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연구
주저자 : | 이원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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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저자 : | 김수정 |
기업과 인권의 만남
“전 세계인이 세계화의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사회-환경적 토대를 마련하자.”
1999년 1월 31일, 코피 아난 당시 유엔 사무총장이 스위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orld Economic Forum) 총회에서 한 연설의 한 부분이다. 코피 아난 사무총장은 이런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기업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게 요구된다고 지적하면서, 세계 각국 기업과 정부 및 비정부기구 지도자들이 함께 지구의 문제를 고민하자고 제안했다.
2000년 7월, 미국 뉴욕의 유엔 본부에서 세계 50개 주요 기업 경영진과 노동, 인권, 환경, 개발단체 지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유엔글로벌콤팩트가 출범했다. 국제사회의 문제를 풀기 위한 기업의 역할을 종합적으로 다루는 최초의 유엔 차원 조직이 닻을 올리게 된 것이다. 재무 성과에만 초점을 맞춰 경영할 게 아니라 환경, 경제, 사회를 모두 고려해 기업을 경영해야 한다는 지속가능경영이라는 개념이 국제 사회 주류 움직임에 얼굴을 내미는 순간이기도 했다.
전통적으로 사회 문제를 해결해야 할 책임이 있는 주체는 정부라고 여겨졌다. 그러다가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정부가 손을 대지 못하는 분야가 늘어나고, 정부의 비효율성이 지적되기 시작하면서 등장한 새로운 주체가 비정부기구(NGO)다. 전세계 각지의 수많은 풀뿌리 비정부기구들은 작은 규모로 빠르게 사회 구석구석에 뛰어들어 문제를 해결하면서 성장했다. 국제 사회에서 비정부기구의 발언권도 점점 커졌다.
이 두 주체가 한계에 부닥친 것은 기업의 힘이 세어 지면서부터다. 냉전이 끝나고 전 세계 각국경제가 기업 중심의 자본주의로 재편되고 발전하면서, 다국적 기업의 규모와 영향력이 정부나 비정부기구를 넘어서게 된다. 이에 따라 사회 문제의 상당 부분이 기업으로부터 비롯되거나, 기업의 협조 없이는 풀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유엔이 정부나 비정부기구를 중심으로 협력하고 활동하다가, 기업으로 눈을 돌리게 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런 시대의 흐름이었다.
유엔글로벌콤팩트의 목표는 크게 2가지이다. 하나는 기업 경영전략과 그 이행과정을 통해 글로벌콤팩트의 기본 원칙이 시장에 반영되도록 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문제가 발생할 경우에 다양한 산업과 이해관계자들이 함께 뜻을 모아 해결하도록 하는 것이다. 자발성에 기초를 두고 있는 셈이다.
유엔글로벌콤팩트 사무국은 참여기업들이 지켜야 할 10가지 기본원칙을 제시한다. 이 기업들이 10대 원칙을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수행하는 내용을 홈페이지(www.unglobalcompact.org)를 통해 교환하도록 하거나, 서로 노하우를 공유하고 파트너십을 구축하기 위한 네트워크를 제공하는 것도 유엔글로벌콤팩트가 하는 일이다.
2000년 이후 전 세계에서 불고 있는 지속가능경영 바람과 함께, 유엔글로벌콤팩트 참여 기업과 단체는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2007년 12월 현재 글로벌콤팩트에 가입한 기업과 단체는 전세계 5000여 곳에 이른다. 한국에서도 100개 이상의 기업과 단체가 가입했다.
10대 원칙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인권
원칙1 : 기업은 국제적으로 선언된 인권 보호를 지지하고 존중해야 한다.
원칙2: 기업은 인권 침해에 연루되지 않도록 적극 노력한다.
노동
원칙3: 기업은 결사의 자유와 단체 교섭권의 실질적인 인정을 지지하고,
원칙4: 모든 형태의 강제 노동을 배제하며,
원칙5: 아동 노동을 효과적으로 철폐하고
원칙6: 고용 및 업무에서 차별을 철폐한다
환경
원칙7: 기업은 환경 문제에 대한 예방적 접근을 지지하고
원칙8: 기업은 환경적 책임을 증진하는 조치를 수행한다.
원칙9: 기업은 환경친화적인 기술의 개발과 확산을 촉진한다.
반부패
원칙10: 기업은 부당 취득 및 뇌물을 포함하는 모든 형태의 부패에 반대한다.
이들 원칙의 내용과 순서는 매우 인상적이다. 지속가능경영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환경문제를 가장 먼저 떠올리기 마련이다. 지속가능성이라는 말이 원래 ‘환경문제로 세계가 지속가능 (sustainable) 하지 않다’는 표현으로 시작됐기 때문이기도 하고, 환경문제에 관심을 갖고 환경친화경영을 펼치겠다고 나서는 기업이 일찍부터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다음에 주로 떠올리는 게 ‘윤리경영’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반부패 투명경영 문제다. 과거부터 기업의 사회적 책임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뇌물을 받거나 기업 재산을 빼돌리는 등 비윤리적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이 우리 머리 속에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국제사회의 생각은 조금 달랐던 모양이다. 유엔글로벌콤팩트 10대 원칙의 맨 앞 줄에는 인권이 자리를 잡고 있다. 기업의 지속가능경영이나 사회적 책임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이슈는 인권이라는 점을 천명한 셈이다.
인권 문제는 그만큼 국제사회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이슈다. 아울러 기업과도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기업과 인권을 연결 지어 생각하는 사람이 드물다. 지속가능경영이나 사회책임경영을 논하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기업과 인권에 대한 언급은 별로 없는 편이다.
사실 기업과 인권은 그리 대중적인 이슈가 아니다. 우선 기업에게는 매우 껄끄러운 이슈다. 인권이라는 단어 앞에 기업은 수동적이기 마련이다. 앞서서 헤쳐 나가야 할 이슈라기보다는, 어떻게 든 만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이슈다. 소비자나 노동자 개인에게도 인권은 그리 가깝게 느껴지는 이슈가 아니다. 환경이나 제품안전 문제처럼 직접 피부에 와 닿지 않는다고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곰곰이 따져 보면, 기업과 인권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생활의 문제일 수 있다. 우리는 매일 인권 때문에 울고 웃는다. 우리가 매일 출근하는 직장, 그 일터에서 우리를 결정적으로 행복하게 또는 불행하게 만드는 사건 중 상당 수는 따지고 보면 인권과 관련이 있다.
가령 성차별 문제를 생각해 보자. 취직하려는 여성에게 어떤 기업문화가 성차별적인지 아닌지 여부는 그 기업의 재무적 성과 및 보상체계 같은 다른 성과보다 훨씬 중요할 수 있다.
직장에서의 만족은 단순히 금전적 보상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보다 훨씬 더 복잡한 방정식이다. 그런데 이 만족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변수 중 하나가, 그 직장이 얼마나 인권친화적 경영을 펼치고 있는 지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성차별은 대표적 사례 중 하나일 뿐이다. 다른 인권 이슈들 - 장애차별, 인종차별, 건강권, 작업장 감시 등 도 늘 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 곁에 있다. 그런 이슈 하나가 불거질 때마다, 그것에 관련된 개인의 삶은 행복과 불행 사이를 극단적으로 오갈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책에서, 인권경영이라는 껄끄럽고도 낯선 이슈를 다루고자 한다. 우선 1부에서는 우리가 일터에서 부닥치는 인권 문제를 사례를 통해 짚어 본다. 관련된 법령은 어떤 것이 있는지도 정리해 볼 것이다. 또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 기업의 인권경영 현황도 함께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2부에서는 인권경영과 관련한 세계적인 흐름을 다룬다. 기업의 윤리구매, 윤리적 소비자 운동, 법과 제도 관련 국제 표준 동향, 국가별 인권경영 촉진방안 등으로 나눠 살펴본다. 그리고 마지막 3부에서는 인권경영 기업에 대한 투자 움직임을 보여줄 것이다. 과연 금융시장의 자원이 인권친화적인 방향으로 움직일 것인지를 최근의 투자동향을 통해 살펴볼 것이다.
우리의 작업은 시종일관 매우 조심스럽게 이루어졌다. 기업과 인권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은 여전히 드물고 낯선 일이다. 정교한 이론적 근거도, 신뢰할 수 있는 데이터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때로는 거칠거나 밋밋한 내용을 채워 넣을 수 밖에 없었음에도 작업을 끝까지 진행시킬 수 있었던 것은, 불완전하더라도 누군가 한 번은 기업과 인권의 문제를 정리해 두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어깨에 짊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독자 여러분의 큰 이해와 많은 비판을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