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뉴스
내가 하는 사회공헌활동이래야 푼돈이다. 매달 월드비전에 2만원씩 내고, 천주교 민족화해위원회에 2만원씩 내는, 그 4만원이 전부다. 대신, 내가 음주운전이나 교통사고 같은 일로 법정에 서게 될 때, 그 4만원이 내게 뭔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본 일은 없다. 액수는 쥐꼬리만할지언정 대가는 바라지 않는다.

그러던 내 생각을 바꾼 게 2007년 9월6일, 현대자동차 정몽구 회장 횡령 혐의에 대한 판결이다. 이 판결에서 대한민국 사법부는 대가성 사회공헌활동을 명문화했다. 사회공헌활동이, 특히 금전적 기부활동이 불법행위에 대한 면죄부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판결문을 당당하게 발표한 것이다. 정 회장의 8400억원 사회공헌 약속은 1천억원 규모 횡령죄에 대해 인신구속 대신 집행유예 선고를 받도록 하는 대가로 인정받았다.

궁금해진다. 매달 내 통장에서 빠져나가는 4만원은, 그리고 통장에 잔액이 있는 한 앞으로 계속 빠져나갈 월 4만원 사회공헌의 약속은, 어떤 불법행위에 대해 인신구속을 피하는 대가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정 회장 재판부는, 나처럼 푼돈이나마 대가 없이 공동체를 위해 희사해 보려고 노력하던 보통 사람의 사회공헌활동을 모독했다.

재판부는 전문가들도 모독했다.
나는 지금껏 사회공헌활동이 새로운 시대 기업 경영전략의 일부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내용으로 글도 쓰고 연구도 하고 강의도 하고 컨설팅도 했다. 사회공헌 잘 하는 기업이 오랫동안 존경받고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많은 전문가들이 그랬다.

이제야 알았다. 그동안 내가 흘려놓은 사회공헌활동에 대한 모든 말들이, 정 회장처럼 불법행위를 저지른 사람에 대한 면죄부 발급 논리로 활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혼란스럽다. 나는 그동안 사회공헌활동에 대가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걸까? 정 회장 재판부는, 나처럼 기업 사회공헌활동에 애정을 갖고 도우려고 노력한 전문가들을 모독했다.

더 크게 모욕당한 사람은 현장 활동가들이다.
정 회장이 8400억원을 사회에 풀어놓으면, 그 돈은 먼저 우리 사회 어두운 곳에서 어려운 이웃과 함께 땀 흘리는 현장 활동가들에게 갈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어려운 이웃들에게 전달될 것이다.

기업으로부터 후원을 받아 어려운 이웃을 돕는 비영리단체 활동가 중에는, 실제 그 어려운 이웃들만큼이나 경제적 형편이 열악한 사람도 많다.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가진 어엿한 전문가들도 100만원 남짓한 월급으로 가계를 꾸려가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들 중 대부분은 법원이 인정하고 정 회장이 사회에 뿌릴 그 8400억원 중 1만분의 1, 10만분의 1만 있어도 도울 수 있는 이웃이 주변에 널려 있다고 생각한다. 단돈 몇 백 만원이라도 후원을 받으면, 돈의 배경이야 어떻든 결과적으로 더 어려운 이웃에게 도움이 되도록 용을 쓰고 땀을 흘리고 있다. 그들은 범법자의 면죄부 발급에 땀을 흘리고 있는 것일까?
가장 크게 모욕당한 사람은 우리 주변의 어려운 이웃들이다.

부자의 도움이 매우 필요한 것은 맞다. 가난한 이들이나 병약한 이들, 자립하기 어렵다. 재산이 많은 사람은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돈의 출처가 횡령이든 어떻든, 당장 병들고 가난하고 노쇠한 사람에게는 생명줄이 될 수 있다. 재판부는 그런 돈으로 살아가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도 그런 돈으로 살아가야 하는 그 이웃들 모두가 범법자의 면죄부 발급에 봉사하게 만들었다.

이제 대한민국 기업의 사회공헌활동에는 새로운 역사가 시작됐다. 지금부터 선한 이들의 선행과 가난한 이들의 생존은, 언젠가 면죄부 발급의 근거가 될 수 있다. 재판부는 이 역사에 책임질 수 있는가.

이원재/한겨레경제연구소장 timelast@hani.co.kr 2007.09.12 21:10
서비스 선택
댓글
로그인해주세요.
profile image
powered by SocialXE
List of Articles

[나라살림가족살림] 사회적 기업과 경영능력

2008-04-30 7년 전, 이철종 대표이사의 꿈은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그저 취업을 하고 싶은데 일자리를 도저히 찾을 수 없는 사람도 제대로 된 직장에서 일할 수 있는 세상이 왔으면 했다. 그래서 직접 나서서 일자리를 만들기로...

  • HERI
  • 2011.06.27
  • 조회수 8010

‘사회적 기업가’ 양성학교 문 두드리세요

2008-08-20 사회적 기업가를 양성하는 교육 아카데미가 전국에 문을 연다. 실업극복국민재단은 노동부가 주관하고 에스케이(SK)가 후원하는 사회적 기업가 아카데미 교육 운영기관으로 한겨레경제연구소 등 18곳을 최종 선정해 20일...

  • HERI
  • 2011.06.27
  • 조회수 7951

(나라살림가족살림) “착한 경제”의 코드

2008-01-30 부산의 엔지오 활동가들을 만났다. 사회생활의 대부분을 ‘좋은 일’을 하는 데 헌신적으로 보낸 그들의 주요 관심사는 이제 ‘돈벌이’였다. 자신이 이끄는 조직이 하고 있는 좋은 일을 지속시키려면 경제적 자립이 필요...

  • HERI
  • 2011.06.27
  • 조회수 7254

[5분경영학] 가게 땅값 올랐다고 웃지 마세요

2006-03-30 건물주가 가게 주인인 경우 자산은 늘어났지만 이익은 줄어든 셈… 늘어난 임대료를 챙긴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기회비용을 계산하라 ▣ 이원재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timelast@seri.org 이주의 용어 회계적 ...

  • HERI
  • 2011.06.27
  • 조회수 7931

[5분경영학] 피터 드러커의 시간관리법

2007-07-12 지식노동자의 가장 중요한 자원, 시간을 기록하고 관리하고 통합하라 ▣ 이원재 한겨레경제연구소 소장 timelast@hani.co.kr 미국 경영학의 대가 피터 드러커는 시간관리의 중요성에 대해 가장 강력하게 주장했던 경영...

  • HERI
  • 2011.06.27
  • 조회수 8549

[5분경영학] 프로구단은 왜 신인을 지명할까

2006-06-09 선수가 의무적으로 한 구단에 노동력을 팔아야 하는 드래프트제의 경제학… 수요독점으로 가격 낮추는 전략, 공급업체를 독점한 월마트나 GM을 보라 ▣ 이원재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timelast@seri.org 이주의 ...

  • HERI
  • 2011.06.27
  • 조회수 8295

[5분경영학] 컴퓨터 가격은 왜 자꾸 떨어질까

2006-04-26 다른 사람들이 많이 갖고 있을수록 수요가 높아지는 네트워크 외부효과… 허영심 때문이 아니라 기술의 발전으로 주변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구매 ▣ 이원재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timelast@seri.org 이주의 용어...

  • HERI
  • 2011.06.27
  • 조회수 11811

[5분경영학] 차별 있는 곳에 이익 있다

2007-07-12 최대 지불 의사’에 따라 각각 다른 값에 파는 가격 차별 전략 기업의 음모라 봐야 할까 모두의 ‘꿩먹고 알먹기’로 봐야 할까 ▣ 이원재/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timelast@seri.org “영화값도 얼마 안 내...

  • HERI
  • 2011.06.27
  • 조회수 8126

[5분경영학] 주위를 둘러보고 “깎아주세요”

2006-02-15 물건값 흥정에 숨어 있는 경영학, 탐색비용을 둘러싼 게임 독과점이라면 정가 판매를, 경쟁이 치열하면 흥정을 권한다 ▣ 이원재/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timelast@seri.org 선물을 사러 서울 인사동에 들렀다. 여...

  • HERI
  • 2011.06.27
  • 조회수 8278

[5분경영학] 죄수의 딜레마, 기저귀의 딜레마

2006-07-06 가만 있는게 더 이익인 기저귀 회사들은 왜 연구개발에 거액을 투자할까 … 게임이론이 두 업체의 경쟁 설명, 죄수의 딜레마가 소비자를 승리자로 ▣ 이원재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timelast@seri.org 이주의 용...

  • HERI
  • 2011.06.27
  • 조회수 11624

[5분경영학] 제품의 성분을 널리 알려라

2006-08-10 인텔 인사이드·누트라스위트·돌비·고어텍스의 성공 비결… 최종소비재가 아닌 성분을 광고하는 ‘성분 브랜딩’ 전략 ▣ 이원재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timelast@seri.org 이주의 용어 성분 브랜딩(ingredient b...

  • HERI
  • 2011.06.27
  • 조회수 8333

[5분경영학] 전직을 성공으로 이끄는 전략

2007-01-19 회사를 옮길 때 예상되는 변화는 기능적·위계적·문화적 축으로 분석 가능…의미 창출을 단단히 하고 위험을 예상하고 실망을 운명으로 받아들여라 ▣ 이원재 한겨레경제연구소 연구위원 이주의 용어 전직(career tran...

  • HERI
  • 2011.06.27
  • 조회수 8142

[5분경영학] 재포지셔닝으로 운명을 바꿔라

2007-10-25 타이레놀·하얀 바나나 우유처럼 소비자의 마음에 틈새를 만들어 파고드는 전략 ▣ 이원재 한겨레경제연구소 소장 timelast@hani.co.kr “아스피린을 복용해서는 안 되는 수백만 명을 위해서….” 광고는 이렇게 시작했...

  • HERI
  • 2011.06.27
  • 조회수 81585

[5분경영학] 자동차 ‘순정품’에 얽힌 미스터리

2006-11-23 옵션을 묶음으로 파는 것은 국지적 독점을 통한 이익 극대화 전략…인터넷 커뮤니티의 도토리 판매도 회원들에 대한 독점력 때문에 가능 ▣ 이원재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timelast@seri.org ▣ 사진 류우종 기자 ...

  • HERI
  • 2011.06.27
  • 조회수 8944

[5분경영학] 일하기 좋은 기업은 돈을 못 번다?

2008-02-21 직원 만족도 높으면 투자 이익이 작아진다는 신고전파 이론, 이미 현실에 맞지 않아 ▣ 이원재 한겨레경제연구소 소장 timelast@hani.co.kr 간단한 계산부터 해보자. 기업의 주가는 이익과 비례한다. 이익은 매출에서...

  • HERI
  • 2011.06.27
  • 조회수 9106

[5분경영학] 인터넷 뉴스는 영영 공짜일까

2006-12-21 신문사들이 공짜로 서비스하자 독자들의 최대지불의사도 0으로 굳어져…이대로 가면 사회적으로도 손실, 전문화된 콘텐츠일수록 유료화 가능성 높아 ▣ 이원재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timelast@seri.org ▣ 사진 윤운식...

  • HERI
  • 2011.06.27
  • 조회수 8184

[5분경영학] 유명한 CEO가 돈도 잘 벌까

2007-01-03 실적이 좋으면 훨씬 높은 연봉 받지만 나쁘면 정상보다 더 많이 깎여…CEO가 유명해지면 단기적으로는 연봉이 오르지만 장기적으로는 하락 ▣ 이원재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timelast@seri.org 이주의 용어 ...

  • HERI
  • 2011.06.27
  • 조회수 9703

[5분경영학] 오너 경영자의 성공 확률은?

2008-03-06 미국 기업에서 증시 상장까지 자리 지킨 창업자는 25%도 안 돼… 아름다운 퇴장을 준비하라 ▣ 이원재 한겨레경제연구소 소장 timelast@hani.co.kr 부자가 되고 싶으면 무엇을 해야 할까? 사업을 해서 대기업의 최...

  • HERI
  • 2011.06.27
  • 조회수 8364

[5분경영학] 악플이 매출을 키운다?

2006-12-14 기업의 일방적 홍보가 아니라 소비자 간의 커뮤니케이션으로 바뀌는 마케팅…댓글은 웹이라는 공간에서 퍼지는 입소문, 소비는 능동적 행위로 다시 태어나 ▣ 이원재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timelast@seri.org 이주...

  • HERI
  • 2011.06.27
  • 조회수 8425

[5분경영학] 아파트 광고는 왜 하시나요

2005-12-15 업종의 광고 탄력성이 높고 가격 탄력성이 낮을수록 광고 지출은 늘어나 시장 유지를 위해 광고비 쏟아붓는 미국 맥주회사, 한국 아파트도 그런가 ▣ 이원재/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timelast@seri.org 어고노믹스...

  • HERI
  • 2011.06.27
  • 조회수 8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