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의 용어
제품 관여도(product involvement)
고관여 상품(high-involvement product)
저관여 상품(low-involvement product)
전략적 움직임(strategic move)
어릴 적 두부 심부름은 간단했다. 엄마가 쥐어준 동전을 손에 꼭 들고 가서는 가게 주인 아주머니한테 내밀며 한 마디만 하면 됐다. “두부 한 모 주세요.” 요즘 두부 심부름은 완전히 다르다. “좀 비싸도 풀무원으로 살까, 아니면 좀 싼 걸로 살까? 콩은 국산을 쓴 게 나은가, 아니면 중국산도 괜찮을까? 찌개용으로 할까, 아니면 부침용으로 할까?” 아내가 쥐어준 돈을 잘 간수하는 건 둘째 문제다. 반찬거리 심부름엔 반드시 휴대전화를 챙겨가야 하는 이유다. 판단할 수 없는 돌발 정보에 대해 원격 자문을 받기 위해서다.
맥주·담배·자동차 부품까지
난데없이 두부 이야기를 꺼낸 것은, 풀무원의 노력에 의해서 두부라는 제품에 대한 한국 소비자의 제품 관여도(product involvement)가 얼마나 극적으로 바뀌었는지를 보여드리기 위해서다. 그리고 제품 관여도에 대한 지난번 글을 변명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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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5분 경영학에 “소주와 와인에 대한 우리의 자세”(<한겨레21> 630호)를 쓴 뒤, 한 소주 애호가로부터 가벼운 항의를 받았다. 항의 내용은 간단했다. 소주는 이미 맛과 도수가 다양화한 고관여 상품(high-involvement product)으로 바뀌었는데, 그 글에서는 대표적 저관여 상품(low-involvement product)인 것처럼 묘사해 애호가로서 자존심이 상했다는 것이다.
그 애호가 말이 맞다. 제품 관여도는 바뀐다. 그리고 많은 기업이 생산 제품의 관여도를 높이기 위한 전략적 움직임(strategic move)을 보이고 있다. 제조업체들이 모두들 고관여 상품을 만들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하다. 제품 관여도가 높으면 마진을 높일 수 있고 후발업체와의 가격경쟁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소비자가 제품의 질을 하나하나 따져묻기 때문에, 제품 차별화로 경쟁할 수 있다. 그래서 높은 마진을 붙일 수 있다. 저관여 상품은 제품의 질을 높여도 소비자의 관심을 끌기 어렵다. 그저 가격과 접근성으로 경쟁하는 게 상책이다. 그러다 보면 경쟁 제품 사이에 가격 경쟁이 벌어지기 일쑤고, 마진은 박해지기 마련이다.
소주 회사의 전략적 움직임은 성공적이다. 처음에 묵묵히 두꺼비만 찾던 소비자들이, 언제부터인가 함유 알코올 도수를 따지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깔끔한 맛’을 따져묻는 마니아층도 생기고 있다. 소주 이상으로 극적인 전략적 움직임을 보여 성공한 제품이 맥주와 담배다. 과거 OB와 크라운의 양대 산맥이 맥주시장을 지배하던 시절, 맥주에 마케팅이란 곧 유통이었다. 사람들은 맥주의 브랜드를 따져묻지 않았다. 그저 술집 주인이 내오는 것을 마셨다.
크라운맥주가 ‘하이트’를 내놓으면서 그 적막한 시장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맥주 회사 사이에 광고전이 벌어졌고, 브랜드 맥주가 생기기 시작했다. 곧이어 카스가 가세하더니 맥주 신규 브랜드는 봇물이 터지게 된다. 젊은 사람은 어떤 맥주를, 나이 든 사람은 어떤 맥주를 좋아한다는 선입견도 생겼다. 이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술집 주인이 내오는 것을 그대로 마시는 맥주 소비자는 거의 없어졌다. 1993년 하이트맥주가 등장한 지 10여년 만에 그렇게 바뀌었다.
담배도 마찬가지다. 모든 애연가가 솔이나 88 한 가지로 만족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요즘 담배는 도대체 뭐가 있는지 모를 정도로 엄청나게 다양해졌다. 흡연자는 이제 따져묻는다. 담배에 타르와 니코틴이 얼마나 들었는지, 굵기는 어느 정도인지, 담배연기에서 특별한 향이 나는지. 역시 관여도가 높아진 것이다.
요즘에는 점점 더 많은 저관여 상품 생산자들이 관여도를 높이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한국 경제가 발전하면서 과거처럼 값싼 노동비용을 앞세워 비용을 절감하고 가격 경쟁을 벌이면서 시장을 장악하는 전략은 쉽게 먹혀들지 않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생산비용이 높아진 탓에 가격 경쟁을 섣불리 벌였다가는 손해 보는 장사를 하게 될 판이다. 소비자 의식이 높아져 제품 관여도를 높이기가 용이해졌고, 소득 수준이 높아져 고가 제품도 예전보다 잘 팔려나간다는 점도 기업들의 이런 전략을 뒷받침한다.
지금부터라도 귀를 기울여 광고를 들어보라. 메시지 하나하나에 관여도를 높여보려는 기업의 몸부림이 묻어 있다.
“아무 엔진오일이나 넣어달라는 말은 내 차 사랑 결핍증”이라고 주장하는 지크XQ 광고가 대표적이다. 그 광고가 나오기 전까지, 소수의 전문가를 뺀 대부분 운전자들은 어떤 엔진오일을 넣어야 하는지를 고민해본 일이 없었을 것이다. “순정부품”을 강조하는 현대모비스 광고도 마찬가지다. 그저 카센터에서 권하면 별 생각 없이 사용하던 게 자동차 부품이었다.
유선 전화기는 천덕꾸러기로 전락
원래 높았던 제품 관여도가 낮아지는 것은 기업들이 반드시 피하고 싶은 경우다. 천덕꾸러기가 된 가정용 유선 전화기를 보라. 무선 전화기 보유 여부가 그 집안의 경제 수준을 보여주는 지표인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휴대전화로 음성통신 주도권이 넘어간 지금, 유선 전화기는 그저 ‘없으면 아쉬우니 한 대 있기만 하면 되는’ 저관여 상품이 됐다. 이제 품위보다는 가격이 제품 선택 기준이 됐다. 전화기 판매 마진이 급격히 떨어진 것은 물론이다.
사랑에 그리도 큰 책임과 간섭이 뒤따르는 줄 알면서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사랑을 찾아나선다. 빠지면 적잖은 비용을 치러야 하기도 하지만, 또 그만한 가치를 돌려주는 게 사랑이기 때문이다. 소비자의 제품 관여도를 높이려는 기업들의 전략적 움직임이 꼭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