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공단 입주업체 노동자들이 지난 4월11일 서울 종로구 청와대 앞 분수광장에서 5·24조치 해제 및 개성공단 재가동을 촉구하는 공동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연합뉴스
최인훈의 작품 속 소설가 구보씨는 버스 정류장에서 신문을 사서 펴보고 깜짝 놀랐다. ‘중공’(中共)을 국제연합(UN)에 가입시키자는 알바니아의 제안이 유엔 총회에서 가결된 것이다. 1971년 일이니 거의 50년 전이다. 중공은 한국전쟁에서 유엔의 적이었다. 그런 중공을 유엔은 압도적 찬성으로 가입시켰다. 어제 배운 것이 오늘 거짓말이 되는 세상이 원통한 구보씨는 ‘남북조(南北朝) 시대의 피난민 지식인’으로 자처하는 소설가이다. 구보씨는 ‘중공의 유엔 가입 결정에 닉슨 대통령이 경악’했다는 기사에 실소를 금치 못했다. 이미 미국이 북경에 특사를 보냈으므로 닉슨이 새삼 놀랄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곧이어 양국간 핑퐁외교가 전개됐다. 닉슨은 마오쩌뚱과 정상회담을 가졌으며 수년 후 양국은 국교를 정상화했다.
구보씨는 세상이 자신도 모르게 뒤집혀도 투덜대는 것 외에 달리 방도가 없는 이 땅 지식인의 전형이다. 구보씨의 처지를 50년이나 더 겪으면서 우리는 그런 운명에 익숙해졌다. 남북정상회담 직전까지도 사람들은 회의적이었고, 다가올 변화에 대해 열심히 얘기해도 미지근한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이 땅의 운명을 우리가 결정하려는 시도는 부족했고 성공의 경험은 거의 없었다. 그러므로 지금 상황을 비현실적이라 느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세상을 뒤집는 정상간의 만남이란 늘 바다 건너 큰 나라끼리의 일이어야 했다.
한반도의 운명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정작 우리 공동체가 일군 성취의 대부분이 자기 몫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제 북한의 운명을 책임지겠노라 나선다. 기적처럼 남북정상회담이 성공하자 당장 북한에 대한 경제협력 이야기가 봇물을 이룬다. 주요 기업과 경제단체들은 앞다퉈 경협의사를 밝힌다. 이들이 남북한 관계 개선에 가장 소극적인 그룹이었음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이들의 발빠른 행보를 지켜보면서 씁쓸한 기분은 둘째치고 걱정부터 앞선다. 경협이라는 그럴듯한 이름하에 남한의 숱한 사회적 모순을 북한에 수출하는 꼴이 될까 해서다.
남북한 경제협력은 북한이 추진하고자 하는 발전계획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지원할 것인지가 핵심이다. 우리의 관점에서 원하는 사업을 우선하는 것은 정책의 주도성(Ownership)을 강조하는 국제협력의 원칙에도 어긋나며 효과도 낮다. 대북 지원은 북한의 정책 우선순위에 따라 성과를 낼 수 있도록 경협이 조절(Alignment)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당장 3000조가 넘는다는 북한의 자원 개발 잠재력에 대한 논의가 여기저기 들린다. 북한에 매장된 자원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는 오롯이 북한 정부의 정책적 판단이다.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무연탄 수출량을 스스로 통제해 온 사실을 안다. 중국시장에 대한 지나친 의존을 경계하고 있다는 말이다. 북한의 자원을 우리 기업이 개발하는 것은 북한의 자체적 개발계획 범주하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특수상황을 이용한 경쟁적 개발로 인해 자칫 북한에 ‘네덜란드병’을 일으키는 일이 있어서야 되겠는가. 이뿐 아니다. 재계가 나서서 사회간접자본(SOC) 개발을 추진하겠다고 한다. 당연히 추진되어야 할 사업임에는 틀림없으나, 기업들이 스스로 비용을 대겠다고 나설 리가 만무하다. 남북한 정부의 사업계획을 전제로 기업들은 또 다른 대규모 수주의 기회를 꿈꿀 뿐이다. 이를 두고 남북경협의 선두에서 책임진다고 말할 일은 못된다. 오히려 사회간접자본 개발사업은 북한 산업의 역량을 강화함으로써 경제발전의 기초를 다지는 기회로 삼아야 할 일이다.
섣부른 정책과 관료주의가 가져올 부작용
정부는 ‘한반도 신경제지도’라는 남북한 경제협력의 청사진을 갖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동해권, 서해안 및 비무장지대(DMZ) 접경지역의 3대 경제벨트를 남북한이 공동으로 개발하자는 내용의 제안이다. 주로 북한 지역의 개발을 내용으로 하지만 공동개발의 접근방식이다. 과거에 비해 덜 일방통행적이라는 점에서, 태도가 침착하고 정치적으로도 올바르다. 그러나 아쉽게도 ‘한반도 신경제지도’의 구체적인 전략과 정책수단은 분명하지 않다. 빠른 속도로 각 부처와 연구소에서 작업이 진행되고 있을 것이다. 정리되지 않은 정책의 양산과 관료주의 그리고 기업의 탐욕이 가져올 수 있는 부작용을 조심해야할 시점이다. 남북경협은 개별사업의 집합이 아니라 한반도 경제 전체를 발전시키기 위한 공동전략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첫째, 그동안 북한에 대해 주문해 왔던 ‘개혁과 개방’의 의미를 다시 짚어 보아야 한다. ‘개혁과 개방’을 선언한다고 해서 북한 경제가 시장경제체제로 저절로 전환되지는 않는다. 장마당이 늘어나고 정부의 시장통제를 줄이는 것이 시장경제도 아니다. 시장경제는 오랜 시간에 걸쳐 제도적 기반과 시장주의적 거래관행이 일반화되는 ‘진화과정’을 필요로 한다. 공동체내의 신뢰가 시장의 핵심 기반이라는 점도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다. 과거 소련의 경우, 붕괴 이후 자본주의로 전환했지만 시장질서가 마련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고 그 공백을 마피아가 메웠음을 기억해야 한다. 중국은 경제특구를 중심으로 상당기간 학습의 과정을 거쳤고, 베트남은 이미 시장화된 사회를 갖고 있었다. 북한이 시장질서를 구축하고 또 세계시장에 편입하기 위해서는 남들이 가지 않은 새로운 길을 가야할 수도 있다. ‘개혁과 개방’은 이제 구호로서의 역할을 다했고 북한이 채택할 ‘전환모형’의 다른 이름이 되어야 할 수도 있다. 경제에 국한하지 않은 다방면의 남북협력은 이 모형의 성공에 결정적이다.
둘째, 당장 추진될 공공 및 민간부문 남북경협사업의 우선순위도 중요하다. 당연히 북한이 최우선시하는 정책목표를 파악해야 한다. 현재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경공업 분야이다. 북한은 적어도 2013년부터 경공업 발전을 중시하고 생활 향상을 도모해 왔다. 해마다 이러한 정책목표가 신년사에서 빠진 적이 없으며 형식상으로도 경제는 핵개발 목표보다 앞서 있었다. 과학기술의 강조도 현장의 생산성 향상을 염두에 둔 것이며, 금속 및 화학공업의 생산력 확대도 일상적 민간수요에 대응하고자 하는 정책의도로 해석된다. 지금의 대북제재는 북한의 산업 생산력 확보에 시간을 제공하는 효과도 있다. 경제제재가 외부에 의한 강제적 수입대체 정책이라는 점에서 시간은 중요한 요소이다. 경제발전 단계에서 국내생산의 점유율 확대에 가장 용이한 산업정책이기도 하다. 따라서 남북경협의 일차적 목표는 단기간내에 경공업 위주의 북한 산업의 생산역랑 강화에 초점을 맞추고 궁극적으로 민생의 안정에 기여해야 한다.
‘적을 파트너로 바꾸는 능력’을 확인하는 과정
셋째, 남북한 산업의 상생을 위한 ‘한반도내 공급가치사슬’을 형성해야 한다. 개성공단의 운영 재개는 경협의 소극적 형태이며 그 숫자를 늘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개성공단은 남한의 중소기업이 북한의 낮은 임금을 활용하는 방식이다. 북한에 임금이 지급되지만 북한 산업과의 연계효과는 전무하다. 수요는 오로지 남한의 시장에 한정되어 있다. 상징적 존재로서 개성공단의 역할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새로이 공단을 설치한다면 남북한의 기업들이 생산분업관계를 유기적으로 창출해 나가는 현장이어야 한다. 북한의 기업이 함께 참여하고 생산력 증대로 북한내 민간수요를 충족시켜야 한다. 물론 남북한 기업간의 가치사슬 형성은 한국 중소기업에게도 구조 고도화와 국제경쟁력 향상의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다행히도, 수십년 배우고 경험한 것들이 올 봄에 한꺼번에 거짓말이 되었다.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 모두가 세계사적 사건을 강렬하게 체험하는 중이다. 적을 파트너로 바꾸는 능력을 우리도 가졌음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그 체험이 한반도 공동번영을 가능케 하는 힘으로 모아지기를 희망한다. 소설가 구보씨와 함께.
한홍열 한양대 교수·코리아컨센서스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