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뉴스
5㎝
어떤 단어나 문장을 만나면 이유 없이 멍해질 때가 있다. 두 번 잇따라 나를 그렇게 만든 말은 ‘5㎝’였다. 한번은 지난 6월 개봉했던 일본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영화 <초속 5㎝>였다. 1초에 몇 센티미터를 간다는 식의 표현을 들어본 적도 써본 적도 없던 나는 아무 것도 떠올릴 수 없었다. 벚꽃이 날려 떨어지는 속도였음을 영화를 본 뒤에야 알았다. 경주에서 발견돼 지난 10일 공개된 마애불상은 ‘5㎝의 기적’으로 불렸다. 바위 위로 넘어진 모습이었지만 정수리 부분이 바위에 걸려 5㎝의 빈틈을 만들었고, 그 사이에서 마애불상은 1300년 전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냈다.
시속 몇 킬로미터의 단위로만 살아가는 나에게 <초속 5㎝>는 좀 더 느리게 살아보라 하고, 크고 많은 것들에만 감각의 시선을 돌리는 나에게 ‘틈 5㎝’는 작은 것의 가치를 살피라 한다.
정보와 돈이 빛의 속도로 세계를 오가는 세상, 머물면 뒤처질까 앞만 보고 질주하는 세상. 그걸 돕는 과학과 문명의 이기들. 우리는 행복한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백년 동안의 고독>에서 천국 마콘도 마을이 속도와 편리함으로 무장한 문명에 의해 어떻게 몰락하는지를 그렸다. 마을은 5년 가까이 계속된 대홍수가 탐욕스런 문명을 쓸어간 뒤에야, 느리고 답답하지만 행복했던 옛 모습을 찾아간다. 밀란 쿤데라는 <느림>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나의 마부 걸음걸이의 리듬을 천천히 느껴보고 싶다. 시간의 흐름 속에 그의 걸음걸이는 점점 느려진다. 나는 저 느림 안에서 행복의 징표를 찾는 듯하다.”
정부는 오는 10월2일 남북 정상회담차 방북하는 노무현 대통령이 군사분계선을 걸어서 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성사된다면 이왕 걸을 것 느리게 걸었으면 좋겠다. 그 장면을 보면서 천천히 느껴보고 싶다. 느림 안에서 남과 북의 행복의 징표라도 찾아보고 싶다.
함석진 한겨레경제연구소 연구위원 sjham@hani.co.kr
한겨레 | 2007.09.27 18:30
어떤 단어나 문장을 만나면 이유 없이 멍해질 때가 있다. 두 번 잇따라 나를 그렇게 만든 말은 ‘5㎝’였다. 한번은 지난 6월 개봉했던 일본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영화 <초속 5㎝>였다. 1초에 몇 센티미터를 간다는 식의 표현을 들어본 적도 써본 적도 없던 나는 아무 것도 떠올릴 수 없었다. 벚꽃이 날려 떨어지는 속도였음을 영화를 본 뒤에야 알았다. 경주에서 발견돼 지난 10일 공개된 마애불상은 ‘5㎝의 기적’으로 불렸다. 바위 위로 넘어진 모습이었지만 정수리 부분이 바위에 걸려 5㎝의 빈틈을 만들었고, 그 사이에서 마애불상은 1300년 전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냈다.
시속 몇 킬로미터의 단위로만 살아가는 나에게 <초속 5㎝>는 좀 더 느리게 살아보라 하고, 크고 많은 것들에만 감각의 시선을 돌리는 나에게 ‘틈 5㎝’는 작은 것의 가치를 살피라 한다.
정보와 돈이 빛의 속도로 세계를 오가는 세상, 머물면 뒤처질까 앞만 보고 질주하는 세상. 그걸 돕는 과학과 문명의 이기들. 우리는 행복한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백년 동안의 고독>에서 천국 마콘도 마을이 속도와 편리함으로 무장한 문명에 의해 어떻게 몰락하는지를 그렸다. 마을은 5년 가까이 계속된 대홍수가 탐욕스런 문명을 쓸어간 뒤에야, 느리고 답답하지만 행복했던 옛 모습을 찾아간다. 밀란 쿤데라는 <느림>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나의 마부 걸음걸이의 리듬을 천천히 느껴보고 싶다. 시간의 흐름 속에 그의 걸음걸이는 점점 느려진다. 나는 저 느림 안에서 행복의 징표를 찾는 듯하다.”
정부는 오는 10월2일 남북 정상회담차 방북하는 노무현 대통령이 군사분계선을 걸어서 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성사된다면 이왕 걸을 것 느리게 걸었으면 좋겠다. 그 장면을 보면서 천천히 느껴보고 싶다. 느림 안에서 남과 북의 행복의 징표라도 찾아보고 싶다.
함석진 한겨레경제연구소 연구위원 sjham@hani.co.kr
한겨레 | 2007.09.27 1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