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의 눈    시민경제 • 민생 이슈 현장 전문가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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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완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동향분석센터장


“오랫동안 소중한 경험과 지식, 지혜에 기반해 열심히 일하면서 한국 경제와 사회에 기여하고, 가족은 물론 수많은 다른 사람들에게 소득이든 일자리든 도움을 주는 보람있는 삶을 살아오셨습니다.” 내가 퇴직하는 기업체 임원에게 간혹 위로처럼 보내는 메시지다. 지난 2월 사상 최악에 이른 청년실업률(12.5%) 숫자가 표현하는 우리 시대 청년들의 들끓는 분노와 불만을 보며 한국의 기업(인)에게 ‘보람’을 말하기 민망하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1767개 상장기업의 현금흐름표상 설비투자와 청년실업률 추이를 보면 2010년 이래 두 지표가 끈질기게 하나는 하락, 다른 하나는 상승하고 있다. 두 지표의 엇갈린 ‘동행’은 더 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다. 청년실업을 설명하는 데 기존 노동시장의 경직성 같은 시장 요인, 정보기술 경제하의 숙련 편향이라는 기술적 요인이 주로 지목된다. 하지만 과문한 탓인지, ‘야성을 잃은’ 한국 기업(인)을 지적하는 분석가는 그다지 보고 듣지 못했다. 일자리는 자본의 파생수요에 불과하다. 즉 자본가의 투자 행위에 사회 전체가 구조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체제가 자본주의다. “오늘 기업의 이윤은 내일의 투자이고, 내일의 투자는 다음날의 고용이 된다.” 이것이 현대 자본주의 문명에 관한 완벽한 묘사다. 여기서, 투자는 기업가의 사회적 책무가 된다.

물론 상품을 꼭 많이 생산·판매해야만 이윤이 늘어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투자를 줄이고, 심지어 공장·기계를 놀리는 편이 이윤을 극대화하는 길이기도 하다. 기업은 또 수익성 악화나 생산설비 과잉 등 ‘환경 제약’을 토로한다. 하지만 근대 이래 역동적 자본주의는 이런 환경을 돌파해온 역사임을 우리는 안다. 이윤 증식이라는, 자본 그 자체의 냉혹한 논리가 자본주의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이라고 설파한 학설도 있지만, 영혼을 가진 자본가들의 동물적인 투자 의지와 정신이 지구 행성 곳곳에서 자본주의를 이끌어왔다고 주창한 지성들도 있다. ‘야성적 충동’이나 ‘창조적 파괴’라고 이름 붙인 것들이 그것이다. 자본주의를 활력 있게 키워온 혈액이 곧 기업(인)이라는 얘기다.

인간은 직선으로 환원될 수 없는, 비선형의 복잡한 존재다. 수요·공급곡선에서 소득 변동에 따른 구매력 변화나 여러 재화의 가격 변화가 없더라도, 사람(가계·소비자)의 심리가 경기 확장 국면에서는 수요곡선을 더 오른쪽으로, 수축 국면에서는 더 왼쪽으로 옮긴다. 생산자이자 투자 주체로서 기업도 환경에 갇힌 존재가 아니다. “자본가들은 쓴 만큼 벌고, 노동자들은 번 만큼 쓴다.” 자본은 아무리 물을 퍼내도 끝없이 솟아나는 과부의 항아리처럼 지출한 만큼 다시 벌어들인다. 쓴 만큼 벌어들인다는 이 경구를 따르는 ‘인내심 있는 자본’, 그것의 빈곤이 우리 시대 청년들을 우울하게 만들고 있다.

생산과 투자를 지휘하고, 결국 고용을 지휘하는 힘을 가진 자본 권력은 “무언가를 행하지 않는 것(투자 중단·철수)으로부터도 나온다.” 설비투자로부터의 철수는 작업장에서 노동력 철수(파업)처럼 어쩌면 ‘자본 파업’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 자본은 파업 승리를 위해 어떠한 집합적 결의나 행동도 할 필요가 없다. 청년실업자 등 ‘무거운 노동’과 달리 자본은 가볍다.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것만으로도 세계 곳곳에 투자하거나 철수할 수 있다. 어느 좌파경제학자는 “자본가에게 착취당하는 것에 견줄 수 없을 만큼 더 비참한 건 착취되지도 못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자본 파업이 사회 전체에 퍼져가면서 청년은 수탈당하지도 못한 채, 자본의 불안을 자신의 어깨에 전가받고 있는 신세다.

조계완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동향분석센터장 kyewan@hani.co.kr



등록: 2016-03-31 18:49

한겨레에서 보기: http://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73770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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