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뉴스
2008-04-02 

내가 술김에 하는 이야기인데, 요즘 같아서는 정말 회사를 그만두고 싶어. 너무 부끄러워!” 
유난히도 춥던 지난 겨울 어느날, 어느 포장마차에서였지요. 소주 한 잔을 들이킨 뒤 형은 푸념했지요. 귀를 의심했답니다. 늘 삼성인이었던, 타고난 삼성인 같던 형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으니까요. 

앞뒤 사정을 한참 듣고서야 고개를 끄덕이게 됐지요. 업무상 꼭 필요한 자료만 컴퓨터 하드드라이브에서 휴대용으로 옮겨 보관하라더니, 원래 있던 컴퓨터 하드드라이브는 아예 떼어가 버렸다고요? 압수수색에 대비해 다 같이 ‘연습’까지 했다고요? 자료를 잔뜩 저장해 두었던 사내 전산망 ‘싱글’의 메일 저장함을 예고없이 막아, 개인적인 전자우편까지 잃어 버렸다고요? 현장에서 묵묵히 일만 하던 형 같은 사람에게까지 그런 일이 벌어졌다고요? 

제게도 충격적인 이야기들이었으니, 삼성을 누구보다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형에게는 더 그랬겠지요. 차명계좌니 떡값이니 하는 단어들이 연이어 형의 머리를 가득 채웠겠지요. 사내방송에서는 특집을 편성해 삼성인의 자랑스러움을 떠들어대지만, 모두 부끄러움을 싣고 귓속을 맴돌았겠지요. 

문득 옛일이 생각났습니다. 형은 늘 삼성이 자랑스럽다고 했지요. 무엇보다도 깨끗한 기업이라 마음에 든다고 했어요. 높은 사람도 낮은 사람도, 뇌물을 주지도 받지도 않는다고요. 저는 삼성이 부끄럽다고 했어요. 불합리한 지배구조, 협력업체에 대한 횡포 같은 말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늘어놓았었던 것 같습니다. 

좀 늦었지만 고백할게요. 사실 제 마음은 흔들렸답니다. 유학을 가서야 발견한, 미국의 심장이라는 타임스스퀘어 한복판의 삼성 광고판 때문이었지요. 하버드대의 거대한 홀을 꽉 채운 세계 최고학부 학생들을 대상으로 열린, 삼성전자 사장의 특강 때문이었지요. 가전 전문 매장인 ‘베스트 바이’에 놓인 삼성 제품 때문이었지요. 자랑스러운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유학을 마치고 나서, 저도 삼성에 몸을 담았지요. 그때 다시 한번 삼성의 힘을 느꼈답니다. 외부로부터 부러움의 시선을 받으며, 처음 접촉하는 외국의 유력 기관에서도 바로 날아오는 호의적인 답을 보면서, ‘삼성’이라는 브랜드가 가진 힘을 실감했지요. 

눈시울이 시큰해 옵니다. 특검은 어떻게든 결론이 나겠지요. 인사이동이 생길 테고 회오리가 몰아치겠지만, 금세 다들 자리를 잡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상으로 돌아오겠지요. 하지만 가장 자랑스러워하던 이름을 부끄러워하게 된, 형 마음의 상처는 무엇이 달래줄 수 있을까요? 삼성인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시 신나게 일할 수 있을까요? 

그날 밤 형의 표정이 너무 심각해서, 저는 말없이 차가운 술잔만 만지작거렸지요. 그때 차마 못했던 말을 지금 전하려 합니다.

그만두겠다는 생각을 제발 거두세요. 할 수 있다면, 마지막까지 남아서 삼성을 지켜 주세요. 그리고 삼성에 자랑스러움을 돌려 주세요. 삼성인의 상처를 아물게 하는 방법은, 형이 알던 ‘깨끗한 기업’을 다시 만드는 길밖에 없습니다. 어차피 타임스스퀘어의 자랑스러움을 일군 것은, 형같이 평범한 삼성인들이지요. 자랑스러움을 되돌려줄 사람도 형뿐입니다. 이를 악물고 싸워 ‘깨끗한 삼성’을 되찾아 주세요. 형의 상처를, 그리고 제 마음의 상처까지도 어루만질 유일한 방법입니다.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들이 삼성을 이끌어야 합니다. 그래야 삼성은 우리 마음속에, 결국 자랑스러운 이름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삼성인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변명입니다. 


이원재/한겨레경제연구소장 timelas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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