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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프리즘] 보이지 않는 발

HERI 2011. 06. 27
조회수 5030

2009-04-23


전 정권과 가까웠던 기업체 회장이 여야를 가리지 않고 달러 비자금을 풀다 쇠고랑을 찼다. 한 신인 여배우는 ‘몸 로비’를 강요당했다는 고백을 남기고 목숨을 끊었다. 이들로부터 뇌물과 접대를 받은 이들의 ‘리스트’가 연일 새로운 버전으로 인터넷에 떠다니면서 세간이 뒤숭숭하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런 ‘뇌물·접대 스캔들’은 최근에 와서 빚어지는 일도, 우리 사회에서만 생기는 일도 아니다.

뇌물은 진화한다. 사과상자에 헌 돈을 담아 나르던 것에서, 요즘은 주식과 달러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됐다. 월간지 배달용 종이상자에 돈을 넣어 택배로 부치는 간 큰 뇌물공여 행태도 등장했다. 아파트를 제3자 명의로 통째로 건네받기도 하고, 시가를 가늠하기 힘든 고가의 그림도 오간다.

미국에서는 요즘 흥미로운 이슈가 논란이 되고 있다. 파산 위기에 빠진 금융사 경영진의 거액 보너스가 도마 위에 오른 뒤, 천문학적인 스톡옵션(주식 매수 선택권)도 일종의 ‘포괄적 뇌물’이 아니냐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스톡옵션=뇌물’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엔론 등 과거 회계 스캔들로 파산한 거대 기업들을 예로 든다. 거액의 스톡옵션이 전문경영인의 능력과 의욕을 끌어올리기보다는, 외려 이들을 불법적인 회계 조작과 로비 등 ‘부패 경영’, ‘뇌물 경영’으로 이끈다는 논리다. 주가에 목맨 단기성과주의가 기업의 지속 가능한 성장을 방해하고 기업을 파멸로 이끌 수 있다는 자성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뇌물과 로비는 종이 한 장 차이다. 기업들이 불법을 넘나드는 로비에 매달리는 것은, 최소의 투자로 최대의 이익을 창출하기 위한 일종의 투자라는 판단 때문이다. 기업들은 태생적으로 경쟁을 싫어한다. 남들과 경쟁하지 않고 쉽게 이익을 누리고 싶어하는 게 생리다. 독점적 특권이나 특혜를 따내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 만약 수억원의 뒷돈을 들여 수천억원의 이익이 보장되는 특혜나 특권을 따낼 수 있다면 ‘성공적이고 합리적인 투자’인 것이다.

기업이 정치적 특혜를 통해 경쟁을 피하고 이익을 누리려는 행위를 학자들은 ‘보이지 않는 발’이라고 꼬집는다. 고전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을 빗댄 것인데, 시장의 규칙(손)에 반하는 반칙(발)에 의존한다는 의미다. “보이지 않는 손은 더디게 움직이지만, 보이지 않는 발은 신속하다. 시장 참가자들의 공정한 경쟁은 배제되고, 이익은 소수에게 집중된다.”(이정전 서울대 명예교수)

우리처럼 정부가 각종 인허가권을 틀어쥐고 있는 구조에서는 기업들이 ‘손쉬운 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기회가 훨씬 더 많다. 성공 가능성이 불확실하고 위험 요인이 큰 투자보다는, 은밀한 뒷거래로 손쉽게 특혜와 특권을 따내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는 얘기다. 다른 나라에서 찾아보기 힘든 기밀비·접대비·비자금 등의 존재가 이를 방증한다. 우리 기업들이 접대비로 쓰는 돈은 한 해에만 6조~7조원에 이른다. 합법적인 비용이 그 정도이니, 비자금 등을 이용한 뒷거래 규모는 짐작하기 어렵다.

역설적이게도 시장주의를 주창하는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보이지 않는 손’보다는 ‘보이지 않는 발’의 위세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 특정 기업이 서울 도심에 초고층 빌딩을 지을 수 있게 군용 비행장의 활주로를 뜯어고치겠다고 하고, 재벌 그룹이 금융업과 제조업을 동시에 지배할 수 없도록 한 방화벽도 허물겠다고 한다. 정부가 노골적으로 ‘보이는 주먹’을 휘두르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는 까닭이다.

김회승 산업팀 기자hon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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