복지바람이 수그러들까 우려되기 때문이다. 당장 새누리당과 보수언론들은 보편주의를 포기하고 복지공약의 우선순위를 조정할 것을 박근혜 정부에 주문하고 있다. 그리고 상당수 중립적인 전문가들도 증세 없는 복지공약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복지 확대에 신중할 것을 제언하고 있다. 어느 정도 합의 과제였던 복지국가 건설 운동에 금이 가면서 수세 국면에 접어든 느낌이다. 이번 사태에서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이번 세금폭탄론을 진보진영의 민주당이 주도하였다는 점이며 복지증세 논쟁 국면에서 친복지적이어야 할 노동조합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서구 복지국가 역사에서 볼 때 상당히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다. 왜 그럴까?

이번 복지정책 선호조사 결과를 보면, 어느 정도 의문의 실마리가 풀린다. 우리나라 노조 간부와 정치가들은 유럽의 발달한 복지국가와는 달리 공공복지에 대한 선호가 상대적으로 낮을 수밖에 없는 제도적 환경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기업별 노조, 대기업 중심 경제, 그리고 소선거구제라는 제도적 특징을 갖고 있다. 이는 유럽보다는 미국이나 일본과 유사한 제도적 특성으로, 앞으로 우리나라의 복지정치는 유럽식보다는 미국이나 일본식 패턴을 보일 것임을 예상케 한다. 이번 복지정책 선호조사는 이러한 예상이 현실화될 가능성이 매우 큼을 실증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는 기업별 노조이며 단체협상이 기업 수준에서 일어난다. 중앙 수준에서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있고 산별연맹들이 존재하지만, ‘실권’은 대기업과 공공부분에 조직화되어 있는 기업노조에 있는 것이다. 이들은 공공복지보다는 좀더 높은 임금과 기업복지를 원한다. 단체협상권이 중앙 혹은 산별 수준에 있어 노동계급의 단결을 위해 연대임금과 공공복지 확대를 추구해온 유럽의 역사와는 큰 차이다. 또 우리나라에서는 지급 능력이 있는 세계적인 대기업들과 공공부문에서 노조의 분배 욕구를 충족시켜 주고 있다. 노사 평화와 좀더 우수한 인재 확보를 위해서다. 덕분에 노동조합은 공공복지를 향해 목소리를 높이거나 실제 행동에 나설 유인이 크지 않다.

한편 정치가들이 전국적 이슈인 공공복지에 관심을 갖지만, 대다수 지역구 의원들의 초미의 관심사는 지역의 지지기반을 다지는 데 도움이 되는 지역구 개발과 민원 처리이다. 지역 문제에서 자유로운 비례대표 의원들은 공공복지 같은 전국적 이슈에 관심을 갖지만 이들은 소수이다. 비례대표가 압도적인 유럽과는 상황이 많이 다른 것이다.

한국의 대통령은 전국적인 지지를 동원해야 하는 만큼, 성장뿐만 아니라 복지에도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진보와 보수가 번갈아 가며 집권하게 되는 경우, 안정적으로 복지국가가 발전하기는 힘들다. 그동안 복지운동은 복지제도의 도입과 확장 그리고 보편주의냐 선별주의냐의 복지이념을 둘러싸고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번 조사 결과는 복지국가의 제도적 기반을 다지기 위해서는 복지운동의 외연을 넓혀야 함을 강하게 시사한다. 적어도 비례대표제 도입을 위한 정치 개혁과 산별화를 향한 노동 개혁에 부단히 나서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 이전에, 민주노총이 산별노조운동을 성사시키지도 못한 채 기업 내 복수 노조 도입에 앞장서거나, 이명박 정부에서 제기한 대선거구제로의 전환에 대해 진보진영이 화답하지 못한 오류에 대한 반성이 필요함을 보여주는 조사이기도 하다.

양재진 연세대 교수(행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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