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의 눈    시민경제 • 민생 이슈 현장 전문가 칼럼

[HERI의 눈]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 사단법인 ‘씨즈’ 공동 주관
제1차 시민경제포럼 ‘지역 시민사회와 재난 복구’
고베와 안산, 경주…‘재난 이후의 삶’을 말하다


고베 지진 20주년 프로젝트 ‘BE KOBE’
20년간 고베 지켜온 시민 75명 인터뷰집
‘일상 살아왔다는 사실 자체가
사회에 공헌한 것’이라는 관점 돋보여


고베시 나다구 출신 우쓰미 겐이치
우리 마을 좋은 점 알리는 ‘장난’ 시작
마라톤 열고 재건 이후 마을상상도 그려
“재건 과정 지친 주민들에 꼭 필요한 활동”


재난 겪은 안산·경주도 ‘닮은꼴’ 활동
단원소생길·합창단 외에 ‘온유의 뜰’ 조성
경주에선 트라우마 심리상담 치료 등
‘커뮤니티 재난 회복력’의 좋은 선례될 것


‘즐거운 일을 한다’ ‘무리하지 않는다’…
‘탈정치’ 방식 한국에 낯설기는 하지만
사회적인 세계의 지속가능성 위해선
‘우쓰마 겐이치 방식’ 진지한 고민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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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것을 하고, 들고 나는 것이 자연스러운 모임이 많아지면 살고 있는 곳을 좋아하게 돼요. 그게 내가 만드는 ‘마을에서 놀기'입니다. 사람들이 서로를 돕고 치유하게 하는 거죠.”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과 사단법인 씨즈가 공동 주관하고 서울시 사회적경제지원센터가 후원한 제1차 시민경제포럼 ‘지역 시민사회와 재난 복구: 나와 이웃의 위기에 지역 시민사회와 사회적경제는 어떻게 응답하는가?'에 연사로 참여한 우쓰미 겐이치(慈憲一)의 말이다.

우쓰미 겐이치는 발생 당시 일본 전후 최악의 참사로 불리며 일본 전역을 충격으로 뒤덮은 1995년 고베(神戶)대지진 이후 20년 이상 고베시 나다구(灘?)에서 마을을 통한 재난 복구를 해온 활동가다. 또 다른 연사로 세월호 이후 안산을 지켜온 힐링센터0416쉼과힘 임남희 사무국장, 경주와 포항 지진 이후 지역에서 재난 대비 교육과 사후 대처 활동을 해온 경주아이쿱생협 정미정 이사장을 모셨다. 기획하게 된 배경과 포럼 이후의 생각을 <생협평론>을 빌어 공유한다.

1. 고통의 표출은 세련되지 않다

지난 몇 년간 세월호 참사, 포항과 경주 지진 등으로 재난이 남의 일이 아니라는 인식이 우리 사회에도 전보다 커졌지만, 아직 자신의 일로 생각하는 시민은 적은 편이다. 나 역시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에 입사하기 전, NGO 활동가로 활동하며 재난 현장에 방문한 적이 있다. 그러나 재난을 가깝게 경험한 것은 대부분 해외에서의 일이었다.

내가 방문한 현장은 대부분이 이미 장기 재건 단계에 들어간 지역이라, 흔히 상상하는 재난 직후의 참상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2016년 4월 발생한 일본 쿠마모토 지진 현장에 들어갈 기회가 있었다. 당시 나는 일본 재난 관련 NPO에서 일하고 있었다. 긴급 구조에서 대피소 운영 등 재건과 복구의 첫 단계로 이제 막 들어서는 시점에 재난 현장을 둘러볼 기회가 생긴 것이다. 현장 운영의 초기 단계였기 때문에 피해가 가장 큰 마시키 마을의 임시 피난소인 체육관은 어수선했고, (정부와 민간 모두가) 현장을 잘 관리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불안감에 휩싸여 있었다.

체육관 안은 마치 닭장처럼 보였다. 이미 수용 인원을 넘어서 사람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화장실 문 바로 앞까지 사람이 머물 장소로 사용하고 있는 상태였다. 얇은 깔 것 위에 얽히고설킨 채 앉아 있는 사람들…. 여학생 옆자리에 가족이 아닌 듯 보이는 어른 남성이 자리하는 등, 세심한 배려를 할 여력이 없는 상황이란 게 한눈에 보였다. 사람들의 눈빛에도 두려움과 공포가 어렸고, (나를 포함한) 언론이나 외부 단체 사람들 등 이방인들이 돌아다니는 데 대한 불쾌함이 섞여 있었다.

마구 화를 내는 사람도 있었다. 여성으로만 이루어졌거나 반려동물 동반 가구를 위해 체육관 외부에 텐트를 설치했는데, 수량에 한계가 있었다. 그러다 보니 ‘왜 저 사람은 텐트에 들어가고 나는 못 들어가냐?'에서부터 ‘따뜻한 물을 가져다 달라', ‘마실 차도 없느냐'며 사소한 일로 화를 내고 소리치는 사람이 나타나기 일쑤였다. 일본어를 전혀 못 하는 외국인 직원도 있었는데, 그에게 ‘일본어도 못 하는 주제에 여기에 뭐하러 왔느냐!'며 화를 내기도 했다. 빠른 대응과 체계적 관리가 이뤄지는 피난소,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며 조용히 기다리는 피해자들, 그곳에선 둘 중 어떤 것도 없었다. ‘재난 강국'이라는 일본에서도, 재난 직후의 마을에는 세련되고 성숙한 시민의식보다는 분노와 두려움이 떠다녔다.

“일본도 재난관리 잘 못한다”는 식의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니다. 재난 피해자들이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비이성적이고 몰상식적인 행동을 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다. 집이 흔들리고, 부서지고, 이웃이나 가족이 죽는 것을 지켜본 사람들이 평정심을 잃고, 작은 것에도 화가 치미는 것은 인간이라면 당연한 반응이다. 본격적인 이야기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것이 재난에 대한 모든 이야기의 출발 지점이어야 함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피해 당사자는 자신의 고통을 몰상식하고 미성숙한 방식으로도 쏟아낼 수 있다. 그 아픔을 이해하고, 정갈하고 이성적인 언어와 구체적 해결 방법으로 소화해내는 것은 온전히 사회의 몫이다.

2. ‘BE KOBE'를 통해 만난 사람

쿠마모토에 짧게 들어갔다 나온 후 오히려 오래된 재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토록 불안해하던 사람들은 어떻게 마을과 자신의 삶을 되살려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에, 동북대지진은 여전히 진행 중인, 너무 가까운 참사였다. 그래서 고베에 관한 자료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고베 대지진은 1997년 일본 고베시를 중심으로 일어난 지진으로, 동북대지진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전후 일본 최악의 지진으로 알려졌다.(고베 지진은 ‘효고현 남부 지진' 또는 ‘한신·아와지 대지진'으로도 알려졌으며, 1995년 1월17일 화요일 오전 5시46분경 일어났다. 6400여 명이 사망했고 부상자만 4만3000여 명에 이른다.)


‘BE KOBE'는 고베 대지진 20주년을 맞아 고베시에서 시작한 프로젝트의 이름이다. 고베시는 커다란 재난을 극복하기 위해 한마음 한뜻으로 힘을 모았던 고베 시민의 공헌을 기억하려 고베항에 ‘BE KOBE'라고 쓴 커다란 기념물을 만들고 재난을 기억하는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고베시는 ‘BE KOBE'가 “다른 사람을 위해 힘을 다한다는 의지를 다지고, 그 마음으로 20년간 고베를 지켜온 고베 시민임을 자랑스러워하라”는 뜻이라고 밝혔다. 슬로건이 밝히고 있듯이, 그 중심에는 시민이 있다.


책 발간 또한 프로젝트의 일부였다. 는 20년간 고베를 지켜온 시민 75명(영어판 수록 인터뷰 수는 일본어판보다 적다)의 이야기를 담은 인터뷰집이다. 책에는 사회적 기업가, 시민단체 활동가도 소개되어 있지만, 평범한 엄마, 빵집 주인, 1995년 출생한 시민 등 오롯이 ‘지역을 지켜온 시민'에도 집중하고 있다. 대단한 사회적 미션을 가지고 일에 뛰어들지 않았더라도, 재난으로 황폐해진 고베시를 떠나지 않고 자신의 삶을 꾸려온 사람들을 재건의 핵심으로 본 것이다. 일상을 살아냈다는 사실을 사회에 공헌한 것으로 보는 관점이 신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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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고베시 나다구 마을 활동가 우쓰미 겐이치 씨는 지난 1월 제1차 시민경제포럼에서 ‘고베 대지진 후 20년을 통해 본 재난 복구와 마을의 역할'을 주제로 강연했다. 서울시사회적경제지원센터

고베 마을 활동가 우쓰미 겐이치는 그중에서도 ‘꼭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이었다. 여러모로 신선했다. 대학 시절부터 시민단체에서 활동했지만 ‘대의'와 ‘가치'란 말에 조금씩 지쳐 ‘내 삶에도 지속가능하고 사회에도 조금은 좋은 일'을 꿈꾸기 시작한 내게, 그의 이야기 속엔 눈이 번쩍 뜨이는 대목이 많았다.


우쓰미 겐이치는 고베시 나다구 출신이지만 지진 발생 당시에는 도쿄에 살고 있었다. 가족들은 모두 나다구에 살고 있었는데, 나다구가 피해가 큰 지역이라는 소식만 들리고 가족과 연락이 잘 닿지 않자 부랴부랴 고향으로 돌아왔다. 집은 많이 무너져 있었으나, 다행히 가족들 모두 무사했다. 알고 보니 가족이 모두 무사했던 건 이웃들 덕분이었다. 자위대나 소방 구조 인력이 들어왔지만 피해 범위가 너무 넓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을 때 지역 주민들이 ‘저쪽에 누가 살고, 그 집엔 몇 명이 있고, 그쪽으로 가면 사람이 없다'는 등 이웃들의 소재를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을 준 것이다. 피해 주민을 직접 구조하거나 주변 위험물을 치우는 데 참여한 것은 물론이다. 지역 주민들은 긴급 구조 상황이 며칠간 지속되던 중에도 한 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힘을 모았다.


그런데 재건과 복구를 논의할 시기가 되자 보상 범위와 방법, 순서를 두고 사람들 간에 싸움이 벌어졌다. 우쓰미 겐이치는 그토록 사이좋던 마을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계속되는 것이 안타까워 지자체 주도로 만들어진 대화나 조정 기구에 참여했다. 협의체, 대화 모임, 마을 만들기가 계속됐지만, 서로를 향해 ‘한쪽 편만 든다', ‘돈 받은 것 아니냐' 따위의 심한 말이 오가는 등 갈등과 반목이 커졌다. 우쓰미 겐이치는 “당시 정말 열심이었던 선배 활동가가 갑자기 몸이 나빠져 사망했는데, 마을 사람들이 아주 건강했던 사람인데 분명히 활동하면서 받은 스트레스 때문에 죽었다고 말할 정도였다”고 당시 상황을 회상했다.


우쓰미 겐이치는 그때부터 ‘커뮤니티가 만든다고 만들어지는 게 아니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우리 마을에 얼마나 좋은 점이 많은지 알리자'는 취지의 가벼운 장난들이었다. 이를테면 마을 사람 누구나 알고 있는 낮은 굴다리에 ‘림보 문'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림보 대회를 열기도 하고, 마을의 갖가지 추억의 장소를 돌아보는 ‘마을 투어'를 계획하기도 했다. 마을 주민들 사이의 관계를 회복하고, 마을을 좋아하는 마음을 되살리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다. 시내버스에 갑자기 올라타 게릴라 음악 공연을 진행하는 등 단순히 마을 사람들을 웃게 하기 위한 일도 벌였다. 그는 “이런 시기에 장난이냐고 혼날 법도 하지만 사실은 재건 과정에 지친 주민들에게 꼭 필요한 활동”이였다고 말했다.


본격적으로 마을 활동을 시작하는 데는 무가지 발행이 계기가 되었다. 고베시 나다구의 이름을 따서 ‘나다 마을주의'라는 뜻의 이라는 잡지를 발행한 것이다. ‘마을의 좋은 점을 알리자'라는 활동 취지를 살려 마을 곳곳에 아직 남아 있는 의미 깊은 장소의 사진과 그에 얽힌 추억을 담아 잡지를 발행하고,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줬다. 다소 장난처럼 보이지만, 우쓰미 겐이치는 그 이후에도 꾸준히 마을에서 활동하며 타 지자체에서도 인정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중 몇 가지를 소개한다.


3. ‘마을 만들기'에서 ‘마을에서 놀기'로


(1) 나다구 마을 마라톤


일본은 마라톤 애호가들이 많기로 유명한 나라다. 고베시에서도 ‘고베 마라톤'이 열리는데, 이 마라톤 코스는 나다구를 통과하지 않는다. 이를 안타까워한 우쓰미 겐이치는 고베 마라톤을 패러디해 나다구 마라톤을 만들었다. 나다구 마라톤의 특징으로는, 첫째, 교통 신호를 준수하고 보행자가 걷는 길로 뛴다.(공식 신고된 마라톤이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 타임 키핑은 스스로 한다. 셋째, 곳곳에 물과 간단한 디저트는 물론 술까지 구비된 ‘에이드 바'가 있다.(에이드 바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힘들면 그만하지 그래?') 넷째, 코스는 나다구 곳곳을 둘러볼 수 있도록 공원, 하천 등을 지나도록 설계되었다. 나다구 마라톤은 지금은 외국인도 참여하는 1000명 이상의 규모로 확장되어 나다구의 명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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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다구 마을 마라톤' 산중턱 카페. 우츠미 켄이치 제공


(2) 나다구 주민이 꿈꾸는 재건 이후 마을 상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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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사람들이 자유롭게 그린 재건 이후 마을 상상도. 우츠미 켄이치 제공


마을 주민들과 모여 실현 가능성에 구애받지 않고 재건 이후의 마을을 함께 상상했다. 마을 축제를 열거나 케이블카를 설치해 마을 아래까지 편하게 내려왔으면 좋겠다는 재미있는 제안이 쏟아졌다. 주민들이 직접 그린 이 마을 상상도가 지자체에 의해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진 건 아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이 밝은 마음으로 미래를 상상하는 데 큰 도움을 줬을 뿐더러, 마을버스 운행 등 비록 다른 형식이지만 실제 현실화한 사례도 있다.


(3) 나다구 마을버스


마을 주민 상상도 중 현실이 된 사례다. 나다구는 산과 언덕이 많은 동네라 고령의 시민들이 보행에 어려움을 겪었다. 케이블카가 마을 아래까지 다녔으면 하는 바람도 이 때문이었다. 주민들과 우쓰미 겐이치는 이러한 요구를 무리한 것으로 단정 짓지 않고 기부금을 모았다. 언덕과 평지 사이를 오가는 동네 마을버스는 지금도 운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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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과 동네 사이를 오가는 마을 버스. 우츠미 켄이치 제공

(4) 무가지


위에서 잠깐 언급한 무가지 는 온라인 블로그로 형태는 바뀌었지만 아직도 발행 중이다. 블로그를 통해 나다구 곳곳의 맛집과 이벤트 소식을 알리고 있다.


(5) 나다구 에키벤(기차역에서 판매하는 도시락)


나다구에서 나는 토산품으로만 이루어진 도시락을 만들어 역에서 팔았다. 나다구에는 이렇게 맛있는 음식들이 많다는 점을 널리 알리기 위해 시작한 활동인데, 준비한 물량이 금세 동나며 대히트를 기록했다고 한다.


인상깊은 것은 고베시나 나다구에서 우쓰미 겐이치의 활동을 괴짜의 장난이 아니라 지역 재건에 공헌한 활동으로 인정했다는 점이다. ‘마을 만들기라는 말이 싫어 마을에서 놀기'라고 하는 그를 위해 나다구는 오히려 ‘나다구의 좋은 점 100가지 찾기' 등 유사한 활동을 만들어 위원으로 위촉했다. ‘지자체가 이걸 받아들였다고?’하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철학을 알아갈수록 놀라움은 더 컸다.


우쓰미 겐이치의 활동 철학은 아래와 같다.


(1) 드나듦이 자유로울 것


참여하고 싶으면 하고, 싫으면 그만둘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원칙이다. 애초에 단체를 만들어 활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작은 이벤트를 끊임없이 열어 ‘하겠다'는 의지를 알린다. 같이 하고 싶으면 그냥 하면 된다. 이를테면 나다구의 명물인 마야산의 아름다움을 알리겠다는 취지로 ‘마야산 꼭대기에서 플리마켓'을 열고 플리마켓과 요가, 한국어 교실 등 다양한 행사를 진행하는데, 시간만 알려주면 참여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와서 판을 깔 수 있다. 마을 마라톤을 진행할 때도 곳곳에 간식과 음료를 제공하는 에이드 바가 있었는데, 도움을 주고 싶은 사람이 그냥 와서 마련하도록 했다.


(2) 만드는 사람도, 참여하는 사람도 무리하지 말 것


누구라도 무리하지 않고, 힘들면 하지 말아야 한다는 원칙이다. ‘즐거운 일을 하면 된다'는 것이다. 무리하면 오래 할 수 없거니와 오히려 재건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는 재건 과정에서 그가 얻은 교훈이다. 재해 후 일본 전역에서 고베 지역을 향해 ‘힘내라!'는 응원의 메시지가 쏟아졌는데, 오히려 그게 주민들에게 ‘빨리 재건해 나아지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다가왔다고 한다. 그래서 나온 철학이 ‘힘들면 그만해도 된다, 쉬어 가도 된다'다.


(3)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내가 먼저 만들 것


가장 흥미로웠다. 우쓰미 겐이치는 이 모든 과정을 ‘시민이 자발적으로 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마라톤의 시작, 시내버스 운행 등 모든 것이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에서 비롯됐을 뿐, 정부 지원을 받지 않았다.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으면 운영 과정이 복잡해진다. 꼭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 마을이고 우리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 정부 지원을 꼭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4. 고베와 안산, 경주를 잇다


이번 포럼은 ‘대지진을 겪은 고베와 세월호 참사를 겪은 안산, 지진 재난을 겪은 경주를 이어보는 것은 어떨까?'라는 물음에서 시작되었다. 세월호 참사는 너무나 참담한 인재(人災)였다. 경주 지진은 고베 대지진만큼의 피해를 준 것은 아니었으나 우리 사회엔 큰 재난이었다. 양상과 규모는 다르지만 세 곳 모두 지역사회를 뿌리째 흔들어놓은 큰 재난이었다. 서로 다른 상황을 억지로 한데 엮어내는 건 아닌지 두려움이 앞섰으나, ‘재난 이후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관점에서 바라보기로 했다.


그런데 막상 이야기를 들어보니, 재난 이후의 안산과 경주에서도 비슷한 움직임이 있었다. 재난 이후 고베와 안산, 경주의 ‘삶을 위한 활동'은 서로 닮아 있었다. 포럼 당일 안산 힐링센터0416쉼과힘 임남희 사무국장, 경주아이쿱생협 정미정 이사장은 서로의 활동에 깊은 공감을 표했다. 세월호의 아픔을 극복하고, 안전한 사회에서 생명들이 피어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단원소생길'을 조성했다는 임남희 사무국장은 이렇게 말했다.


“안산은 정말 아름다운 곳이에요. 고잔동은 정말 아름다운 동네여서 한 번 이사 오면 다들 떠나기 싫어하는 곳입니다. 그걸 살려보려 했죠.”


단원소생길과 같은 취지로 유가족 합창단을 조직하고, 뜨개 공방을 열고, 세월호 희생 학생 양온유 양의 이름을 딴 ‘온유의 뜰'도 조성했다. 다양한 방식으로 아픔을 치유하는 과정은 유가족과 안산 주민들 사이에 만남의 장(場)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정부 지원 거의 없이 양온유 양이 다니던 교회 장소를 빌려 시작한 일이다. 점차 그 활동의 중요성을 인정받아 올해 경기도로부터 2억 원의 지원을 약속받았다.


경주아이쿱생협은 지진 이후, 재난 상황에 기여하고자 하는 심리상담사들의 모임 ‘이지스', 국제개발 NGO ‘더프라미스'와 함께 재난 후 트라우마 치료 뿐 아니라 지진 발생 시 대처 방안도 학습했다. 조합원 대부분이 안전에 관심이 많은 어머니들이어서 호응이 컸다. 일본 도쿄도에서 발간한 <도쿄방재>를 번역해 지역 주민들과 나누기도 했다. 포항 지진이 발생했을 땐 교육을 받은 조합원들이 포항으로 달려가 자원봉사 활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아직 우리 사회의 재난 담론은 그 지층이 깊지 않은 까닭에, 법·제도를 정비하기에도 벅찬 수준이다. 법·제도가 위로부터 만들어진다면, 그렇게 정비된 제도가 현장에 뿌리내리도록 이끌고 제도가 다 할 수 없는 마음의 영역을 살피는 것은 아래로부터의, 마을과 사람의 일로 남는다. 유엔도 재난의 핵심 대응 주체로서 커뮤니티에 집중하고 있으며, 커뮤니티 회복력(resilience)을 강조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 ‘커뮤니티 재난 회복력'이라는 단어가 익숙하지는 않다. 하지만 실제 재난을 겪은 지역에서는 마을이 치유의 뿌리를 단단히 다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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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아이쿱생협이 재난대응 역량강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경주아이쿱생협

5. 재난을 목격한 사람으로 살아가기


포럼을 기획하면서 스스로 던진 질문은 ‘재난을 목격하고, 참여하기로 결정한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것이었다. 일본의 고베, 한국의 안산과 경주, 세 곳의 사례를 통해 재난을 겪은 지역사회에 성공적으로 개입하기 위한 몇 가지 원칙을 꼽아보았다.

(1) 마을의 신뢰를 얻는 방법은 ‘그 자리에 있는 것'뿐이다


우쓰미 켄이치가 어떤 활동을 했는지 살펴보고, 직접 이야기를 나누면서 사전에 몇 가지 답을 얻기도 했다. 우쓰미 겐이치의 마을 활동은 일본 내에서도 어느 정도 알려져 있다. 그는 TV에 출연하기도 하고 여기저기 강연을 다니기도 한다. 아래는 한 강연회에서 있었던 젊은 활동가와의 질의응답 내용이다.


?마을 활동이 어려워 고민이 많다. 뭘 하려고 해도 주민들이 ‘이상한 사람'으로 대하는 시선이 있는데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마을 사람들과 잘 지낼 수 있는 비결이 있다면 무엇인가?


“비결은 ‘버티기'다. 나도 그랬다. 마을 사람들이 초기에는 ‘또 누가 와서 이상한 짓 하는 거 아냐?' 하는 의심의 눈길로 볼 수 있지만, 그 자리를 꾸준히 지키면서 작은 일이라도 해나가면 사람들이 다시 보게 된다. 그게 쌓이면 이상한 놈들이 ‘썩 괜찮은 놈들'로 바뀌는 시기가 온다. 그 시기가 되면, 내용도 보지 않고 ‘이상한 거 아냐?' 하던 사람들이 ‘쟤들이 하면 괜찮아', ‘좋은 친구들이니까 쟤들이 하는 일은 도와줘야지' 하게 된다. 사람을 보고 모인다. 그 자리를 끈질기게 지키는 것밖에 비법이 없다.”


무대가 어디든 마을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비슷한 고민을 가지고 있다. 좋은 마음으로, 마을에 도움이 되기 위해 활동하려는데 마을 사람들이 도와주지 않는다, 자신들을 위한 일인데도 공동체는 생각하지 않고 개인의 이득만 따진다며 불만을 토로한다. 그러나 재난 피해 당사자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당연한 일일 수 있다. 누구를 믿고 함부로 손을 잡겠는가?


우쓰미 겐이치가 지역 출신이면서도 개인으로 활동한 탓에 ‘버티기' 작전으로 마을의 신뢰를 얻었다면, 안산과 경주는 이전부터 마을에서 활동해왔던 신뢰받는 조직과 성공적으로 결합한 사례다. 안산의 힐링센터0416쉼과힘은 세월호 참사 희생 학생의 부모가 소속되어 있었으며, 공동체의 중심 역할을 하는 교회와 손을 잡았다. 경주아이쿱생협은 조합원들과의 관계망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기존에 쌓인 신뢰 관계를 십분 활용했다.


(2) 피해 당사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것


우쓰미 겐이치가 보여준 재난 이후 시내버스에서의 게릴라 음악 공연이나 림보 대회 같은 ‘장난', 세월호 유가족 합창단 조직 등은 이치에 맞지 않아 보일 수 있다. 가족과 이웃이 떠난 마을에서 즐거운 활동을 하고, 노래와 춤을 춘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 모두 ‘재난 피해자는 어때야 한다'는 외부의 시선에서 벗어나 실제 피해가족과 이웃들이 원하는 것을 실천했다.


힐링센터0416쉼과힘의 임남희 사무국장은 포럼에서 “세월호 유가족을 만날 때마다 ‘미안하다'고 말하거나 손잡고 우는 것만으로는 관계를 지속하기 힘들다. 서로가 또 다른 방식으로 기억하고 만날 매개가 필요했다”고 말한다. 한편, 마음껏 소리칠 장소가 필요했던 유가족들의 막힌 가슴을 조금이나마 풀기에 합창단이라는 형식은 안성맞춤이었다. 경주아이쿱생협의 재난 대응 교육에는 조합원의 요청으로 지진 대피뿐 아니라 인접한 원자력발전소가 폭발했을 경우에 대비한 교육도 포함되어 큰 호응을 얻었다. 세 경우 모두 개입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의 목소리에 충분히 귀 기울였다.


(3) 활동을 하고 싶고, 해야 하는 사람이 한다


때로 많은 사람들을 조직하거나 더 많은 돈을 끌어와 활동의 규모만 비대해지는 경우가 있다. 논의된 세 가지 사례 모두 조직의 비대화보다 활동 자체에 관심을 두었다. 그래서 아예 조직이 없거나(고베), 소규모 조직이 다른 관계 기관과 협력하여 활동하거나(안산), 기존 조직을 그대로 활용했다(경주).


경주의 경우, 가족들의 안전에 민감한 생협의 어머니 조합원들의 참여가 두드러졌는데, ‘내 가족의 안전을 스스로 지키겠다’는 마음으로 참여했기에 활동에 적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힐링센터0416쉼과힘의 경우에는 연세대 상담코칭지원센터, 선부종합사회복지관 등과의 협력이 있었기 때문에 상근 활동가 3명의 작은 조직이 꾸준히 활동할 수 있었다. 고베의 우쓰미 겐이치는 앞서 말한 것처럼 재미있는 활동을 발굴하고, 참여는 철저한 자율에 맡겼다.


6. 한국에서 ‘우쓰미 겐이치 방식’은 가능할까


우쓰미 겐이치의 활동이 많은 관심을 받은 것은 그의 독특한 철학은 물론, 그러한 활동을 통해 마을 활동가로 성공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날 포럼에서는 “고베 지역의 생협들도 재난 복구에 역할을 한 것으로 아는데, 혹시 힘을 모아 활동한 적이 있느냐?”는 질문이 나왔다. 하지만 그는 “동네에서 재미있게 노는 것이 목적이고, 제도나 정부의 변화를 요구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다른 큰 단체와 협력은 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내가 나와 이웃을 돕고 행복하게 지내겠다'는 것은 일본의 다양한 마을 만들기, 시골에서 살아가기의 성공 사례에서 거듭 확인되는 계기 중 하나다. 많은 성공 사례가 다양한 매체를 통해 국내에 소개되었지만 국내 시민단체들이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대목이 있다. 바로 활동을 정치화하지 않겠다는 것인데, 정치 세력화를 통해 의제를 만들고 제도 변화를 촉구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어온 한국 시민·사회운동에서 이러한 ‘탈정치'는 받아들이기 쉬운 방식은 아니다.


그러나 충분히 생각해볼 지점은 있다. 특히 시민사회나 사회적경제 영역의 젊은 활동가 이탈이 눈에 띄는 요즘, ‘사회적인 세계'의 지속가능성을 생각해볼 때 우쓰미 켄이치의 방식은 중요하다.


‘즐거운 일을 한다' ‘무리하지 않는다'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하지 않는다. 다시 하고 싶어지면 그때 다시 함께하면 된다'…. 어느 것 하나 우리의 시민사회에서는 쉽게 가능해 보이지 않는 일이다. 그가 전업 활동가가 아니고 별도의 방식으로 생계를 유지한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최선을 다한다'는 생각과 책임감이 미덕인 한국 사회에서는 이러한 자세를 갖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앞선 질문을 다시 풀어볼 수 있다. 전업 활동가는 왜 이렇게 활동하면 안 될까? 전업 활동가가 ‘즐거운 일을 자유롭게 열고' ‘무리하지 않아도 되고' ‘오고 싶을 때 오는' 자유로운 플랫폼에서 시민을 만날 수는 없을까? 민관 협치나 마을 만들기 현장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일반 시민을 만나기 어렵다'는 말이 종종 들린다. 새로운 판을 벌여도 이미 정치화된 사람들이나(이 사람들이 소중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혹은 ‘판이 열리는 시간대'에 참여 가능한 사람들만 계속 온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얘기다.


서울은 더욱 심하다. 치솟는 집값에 떠밀려 몇 년에 한 번씩 이사를 해야 하는 사회에서 ‘내 마을'에 애정을 갖기란 어려운 일이다. 정주성이 없는 마을 안에서 거주민들 간의 협동은, 철저히 개인이 필요한 만큼 익명성을 과도하게 침해하지 않는 영역에서만 받아들여지기 쉽다. 물론, 공동육아나 교육 등 다른 분야의 공동체 만들기라면 당사자들의 참여가 좀 더 긴밀하게 이뤄질 수 있겠지만, 누구 하나 대상이 아닐 수 없는 재난이 주제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시민사회에 전혀 참여하고 싶지 않은 사람까지 보호받을 수 있는 가장 느슨하고 헐거우면서도 촘촘한 보호막이 필요하다.


7. 다양한 상상들


그래서 무엇이 필요할까? 고베와 안산, 경주를 이어보며 떠오르는 상상들을 나열해본다. 우쓰미 겐이치의 조언대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자유롭게….


(1) 유연한 활동 방식들


활동가들이 프로젝트와 예산, 시민사회 내의 위계질서에 사로잡히면 유연한 활동이 불가능하고, 무리하면 오래 버틸 수도 없다. 예산을 딸 수 있는 사업, 선배 활동가가 ‘오케이' 할 것 같은 사업에만 묶여서는 안 된다. 또, 모두가 오전 9시에서 오후 6시까지,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기계적으로만 활동해서는 시민들을 폭넓게 만날 수 없다. 시민사회에도 파격적인 활동방식의 제고가 필요하지 않을까? 이를테면 직업 활동가 안에서도 우쓰미 겐이치와 같이 자유로운 활동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다. 활동가가 스스로 출퇴근 시간을 조정해서 원하는 분야의 시민들을 자연스레 끌어들일 수 있는 장을 열어보고, 새로운 실험을 하도록 하는 식이다. 활동가가 사회 혁신을 이끄는 개인 플랫폼으로 성장할 판을 열자는 것이다.


특히 최근 젊은 활동가들의 이탈 현상이 두드러진 현실을 심각하게 생각한다면, 조직 분위기 혁신은 꼭 필요하다. 즐겁고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어야 한다. 예산안의 1원, 10원 단위를 맞추기 위해 만나는 사람보다 영수증을 챙기는 일이 더 중요하고 상사의 권위적인 태도에 억눌린 활동가가 다른 누군가를 위해 ‘자유롭게 드나들고, 누구도 무리하지 않는 판'을 만들 수 있을 리 만무하다.


(2) 그리고 새로운 협동의 관계들


이 부분에선 생협이 큰 가능성을 가진다고 생각된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한국도 재난이 발생했을 경우 군대나 소방 등 국가의 대비 시스템이 가장 먼저 발동한다. 그런데 민간 영역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이유로 인해 이미 잘 엮어진 민간 네트워크다. 그런 점에서 안전에 민감한 생협 조합원들이 재난 교육을 먼저 받고, 지역사회 재난 대응의 거점으로 활동하는 것은 어떨까?


지역 사회복지단체, 대학과 협력한 안산의 힐링센터0416쉼과힘 역시 매우 효과적인 협업 사례다. 심리 지원이 필요한 유가족들에게 심리 전문가와 지역사회를 잘 아는 복지사들이 함께 만나 지원 모델을 구축했다. 서울이나 다른 지역에서도 지역의 활용 가능한 자원을 파악하고 엮어둘 필요가 있다.


재난 대비 방법 중 많이 쓰이는 것이 ‘위험 지도 만들기'다. 우리 마을의 위험 요소를 살펴보고, 위험이 발생할 경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을 지도로 만들어보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마을에 누가 살고 어떤 위험 요소가 있는지를 다음과 같이 확인할 수 있다(장애인, 노약자 가구를 살피고, 대피로의 불편함을 확인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한다).


첫째, 위험 제거를 위해 마을에서 무엇을 할지, 둘째, 정부나 행정의 변화가 필요하다면 어떻게 요구할지, 셋째, 유사시 어떻게 대처할지를 찾는다. 단순히 위험 요소만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위험 발생 시 연결 가능한 네트워크 찾기 방식으로 접근해 볼 수도 있다. 이를테면 동네 슈퍼가 있으니 식량은 슈퍼에서 구하고, 심리상담사는 어느 곳에 살고 있으니 그곳을 찾으면 된다는 식이다. 고베시처럼 ‘이 집에 누가 사는데 아직 발견되지 못했다'는 정도까지 가능한 공동체가 만들어지면 더욱 좋다. 그러나 익명성을 최고의 미덕으로 생각하는 도시에서는 유사시 작동가능한 네트워크를 확인해두는 정도로도 큰 의미가 있다.


재난이 닥치지 않는다면 가장 좋겠지만, 재난을 잘 대비해야 한다는 위기감이 확산된 지금이야말로 새로운 시민성, 사회의 연결고리를 만들어낼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이번 포럼에서 다뤄진 다양한 활동을 돌아보며 촘촘한 공동체가 버거운 ‘젊은 것들' 중의 한 명으로 재난 회복력 공동체를 위한 상상을 해본다.


‘각자가 양손을 옆으로 쭉 뻗어본다. 충분히 혼자 팔을 흔들 수 있을 만큼의 거리를 두고 선다. 도움이 필요할 때, 힘을 주어 손을 조금 더 뻗어본다. 그러면 누군가의 손이 잡힌다.'


재난이 어딘가에서 일어나는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며 익명성에 기대어 살아가는 도시에서 재난을 대하는 협동은 이런 모습이어야 하지 않을까. 자유롭고, 무리하지 않고, 재미있게! 하지만 도움이 필요할 땐 누군가의 손이 꽉 잡히는 새로운 협동을 꿈꿔본다.


박선하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시민경제센터 연구원 sona@hani.co.kr


※ 이 글은 ‘생협평론’ 2018년 봄호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한겨레에서 보기: 
http://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840794.html#csidxd6a81d94a4ecd548e7aaf58f8cb16a1 onebyone.gif?action_id=d6a81d94a4ecd548e7aaf58f8cb16a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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