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뉴스
일본 고베, 한국 경주·안산 마을활동가들
“자발적 시민 모임이 근본적 재생 열쇠”
우쓰미 겐이치가 주도해 만든 일본 고베 나다구 동네 마라톤은 1000명 이상이 찾는 나다구 명물이 됐다. 시에 신고한 공식 행사가 아니라서 교통 신호를 지키고 시간도 참가자가 각자 재면서 공원이나 하천, 언덕 등 마을 구석구석을 달린다. 코스 곳곳에서 주민들이 다과는 물론 술까지 제공한다. 콘셉트는 “힘들면 그만둬라”다. 스스로 살아가는 힘을 기르고 마을을 알아가되 복구에 대한 지나친 부담감은 해소하기 위해서다. 우쓰미 겐이치 제공
우쓰미 겐이치가 주도해 만든 일본 고베 나다구 동네 마라톤은 1000명 이상이 찾는 나다구 명물이 됐다. 시에 신고한 공식 행사가 아니라서 교통 신호를 지키고 시간도 참가자가 각자 재면서 공원이나 하천, 언덕 등 마을 구석구석을 달린다. 코스 곳곳에서 주민들이 다과는 물론 술까지 제공한다. 콘셉트는 “힘들면 그만둬라”다. 스스로 살아가는 힘을 기르고 마을을 알아가되 복구에 대한 지나친 부담감은 해소하기 위해서다. 우쓰미 겐이치 제공

일본 고베, 경기 안산, 경북 경주. 양상과 규모는 다르지만 세 곳 모두 지역사회를 뿌리째 흔들어놓은 큰 재난을 겪었다. 1995년 1월 고베에선 대지진으로 약 6400명이 숨지고 25만채 이상의 건물이 무너져내렸다. 경주에선 2016년 9월 규모 5.8의 지진과 640여 차례의 여진으로 일상이 파괴됐고, 안산은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를 겪었다.

중요한 건, 이런 재난을 겪은 뒤 상처를 치유하고 지역을 재건하기 위한 자발적인 시민 모임이 생겨났다는 점이다. 자발적 시민 모임을 주도한 마을활동가들을 초청해 재난을 극복하려면 시민사회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조망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지난달 25일 한겨레신문사 청암홀에서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과 사단법인 씨즈가 공동주관해 열린 ‘지역 시민사회와 재난 복구’ 포럼이다.

20년 이상 고베 나다구에서 재건 활동을 해온 우쓰미 겐이치는 ‘마을 만들기’가 아닌 ‘마을에서 놀기’가 자신의 신념이라고 소개했다. “어디에 누가 사는지 잘 아는 주민들이 지진 당시 많은 사람들을 구했다. 그런데 ‘재건을 위한 마을 만들기’가 시작되자 보상 방법과 순서를 두고 갈등이 깊어지면서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이를 조정하던 활동가가 스트레스로 병에 걸리기까지 했다.” 우쓰미가 ‘마을에서 놀기’를 시작하게 된 계기다. 디자인 사무소를 운영하는 그는 마을 활동을 위해 별도로 조직을 꾸리거나 직함을 만들지 않았다. 그 대신 시내버스에 무작정 올라타 게릴라 음악회, 관광 안내를 했다. 마을 추억 여행, 소식지 발간, 낮은 굴다리를 ‘림보 문’으로 이름짓고 연 림보 대회 등을 통해 마을 사람들이 자주 웃으며 만나도록 했다. 모인 주민들은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재건 후 마을’에 대한 상상을 내놓았는데, 이를 지방정부가 받아들이기도 했다. 나다구와 함께 개최한 ‘산꼭대기 맥주 파티’가 대표적이다.

한국에서는 어떨까. 안산과 경주에서도 자발적으로 치유의 장을 열어가는 시민 공동체가 큰 몫을 하고 있다. 안산에서는 세월호 참사 치유회복공간 ‘힐링센터 0416 쉼과 힘’이 활동 중이다. 임남희 사무국장은 “세월호 이후 안산에서 힐링이나 재미를 말하는 것은 금기였지만, 이런 활동은 아픔을 공동체성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꼭 필요했다”고 말했다. 참사 5개월 뒤인 2014년 9월 개소한 센터는 유가족 합창단을 조직하고, 자수 놓기나 밥 같이 먹기 같은 모임을 열었다. 합동분향소부터 센터까지 이어지는 ‘단원소생길’, 희생 학생 양온유양의 이름을 딴 ‘온유의 뜰’도 조성했다. 이들의 목표는 단원고가 있는 고잔동이 ‘공동체’, ‘안전과 생명의 성지’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러려면 참사 진상 규명과 함께 서로의 마음을 보듬고 지지하는 끈끈한 관계망이 필수다. 상처를 치유하고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나가는 긴 여정에 지치지 않으려면 공동체의 단결도 중요하지만, 개인이 상처나 피로에 쓰러지지 않아야 한다. 임 사무국장은 “과정의 재미, 그리고 개인 존중은 정말 중요하다”며 우쓰미의 ‘마을놀이’에 크게 공감을 표했다.

아이쿱생협은 경주 지진 이후 지역 조합원들을 상대로 재난 대처법을 교육하고 심리 지원 프로그램을 진행했는데, 인접한 포항에서 지진이 나자 교육을 받은 조합원들이 포항으로 달려가 자원봉사를 했다. 안전에 관심이 많고 지역 문제 해결에 참여할 의지가 있는 생협 조합원의 특성 덕분에 쉽게 힘을 모을 수 있었다. “흔들리는 집이 무섭고 싫었는데, 대응 교육을 받고 불안을 나누니 훨씬 나아졌다”는 게 교육에 참여했던 조합원의 소감이다. 정미정 경주아이쿱생협 이사장은 “협동과 참여의 원칙이 있을 뿐 아니라 자체적으로 자금과 물품 조달까지 가능한 협동조합이 재난 상황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 고베시처럼 지방정부가 인정하는 게 아니라 생협이 자발적으로 하는 활동인데, 이웃 돌보기, 마음 살피기 등 정부 주도로는 어려운 일들”이라고 말했다.

‘힐링센터 0416 쉼과 힘’에서 활동하고 있는 세월호 유가족이 마을공동체의 역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는 “처음엔 이웃의 눈길만으로도 아프고 절망스러웠지만 서로 꽃을 나누는 사이가 되며 나아졌다”며 시민의 지속적 관심과 참여를 당부했다.
‘힐링센터 0416 쉼과 힘’에서 활동하고 있는 세월호 유가족이 마을공동체의 역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는 “처음엔 이웃의 눈길만으로도 아프고 절망스러웠지만 서로 꽃을 나누는 사이가 되며 나아졌다”며 시민의 지속적 관심과 참여를 당부했다.

국내에도 이런 자발적 활동의 가치를 인정하고 지원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게 이들의 생각이다. 고베시는 2015년 지진 20년을 맞이해 재건에 기여한 시민 75명을 선정해 <비 고베>(BE KOBE)라는 책을 펴냈는데, 우쓰미는 여기서 ‘마을에서 놀기 장인’으로 소개됐다. ‘지역 공동체’를 재난 복구의 핵심으로 여기는 고베시는 그의 활동을 단순한 괴짜들의 장난으로 보지 않았던 것이다. <비 고베>가 소개한 복구에 기여한 시민에는 사회적 기업가, 시민단체 활동가도 있지만 엄마, 빵집 주인 등 고베를 지켜온 일반 시민도 다수 포함됐다. 고베시는 또, 우쓰미의 방식과 비슷한 ‘나다구의 좋은 점 100가지 찾기’ 등을 마을 사업으로 추진하며 그를 위원으로 모셨다. 우쓰미는 “마을 만들기는 사람들이 동네를 좋아하며 즐겁게 살 때 나타나는 결과일 뿐 마을 만들기 사업을 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임남희 사무국장은 “안산에서도 재난 후 마을의 역할을 절감했다. 처음엔 시민 모금으로 시작했지만, 올해는 안산시로부터 2억원을 지원받기로 약속받았다. 고베시처럼 자유로운 시민 활동에 대한 공감이 점차 커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박선하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시민경제센터 연구원 sona@hani.co.kr

한겨레에서 보기:
서비스 선택
댓글
로그인해주세요.
profile image
powered by SocialXE
List of Articles

평창올림픽이 우리사회에 남긴 유산은?

한림대 일본학연구소 주최 ’포스트올림픽 포럼’ 평창올림픽의 가장 위대한 유산은 ’평화’ 사후시설활용과 환경파괴는 풀어야할 숙제 강릉KTX로 인구 이탈 현상 보수적인 영동 지역의 정치사회적 의식 변화도 기대돼 평창동계올림...

  • HERI
  • 2018.07.10
  • 조회수 3237

가지지 않아도 주인 되는 ‘공동체 아파트’…주거 패러다임 바꿀까

협동조합형 공공지원 민간임대주택 ‘위스테이’ 지난달 견본주택 열고 입주 조합원 모집 시작 사회적기업 건설·운영 주관, 낮은 임대료 장점 아파트 공동체 운영하고 지역사회에 기여까지 지난달 28일 서울 명동에서 열린 위스테...

  • HERI
  • 2018.07.09
  • 조회수 3319

“사회적경제? 경제에 대한 사회의 통제력을 되찾는 일”

‘2018 사회적경제 국제포럼’ 현장중계 포용성장의 동력으로 사회적경제 강조 “미래 비즈니스 모델은 ‘참여적 기업’” 전망 “지방분권은 지역밀착 사회적경제에 기회” 지난 15일 오후 고용노동부가 주최하고 한국사회적기업진흥원...

  • HERI
  • 2018.06.26
  • 조회수 3355

"소득주도성장, 외연 확장해 지속적으로 추구해야"

’소득주도성장과 남북경협’ 세미나 “한국 경제 패러다임 바꾸는 과정… 시행 1년 만에 성패 판단하는 건 무리” 18일 한국사회경제학회 등의 주최로 서울 명동 유네스코회관에서 ’소득주도성장과 남북경협: 패러다임 혁신은 가능...

  • admin
  • 2018.06.22
  • 조회수 2827

가난한 이들이 투표장에 안가는 이유는

한국정치학회-한겨레경제사회연 공동기획조사 소득·계층에 따른 투표참여 의향 등 격차 뚜렷 명함 등 정치정보에 노출된 집단일수록 후보자 정보 많고 투표 의향도 높아 후보가 일상적으로 정책 홍보하게 선거법 개정 필요 6·13 지...

  • HERI
  • 2018.06.19
  • 조회수 3068

“처음 하는 정치니까 오히려 좋은 것만 배울 수 있죠”

[도전 6·13―여성과 청년, 생활정치를 바꾼다] ⑥김선효 민주평화당 전북 전주 시의원 후보 잘나가던 쇼핑몰 대표에서 정치인으로 취업도 창업도 맘대로 안 풀리는 막막한 청년 현실 겪어보니 ‘정치가 해결책’ 기성정치가 외면...

  • HERI
  • 2018.06.12
  • 조회수 3353

집 가진 사람이 지방선거 관심·투표의지 높다

관심도·투표의향·선거정보 습득 등 소유자, 비소유자보다 10~15%p 높아 월소득·자산 많을 수록 경향 심화 “정치정보 얻기 쉬게 해 투표 늘려야” 집을 가진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6·13 지방선거에 관심이 높고, 투표에 ...

  • HERI
  • 2018.06.12
  • 조회수 3434

“1만2천여 구민 뜻 모은 ‘마더센터’ 설립, 끝까지 책임져야죠”

[도전 6·13―여성과 청년, 생활정치를 바꾼다] ⑤김한영 민중당 서울 관악구 구의원 후보 부모·아이 함께 편히 놀 공간 구청이 직접 만들어 운영하는 ‘마더센터 설치 조례’ 서명운동 주도 그 노력 물거품 될까 직접 출마까지...

  • HERI
  • 2018.06.12
  • 조회수 2976

“우리가 지켜보고 있다”…6·13 정책선거 불씨는 꺼지지 않아

6·13 제7회 전국동시 지방선거 코 앞에 유권자 공약 제안하고 후보자는 실천 약속 후보자 거짓말 응징하는 매니페스토 운동 지역에너지전환 매니페스토 협약식, 사회적경제 매니페스토 협약식 등 시민사회단체·사회적경제 참여 활발...

  • HERI
  • 2018.06.08
  • 조회수 3051

“가난한 나라에 학교와 병원 중 하나만 지을 수 있다면, 당신은?”

‘글로벌 사회혁신 세미나’ 지상중계 개발협력 활동가들 모여 ‘진짜 혁신’ 토론 오해와 고정관념 벗어나자는 반성의 자리 “‘누군가의 삶 정말 나아지게 했나’ 되묻고 ‘방식’이 아니라 ‘태도’의 진정성 고민해야” 지난달 ...

  • HERI
  • 2018.06.08
  • 조회수 3428

삶이 있는 마을에서 길어 올린 일상예술

파주 교하도서관의 <마을에서 예술하다> 전 이웃으로 촘촘히 엮인 인연으로 만든 전시 전업 작가들은 초심으로 되돌아가고 일반인들은 내 일상에서 예술 찾는 기쁨을… 전시관 입구에 마련된 세부 전시 제목과 작가 소개. 모든 ...

  • HERI
  • 2018.06.08
  • 조회수 3663

경험에서 우러난 ’진짜’ 청년 일자리 대책, 들어보실래요?

'전지적 청년 시점으로 제안하는 청년 일자리 대책’ 토론회 채용시장 현실 모르는 정책 담당자 노동조건 개선 없는 임금 지원 등 실제 청년 취업·노동엔 도움 안돼 ‘양질의 일자리’ 되게 유도하고 고용보험 확대 적용 등도...

  • admin
  • 2018.05.31
  • 조회수 3168

“‘노동자 출신 여성 시장’은 부산 정치패러다임의 변화 상징”

[도전 6·13―여성과 청년, 생활정치를 바꾼다] ④박주미 정의당 부산시장 후보 진학 대신 ‘공순이’로 보낸 청소년기 20대 초반 우연히 들은 야학에서 “노동은 부끄럽지 않다” 깨달아 “당선되면 노동부시장제 도입해 부산을 ...

  • HERI
  • 2018.05.29
  • 조회수 2870

“갈수록 높아지는 계층 장벽…시장주도 성장과 포용 정치로 풀어야”

‘장벽사회 대한민국-실태와 해법’ 토론회 “격차 큰 사회에서 장벽 넘을 수 없는 사회로 변화 교육·노동시장, 상속자본, 기득권 카르텔의 장벽이 불평등 심화·확대…성장·연대·평등·사회혁신 필요” “사회경제적 약자 대표하는 정...

  • admin
  • 2018.05.28
  • 조회수 3223

“옳은 말보다 필요한 건 주민 곁에 있는 것”

[도전 6·13―여성과 청년, 생활정치를 바꾼다] ③ 이향희 노동당 울산 중구 구의원 후보 두 차례 국회의원 선거 낙선 뒤 “와닿지 않는 구호 외치는 대신 옆에서 일하는 사람 돼야” 깨닫고 동네 골목 누비며 ‘주민 속으로...

  • HERI
  • 2018.05.28
  • 조회수 2981

우리가 언제 제대로 놀아봤다고! 6·13에 나타난 ‘놀 자유’

도전 6·13 ― 여성과 청년, 생활정치를 바꾼다 ② 이재헌 우리미래 청주시의원 예비후보 독특한 선거운동 방식으로 자신을 알리고 있는 이재헌 우리미래 충북 청주시의원 예비후보. 이재헌 예비후보 제공 “일해야지, 정규직 돼야...

  • HERI
  • 2018.05.23
  • 조회수 2957

사회적경제기업-중소기업 포용성장 ‘한 식구’

중소기업주간 사회적 경제 축제 열려 주류 경제조직으로서 역할 자리매김 신보, 사회적 금융 ‘마중물’ 역할 금융에 인간적·사회적 가치 담아 지난 15일 오후 2시 서울 마포구 서울가든호텔에서 신용보증기금 주최로 ‘사회적 경...

  • HERI
  • 2018.05.23
  • 조회수 3164

“평양냉면 받고 양념치킨 주자”…‘젊은것들’의 발랄한 평화 그리기

평화교육 시민단체 ‘피스모모’ 주최 2030 청년들의 ‘남북과 평화’ 이야기 ‘젊은것들’의 발랄한 상상마당 펼쳐져 “평화란 무언가 거대한 게 아니라 결국 사람들이 만나는 일 아닐까” 지난 4일 서울시 청년허브에서 열린 '...

  • HERI
  • 2018.05.23
  • 조회수 3251

시민 종잣돈으로 탄생한 청년들의 든든한 삶터

시민들의 자발적인 출자기금 토대로 사회투자지원재단이 청년들에 보증금 지원 청년주택 ‘터무늬있는 집’ 1호점 열어 올해 서울·경기 2·3호점 오픈 목표 서울 강북구 번동 신한주택 옥상에서 열린 ‘터무늬있는 집’ 1호점 집들...

  • HERI
  • 2018.05.23
  • 조회수 2772

대학가는 지금…‘사회혁신의 요람’으로 진화 중

[더 나은 사회] 사회혁신 역량 개발 프로그램 줄이어 ‘아쇼카 U 체인지메이커 캠퍼스’ 등 글로벌 네트워크 구성 움직임 활발 기업들도 혁신 생태계 지원에 적극적 지난해 9월 신촌 연세로에서 열린 ‘IF 페스티벌'에 한양여...

  • HERI
  • 2018.05.23
  • 조회수 3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