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뉴스
2009-12-10 [초점] 지식경제부 “SR 국제표준 세미나 후원자 명단서 빼라”…
노동·인권·환경 단체 힘 실어줄까 우려한 듯



지난 9월3일 서울 숭례문 근처 대한상공회의소 건물에서 ‘SR 26000’ 관련 교육 세미나가 열렸다. 이름은 ‘SR 26000 제정에 따른 기업의 대응방안’. SR 26000은 기업 등 각종 조직의 사회적 책임(social responsibility)과 관련해 국제적으로 논의가 진행 중인 또 하나의 국제표준화기구(ISO) 규격이다. 내년 10월께 국제 표준으로 제정될 예정이다. ISO에서 이미 제정한 대표적인 국제 규격인 ‘ISO 9000’(품질관리)과 ‘ISO 14000’(환경경영)에 이어,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관련한 새로운 표준 ‘ISO 26000’(통상 ‘SR 26000’으로 표기)을 도입·제정하는 움직임이 한창 일고 있는 것이다. SR 26000이 제정되면 이른바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않는 기업’은 자기 제품을 외국의 다른 기업·정부 등에 납품하기 어려워진다.

» 이제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않는 기업은 도태된다. 9월3일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SR 26000 제정에 따른 기업의 대응방안’ 세미나

이번 세미나는 한국품질보증원이 주관하고, 후원자는 지식경제부·한국표준협회·대한상공회의소, 주최자는 한국SR표준화포럼·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이었다. 그런데 세미나를 며칠 앞두고 한국품질보증원 쪽에 전화 연락이 왔다. 지식경제부 산하기관인 기술표준원에서였다. “후원자 명단에서 지식경제부와 표준협회를 빨리 빼라.” 갑작스런 일방 통보였다. 지식경제부는 왜 SR 26000 교육 세미나의 후원자 역할을 원치 않은 것일까?

이명박 정부 들어 논의 확산 차단

SR 26000 규격을 개발·제정하려는 움직임은 국제적으로 2005년부터 시작됐다. 국내에서도 2006년쯤부터 이에 대응해 노동·환경 분야 시민사회단체를 중심으로 한 이해관계자 그룹이 이 논의에 적극 참여하기 시작했다. 참여정부 당시 우리 정부도 SR 26000 도입을 둘러싼 국제적 흐름에 큰 관심을 갖고 기업이 발 빠르게 대응할 수 있도록 제반 여건을 조성하는 작업에 나섰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 들어 정부의 반응과 태도가 달라졌다. SR 논의가 경제·사회 분야에 확산되는 걸 점차 차단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와 관련해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이사장 김영호·전 산업자원부 장관) 관계자는 “참여정부에서는 공무원이 SR 제정 움직임에 상대적으로 많은 관심을 보였는데, 지금은 이 국제표준 도입을 기업 규제라고 생각해서인지 미온적이고 소극적인 태도로 돌아섰다”고 말했다. ‘비즈니스 프렌들리’ 정부이다 보니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둘러싼 논의에 거부 반응을 보인다는 얘기다.

이명박 정부가 SR 26000 논의에 대해 ‘귀 막고 입 닫고 있는’ 이유는 또 있다. SR 26000 도입에 관여하는 송준일 한국품질보증원 대표이사는 “이 논의가 확산될수록 노동·환경 등 시민사회단체의 힘과 목소리가 커질 가능성이 있는데, 이명박 정부가 이 점을 크게 걱정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송 대표는 또 “SR 26000 초안에 따르면, 노동조건을 지키지 않거나 환경에 악영향을 끼치거나 회삿돈을 빼돌리는 기업이 있을 경우 노동·인권·환경 단체 등이 이 기업의 물건을 납품받는 외국 업체에 이 사실을 적극적으로 알려서 시정하도록 촉구하는 과정이 수반된다”고 말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시민사회단체의 영향력이 커질 것이고, 현 정부가 이 점을 우려해 SR 26000 논의의 확산을 꺼리고 있다는 설명이다.

사실 다국적 기업들은 한국 기업이 사회적 책임에는 별로 기여하지 않으면서도 더 많은 비정규직과 더 적은 임금 등을 기반으로 한 가격 경쟁력을 앞세워 세계 시장에서 불공정거래를 하고 있다는 불만을 제기하고 있다. 송 이사는 “당장 내년에 제정될 국제적인 SR 26000 논의에 우리 기업이 빨리 대비하지 않으면 기업의 사회책임표준 제정 흐름에 끌려다니게 되고, 해외 기업이나 정부로부터 납품거래 계약 중단을 통보받는 사태가 곧 닥칠 수 있다”며 “우리 기업 스스로 큰 타격과 충격을 받지 않으려면 이 논의를 적극적으로 홍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기술표준원 “기업에서 선택할 일”

현 정부가 SR 26000 논의 확산을 차단하고 있다는 지적과 관련해 조영돈 기술표준원 공업연구관은 “SR 26000 표준안이 아직 최종적으로 정해진 건 아니다. 논의 과정에서 표준의 내용이 바뀌면 기업이 더 혼란스러워할 수 있다. 아직 방향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섣불리 홍보하고 기업을 상대로 교육하는 건 오히려 혼란만 가중할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국제 표준은 벌칙이나 제재 등 강제력이 수반되는 게 아니라 가이드라인 성격의 권고 사항일 뿐이다. SR 26000은 내용이 포괄적이어서 기업이 자율적으로 각자 처한 환경에 따라 선택적으로 적용하면 된다”고 말했다.

국제 SR 26000은 ISO에 가입한 140여 개국이 참여한 투표(1국 1표·한국 대표는 기술표준원)에서 위원회초안(CD)이 이미 통과됐고, 국제표준초안(DIS)은 만들어지고 있는 중이다. 내년에 작성될 최종표준안(FDIS)이 투표에서 승인되면 국제 규격으로 확정·공표된다.

‘SR 26000’ 주도하는 송준일 품질보증원 대표

“표준 어기는 기업은 시장에서 도태될 것”

» 송준일 품질보증원 대표
우리나라에서 ‘SR 26000’은 서울대 공대 출신의 ‘3인방’이 주도하고 있다. 송준일(80학번) 한국품질보증원 대표이사와 황상규(83학번) 전 환경운동연합 사무처장, 강충호(80학번) 한국노총 대변인이 그들이다. 송 대표는 ‘성장한계론자’이자 ‘붕괴대비론자’다. 대학 시절부터 세 사람이 얼굴을 트고 지낸 건 아니고, 2006년 국내에서 SR 26000이 논의되기 시작할 때부터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공통 관심사를 놓고 토론과 대화를 가져왔다고 한다. 환경 분야는 황 전 사무차장이, 노동 쪽은 강 대변인이, SR 26000 인증기관 쪽에서는 송 대표가 각각 실무작업반에 참여한 것이다.

애초에 국제적으로 SR 26000은 ‘CSR(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26000’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지속 가능한 사회를 위한 사회적 책임’을 실천하는 과제는 기업 조직뿐 아니라, 중앙 및 지방정부·노동단체·환경단체·비정부기구 등 각종 조직에 모두 해당된다는 의견이 대두됐다. 그래서 기업을 뜻하는 맨 앞 이니셜 ‘C’를 뺀 ‘SR’로 바뀌었다.

송 대표는 “인류 문명의 지속 가능성을 위해서는 정치권·산업계·소비자단체·노동계·인권단체 등 여러 집단이 다 같이 참여해 현재의 시스템을 변화시켜야 한다”며 “비정규직을 남용하거나 창업주 일가가 회삿돈을 횡령하거나 노조를 인정하지 않는 등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않는 기업에 대해서는 여러 사회단체가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제 <포천>이 선정한 ‘글로벌 포천 500’ 기업들은 이미 SR 26000을 지키겠다고 공표하고, 납품 협력업체에도 SR 26000을 준비하라고 통보하고 있다. 유럽의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그리고 정부 산하 공기업도 지속 가능한 개발을 위해 공헌하겠다며 SR 26000 규범 준수를 공표했다. 송 대표는 “앞으로 SR 26000 표준을 지키지 않는 기업은 점차 시장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다. 같은 품질과 같은 가격의 제품을 이 표준을 지키면서도 똑같이 만들어낼 기업이 세상에는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국제 규범은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않는 기업으로부터는 납품을 받지 않는” 일종의 비관세 무역장벽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송 대표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흐름에서 몇몇 다국적 기업은 자신들은 인권·노동조건·지역사회·환경 등에 기여하고 있는데, 한국 기업들은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서 자신들과 경쟁하고 있다고 불만을 제기한다”며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글로벌 스탠더드가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만큼 우리도 이런 흐름에 빨리 올라타야 한다”고 말했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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