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원재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timelast@seri.org
이주의 용어
최고경영자(Chief Executive Officer)
연말이 올 때마다, 세상은 두 종류의 사람으로 나뉘어진다. 연말 보너스를 받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다. 2006년 월스트리트에는 전자가 훨씬 많았던 것 같다.
22조원. 연말 미국 뉴욕의 금융 중심지 월스트리트에 뿌려진 연말 보너스의 총액이다. 뉴욕주와 뉴욕시는 연말 보너스에 대한 세금으로만 2조원이 넘는 돈을 거둬들이게 됐다. 올해 주식시장이 좋았던 덕이다. 1인당 보너스 액수를 계산해보니, 1억2천만원이 훌쩍 넘는다. 2005년 말 현재 월스트리트 금융회사에 근무하는 사람은 17만4천 명인데, 총액 22조원을 사람 수로 나누면 이렇게 된다.
연말 보너스만 495억원!
물론 평균이 1억2천만원이라고 해서 모두가 그만한 돈을 받는 것은 아니다. 수백억원을 받는 최고경영자(CEO·Chief Executive Officer)가 있는가 하면, 개인 성과가 좋지 않아 한 푼도 받지 못하는 직원도 있을 것이다. 여기도 여지없이 양극화는 일어난다.
△ 미국의 유명한
CEO인 칼리 피오리나, 도널드 트럼프, 스티브 잡스(왼쪽부터). 유명세로만 따지자면 세계 최고인 이들은 경영 현장에서 이름값을 하고
있을까?(사진/ AP연합) |
우선 월스트리트 금융사 직원의 연봉은 같은 뉴욕시 비금융 업종 종사자에 견줘도 2.5배나 된다. 이건 말하자면 열차 안에서 벌어지는 달리기 시합이다. 어떤 열차를 탔느냐에 따라서 승부의 절반은 갈린다. 물론 같은 열차 안에서도 차이는 크다. 가장 많은 보너스를 받은 사람은 골드만삭스의 CEO인 로이드 블랭크파인이다. 월가 사상 최대인 495억원이 지급됐다. 평균 금액의 400배쯤 된다. 이 가운데 현금이 250억원 남짓이고, 나머지가 주식과 스톡옵션이다. 블랭크파인의 2005년 연봉은 고작 5억원이 조금 넘었다고 한다. 연말 보너스가 연봉의 100배에 가까운 셈이다. 성과는 높게 올리고 볼 일이다.
블랭크파인이라니, 낯선 이름이다. 우리가 이름을 많이 들어본 CEO들은 모두 어디로 가고, 이름조차 낯선 사람이 최고 액수의 보너스를 챙기다니 기분이 묘하다. 얼른 미국 기업인 연봉 랭킹을 찾아봤다. 유진 아이젠버그 나보스인더스트리 회장, 레이 이라니 옥시덴탈 페트롤리엄 회장, 루 프랭크포드 코치 회장…. 어쩐지 낯선 이름이 많다.
그 유명한 CEO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 한때 유엔 사무총장 후보로 거론되기까지 했던 칼리 피오리나 전 HP 회장, 기업가를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사업 경쟁을 시키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어프렌티스>(apprentice·도제)에 매주 고정출연해 “너 해고야”(You’re fired)라는 유행어를 만들기도 한 부동산 재벌 도널드 트럼프, 아이팟으로 너무나 유명해진 애플의 스티브 잡스 회장….
대중 앞에서 직접 강연도 많이 하고 언론에도 늘 이름이 오르내리는 경영자들이다. 유명세로만 따지면 세계 최고 경영자일 이들은 실제 경영 현장에서 이름값을 제대로 하고 있을까? 유명한 경영자는 돈도 많이 벌까?
이걸 궁금해하는 사람이 벌써 있었다. 미국 럿거스대학의 제임스 웨이드 교수 등 네 명의 경영학 교수들이다. 이들은 CEO의 유명세와 연봉 사이의 관계를 연구했다. 웨이드 교수팀은 미국 경영전문지 <파이낸셜 월드>가 매년 주는 ‘올해의 CEO’라는 상을 받은 CEO들과 그렇지 않은 CEO들의 연봉을 조사해 비교했다.
당연히 상을 탄 CEO가 매스컴을 타고 유명해지니, 그 뒤 연봉도 많이 받게 되리라는 것이 통념이다. 그러나 웨이드 교수팀에 따르면 이것은 절반만 사실이었다. 이듬해 회사 실적이 좋다면, 상 받은 CEO가 확실히 상 못 받은 CEO보다 연봉이 더 크게 높아졌다. 유명해진 경영자에 대해서는 시장이 실적보다 더 큰 가치를 인정해줬고, 이에 따라 연봉이 더 높아졌던 것이다. 이게 바로 ‘유명세 프리미엄’이다.
시장은 감정적이다
문제는 이듬해 회사 실적이 나빠졌을 때였다. 실적이 악화할 때는 상 받은 CEO의 연봉이 상 못 받은 CEO보다 더 크게 낮아졌다. 유명해졌는데 실적이 나빠지면 시장의 실망 때문에 연봉이 정상보다 더 많이 깎인다는 얘기다. 이건 ‘유명세 디스카운트’이다.
전체적으로 봐도 통념은 깨진다. 전체 평균을 보면 CEO가 상을 타고 유명해졌을 때, 단기적으로는 연봉이 오르는 경향이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더 깎인다. 뒤집어 이야기하면 CEO가 유명해지고 나서 실적이 나빠지는 회사가 더 많다는 이야기도 된다. 시장은 감정적이다. 열광도 하고 실망도 한다. CEO 연봉을 결정하는 시장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유명세에는 프리미엄도 있지만 디스카운트도 있다. “잘나갈 때 몸을 사려라”는 저잣거리의 말 속에는, 분명 뼈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