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뉴스
2009-04-23
» 정다연(왼쪽) 양과 정수련 양은 동아리 활동을 통해 성적이 아니라 정신적 성숙이 테마가 되는 고교시절을 보냈다.

순천 제일고 독서논술토론동아리 ‘혜윰’

새학기, 학생들은 누구나 성적 향상의 꿈을 꾼다. 대입을 코앞에 둔 고교생들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내신과 수능 한 등급을 올리기 위해 각종 학습법을 섭렵하고 토막잠으로 밤을 지샌다. 공부, 공부, 공부 …. 오로지 공부만이 고교 시절을 도배한다. 대개의 학생들한테 고교 시절은 대학 간판을 바꾸는 과정에 불과하다.

정다연(19·국민대 법학부)양과 정수련(18·서울교대)양한테는 달랐다. 이들은 전남 순천 제일고에서 보낸 고교 시절을 통해 대학 간판뿐만 아니라 인생을 바꿨다. 정수련양은 고교 시절을 헤르만 헤세 <데미안>의 표현을 빌려 “알을 깨는 과정이었다”고 말한다.

» 정다연 양
다연양은 고교 1학년이던 2006년 겨울, 심한 우울증을 앓았다. 친구들과 1, 2점을 놓고 경쟁해야 하는 현실을 견딜 수가 없었다. “2006년 겨울에 두 달 정도 학교 기숙사 생활을 했어요. 잠도 같이 자고 야자도 같이 했죠. 한 친구가 고3 선배한테 어려운 윤리 문제 풀이를 부탁했는데 우연히 제가 대신 그 풀이를 친구한테 전달해 주게 됐어요. 친구는 제가 그 풀이를 봐서 아까운듯 했고 다른 친구들한테는 절대 퍼뜨리지 말라고 당부했죠.” 그 일이 있은 얼마 뒤 기숙사를 나왔다. 아무도 모르게 스스로 목숨을 끊을 계획을 세울 정도로 스트레스는 심각했다.

● 정다연

“1~2점 놓고 경쟁하는 현실 너무 싫었죠…동아리 직접 만들며 경영컨설턴트 꿈 찾아”

그랬던 그가 고교를 졸업한 지금, 경영컨설턴트가 돼 사회적 기업을 세우겠다는 포부에 부풀어 있다. 유명한 경영학자들이 공법 전공자라는 것을 알고는 법학을 선택해 국민대 법학부 새내기가 됐다. 3월부터는 40~50대가 주류인 ‘피터 드러커 스터디 그룹’의 막내 회원이 된다. “<피터 드러커와 유비쿼터스 시이오(CEO)>라는 책을 읽었는데 그 대표가 모임을 하더라고요. 바로 전화를 했어요. 20살이라고 하니까 깜짝 놀라던데요.” 서울에서 모임이 열리는 터라 순천에서 벼르고 별러 왔다. 대안적 사회적 기업을 찾는 대학생 연합 동아리 ‘넥스터스’ 활동도 찜해놨다.

정다연양의 인생을 바꾼 것은 동아리였다. 그는 2학년 10월에 독서논술토론 동아리 ‘혜윰’(생각하다는 뜻의 고어 ‘혜다’의 고어)을 창단했다. “힘든 시기에 책을 많이 읽었어요. 그러다 부산 인디고서원에 대한 책을 읽게 됐죠. 같이 책 읽고 토론하고 글을 쓰는 게 정말 부러웠어요. 우리도 그런 교육의 기회를 누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창단선언문과 가입신청서를 손수 만들고 뜻이 맞는 친구를 직접 접촉했다. 다연양과 수련양은 혜윰을 통해 만났다.

» 정수련 양
정수련양한테 혜윰은 “공부만 하던, 공부만 할 수밖에 없었던 정수련이라는 인간이 자신의 정체성과 능력을 제대로 알고 스스로를 믿게 된 계기”였다. “1학년 때는 집안 사정이 갑자기 안 좋아져서 열심히 사시는 부모님 생각하면 단 한순간도 놀 수 없었어요. 친구들과도 어울리지 않고 공부만 했죠. 혜윰을 안 만났으면 맹목적으로 공부만 하는 전형적인 고등학생이 됐을 것 같아요.” 정다연양을 비롯해 다른 세 친구와 매주 월요일 점심시간에 모여 30분 동안 마음껏 토론을 하고 나면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문학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 등과 같은 철학적인 주제나 ‘사라진 국보 1호 누구의 책임인가’, ‘사이버상의 민주주의’ 등의 시사 문제를 두고 모두 28번의 토론이 매주 열렸다.

몇몇 교사들은 내신과 수능 1등급대를 유지하는 수련양이 혜윰 활동을 하는 것을 만류하기도 했다. 공부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였다. 실제로 ‘시카고 학파와 케인스 학파’에 대한 첫 토론을 시작할 때가 2007년 12월 17일, 입시경쟁이 치열해지는 고교 2학년 겨울방학이었다. 마지막 토론 ‘아동 성범죄자 화학적 치료에 대한 찬반’은 수시 2학기 모집이 코앞에 다가온 9월 20일이었다.

● 정수련

“공부만 하던 내게 정체성 찾아준 ‘혜윰’…평생 한 직업 싫은데 뭐든 이룰 수 있을것”

성적이 흔들린 것도 사실이다. 내신 등급 0.1점 차이로 서울대 지역균형선발에 원서 낼 자격을 못 얻었다. 그래도 두 학생은 혜윰을 지킬 수 있었다. 임명희(37) 교사의 전폭적인 지지 덕이었다. 정다연양이 인디고서원과 같은 토론모임을 만들고 싶다고 했을 때 그는 선뜻 지도교사를 맡았다. 교사들이 논술 교육을 연구하는 독서논술반을 모임 공간으로 내줬다. 토론과 글쓰기 대회 정보를 수시로 제공했다. 혜윰 창단 뒤 반년 동안 서울·정읍·광주 등에서 열린 전국 규모의 청소년 논술 토론대회에 참여한 게 세 차례다. 임 교사는 동료 교사들과 교사논술 동아리를 꾸려 최우수 교사 동아리로 교육부상을 받을 만큼 논술 교육에 남다른 열의가 있었다. “원래 특기가 있는 학생들은 교사가 살려줘야 한다는 게 임용 첫해부터 지닌 소신이었어요. 다연이나 수련이나 2학년에 맡아 수업하면서 눈여겨봤죠.”

성적이나 점수로 드러나지 않는 제자들의 잠재력을 알아본 학교 교사가 있었기에 두 학생은 질풍노도의 시기를 만끽했다. 다연양은 ‘내가 실천할 수 있는, 세상을 가장 따뜻하게 하는 방법’에 대해 토론한 뒤 ‘초콜릿 시위’를 벌였다. 초콜릿 안에 사람들한테 행복을 주는 문구를 쓴 종이를 넣어 대형마트 앞에서 나눠줬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좋은일’ 한다며 격려해 주신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뿌듯하다.

공부에만 매달렸다면 상위권대에 진학할 수도 있었을텐데 후회스럽지는 않을까. 수련양은 서울교대 수시모집으로 합격했다. 재수할 생각은 전혀 없다. “우리 사회는 평생 한 직업만을 가지도록 강요하는데 저는 여러 직업을 경험하고 싶어요. 범죄 쪽에 관심이 많은데 연쇄살인범들 가운데는 어린 시절 무시와 차별의 상처가 크대요. 초교 교사는 그런 면에서 의미가 있을 것 같고요. 역사드라마를 연출하는 프로듀서나 범죄심리 분석가도 되고 싶은데 제가 원하면 언제든 이룰 수 있다고 믿어요.” 다연양은 대학 새내기가 된 지금, 홍대에서 온몸에 붕대를 감고 반전시위를 할 계획에 설레고 있다.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믿는 자기 확신과 자기 긍정의 힘, 두 학생이 고교 시절에 얻은 인생의 ‘자본’이다.

글·사진 진명선 기자 ed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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