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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렴한 자존심’을 드립니다

세계 시계 시장의 경계를 허물고 패션이라는 새 영역에 뛰어든 스와치… 고가로 자존심 파는 스위스 시계와 저가 전자 시계 사이에서 빈틈 개척

2006-09-06 ▣ 이원재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timelast@seri.org


이주의 용어

포지셔닝(positioning)

시장획정(market definition)

사람들은 왜 결혼 예물이랍시고 수십만원짜리 시계를 사는 걸까. 휴대전화에도 있고 컴퓨터에도 있고 벽에도 있고 텔레비전에도 있고 모든 곳에 다 있는 게 시간인데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과감하게 시계를 생략하기로 결정했다. 한창 결혼을 준비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정확한 시간이냐, 자존심이냐

그러고 나서 주변을 둘러보니 웬걸,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시계를 차고 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휴대전화나 컴퓨터에서 더 정확한 시간을 늘 확인하면서도 말이다. 그제야 깨달았다. 시계는 분명 시간 이상의 그 무엇이다. 시계를 사는 사람들은 시간뿐 아니라 ‘자존심’이라는 상징을 함께 산다.




그런데 꼭 결혼 예물 시계뿐일까? 사실 어떤 시계도 가치 있는 상징이 될 수 있다. 수십만원짜리가 아니라 3만원짜리 시계도 시간 이상의 그 무엇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여기에 착안한 포지셔닝(positioning) 전략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둔 시계가 바로 ‘스와치’다.

시곗바늘을 1980년대 초반으로 돌려보자. 그때 어린아이들에게 전자시계의 출현은 혁명이었다. 시간이 잘 맞는 것도 좋았다. 숫자가 화면에 나오는 최첨단 기술을 사용한 것도 놀라웠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혁명적인 것은, 가격이었다.

‘메이드 인 홍콩’이라고 찍힌 전자식 시계가 등장한 뒤, 시계 가격은 순식간에 기계식 시계의 5분의 1, 10분의 1로 내려앉았다. 결혼 예물에서나 볼 수 있던, 그리고 부잣집 애들이나 차고 다닐 수 있었던 손목시계를 누구나 차고 다닐 수 있게 됐던 것이다.

그때 스위스의 시계업자들은 속을 끓이고 있었다. 값싼 전자식 시계의 등장과 함께 전세계 시계산업의 주도권이 최초로 스위스를 떠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기계식 손목시계는 스위스 금세공사들에 의해 처음 발명됐다. 그래서 1970년 이전까지 스위스는 전세계 시계산업의 절반 이상을 점유하고 있었다. 스위스 시계공들은 세계 최고의 정확성을 자랑했고, ‘메이드 인 스위스’는 곧 최고 품질이라는 뜻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전자식 시계 열풍으로, 1985년 스위스의 세계 손목시계 시장 점유율은 13%까지 떨어졌다. 일본이 39%, 홍콩이 22%를 차지해 스위스를 훌쩍 앞질렀다. 특히 전자식만 따지면, 스위스 점유율은 7%에 그쳤다.

아시아 기업들은 전자식 기술을 재빨리 도입한데다, 낮은 임금에 낮은 마진을 유지하면서 전자식 시계를 대량으로 세계시장에 쏟아냈다. 기계식 기술을 고집하고 임금도 높았던 스위스 기업들은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가장 매출이 큰 중저가 시장은 쉽게 넘어갔다. 1980년대 초반, 연간 4억5천만 개 규모인 75달러(7만5천원) 미만 저가 시계 시장에서 스위스 기업의 시장점유율은 0%였다. 스위스 시계가 지켜낸 유일한 영역은 고가 시장이었다. 연간 800만 개 팔리던 400달러(40만원) 이상 시계 시장에서 스위스 기업의 점유율은 거꾸로 97%나 됐다. ‘시간’을 원하는 소비자는 가격이 싼 아시아 시계로 금방 옮겨갔지만, ‘시간 그 이상의 무엇’을 찾는 ‘자존심 강한’ 소비자는 여전히 스위스 시계를 고집했던 것이다.

스와치가 시장에 모습을 드러낸 1983년, 시계 시장은 그렇게 ‘정확한 시간을 값싸게 파는’ 아시아 기업과 ‘자존심을 비싸게 파는’ 스위스 기업으로 양분돼 있었다. 그때 스와치는 ‘저렴한 자존심’이라는 빈자리를 찾아 포지셔닝한다. 스와치의 포지션은 한마디로 요약됐다. “시간을 말해주는 3만원짜리 패션 액세서리.”

스와치는 고고한 수공업적 태도에서 벗어나, 전자식 기술과 플라스틱 재질을 받아들여 값싼 시계로 승부하기로 결정했다. 모든 시계에 단일 가격 30달러(3만원)를 매겨 저가 시장에 진입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값싼 시계이면서도 자존심만은 지켰다. 스와치는 시계가 아니라 ‘패션’이라는 콘셉트 덕이었다. 스와치는 이탈리아 밀라노에 디자인 본부를 마련해두고, 패션 디자이너의 자문을 받아 시계를 디자인했다. 6주마다 새로운 디자인을 내놓으면서 ‘저렴한 자존심’이라는 구호에 걸맞은 디자인 패턴을 보여줬다.


새로운 포지셔닝은 새로운 시장 획정으로

새로운 포지셔닝은 새로운 시장 획정(market definition)으로 확장됐다. ‘패션 시계’를 선언한 뒤 스와치의 경쟁 제품에는 팔찌나 목걸이 같은 액세서리도 추가됐다. 시계 시장의 경계를 허물고 ‘패션’이라는 새로운 시장에 뛰어든 것이다.

여기다 고급 시계 기술의 원조인 스위스와 워치(시계)의 합성어인 ‘스와치’라는 브랜드명으로 소비자에게 “기존의 값싼 전자시계와는 다르다”는 이미지를 전파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정확히 10년 뒤, 스와치는 세계 시계산업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리는 브랜드가 됐다. 1993년 한 해 동안 스와치는 2900만 개가 팔렸다. 출범 뒤 그때까지 팔린 스와치 시계는 모두 1억5400만 개나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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