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과 포용’ 현장을 가다
③ 영국의 고민

디지털 자본주의화 진행으로
‘0시간 계약’ 등 플랫폼노동 늘어
저임금 불안정노동도 확대일로

‘좋은 일자리 계획’ 등 대책 논의
“근본 해법 되기엔 한계” 지적
생산성 정체·불평등 확대도 난제
택배회사를 찾아온 리키는 의욕이 충만하여 택배회사의 ‘파트너’가 된다. 2년 안에 집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돌봄노동자인 아내의 차를 팔고 빚을 얻어 택배 트럭을 구입한다. 리키는 하루 14시간 매주 6일 일을 하고, 아내인 아비는 일주일에 3일 저녁만 집에 있을 정도로 두 사람은 열심히 일을 한다. 하지만 두 아이와 함께하는 그들의 삶은 더욱 힘들어져 간다. 어느 날 밤 리키는 “사는 게 이렇게 힘들지 몰랐어”라며 아비에게 푸념한다. 그러자 아비는 이렇게 말한다. “난 악몽을 꿔. 모래 속에 빠졌는데, 우리가 애를 쓰고 발버둥칠수록 커다란 구덩이로 점점 더 빨려 들어가….” 켄 로치의 2019년 영화 <미안해요 리키>는 디지털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평범한 가족의 일상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이 두 사람은 디지털 자본주의에서 가장 전형적인 근로를 하고 있다. 돌봄노동자인 아비는 현재 영국 노동시장에서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0시간 계약’ 근로자이다. 0시간 계약근로란 특정하게 근로시간을 정해두지 않고 고용주의 필요와 사정에 따라 노동자를 호출해서 노동을 제공받고 이에 따라 임금을 제공하는 계약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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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미안해요 리키>의 스틸 이미지. 사진 출처: 네이버
영국 통계청에 따르면 0시간 근로자는 2004년에 10만명 수준이었지만, 2018년에는 약 90만명으로 전체 노동인구의 약 3%를 차지하고 있다. 택배기사인 리키는 자영업자이지만, 딸을 트럭에 태우거나 하루를 쉴 수 있는 자유가 없는 종속된 자영업자이다. 프란차이즈의 파트너로서 지켜야 할 의무와 이에 따른 벌금이 기다린다. 이러한 ‘가짜’ 자영업의 증가로 인해서 영국의 자영업 비중은 계속 상승 중이다. 2000년에 330만명(전체 노동인구 중 12%)이던 자영업자 수는 2019년에 480만명(15.1%)으로 꾸준히 상승하고 있다. 이에 더해 영국노동조합은 2019년 플랫폼노동에 종사하는 이들이 거의 5백만명에 이르며, 3년 사이에 두 배 이상 증가했다고 보고하기도 하였다.

0시간 계약 노동자 수. 자료: 영국 통계청
0시간 계약 노동자 수. 자료: 영국 통계청

디지털 경제로의 변화가 노동시장 일자리를 없애는 방향으로 가고 있지는 않다. 2020년 2월 기준 고용률은 76.6%로 1971년 조사 시작 이래로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하고 있다. 같은 기간에 실업률은 4%를 기록했다. 이는 2011년 8.5% 이래로 가장 낮은 수치이다. 실업 관련 급여를 신청한 이들은 130만명이었으며, 구직을 하는 일자리 수는 79만5000명으로 가장 적었다.


문제는 일자리의 질, 즉 불안정성의 증가에 있다. 이러한 노동의 가장 큰 문제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는 경제적으로 취약한 집단이라는 것이다. 영국 통계청의 2016년 자료에 따르면 피고용인들의 주된 주당 임금은 400파운드(64만원) 정도였지만, 자영업자의 임금은 240파운드(38만원)로 상당히 낮았다. 영국노동조합(TUC)의 2018년 연구에 따르면 자영업자의 반 정도가 최저임금도 받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하지만 경제적 문제가 다가 아니다. 다른 문제는 자신의 삶에 대한 자율적 통제력이 없다는 것이다. 영화 <기생충>의 언어로 하면 자신의 삶을 ‘계획’할 수 없다는 것이다. 0시간 근로를 하는 이들은 1주일을 넘는 계획을 하기가 쉽지 않고, 종속된 자영업자들도 역시 그러하다. 안정된 휴가를 계획하는 것이 어려운 것은 물론이고, 가족들과의 저녁이 있는 삶도 쉽지 않다. 리키와 아비가 두 아이들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는 것은 불안정이 침투한 가족의 모습이다. 참고로 영국은 OECD에서 31번째로 평등수준이 낮은 국가이다(한국은 30번째이다).


2016년 피고용인과 자영업의 주당 소득 분포(단위: 파운드). 자료: 영국통계청
2016년 피고용인과 자영업의 주당 소득 분포(단위: 파운드). 자료: 영국통계청

그렇다면 영국의 대안은 무엇일까? 지난 4년 정도를 브렉시트(Brexit, 유럽연합탈퇴) 문제로 신음하고 있는 영국에도 눈에 띄는 정책 논의들이 존재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Good Work Plan(좋은 일자리 계획)’이다. 이 계획은 보수당의 테레사 메이 총리가 신노동당 블레어 내각에서 정책실장을 지냈고 현재 왕립예술경제원의 원장인 매튜 테일러에게 영국 노동시장에 대한 전반적 검토를 부탁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테일러 보고서’가 출판되었고, 이를 반영한 좋은 일자리 계획이 보수당에 의해서 2018년에 발표되었다.

매튜 테일러 왕립예술경제원장
매튜 테일러 왕립예술경제원장

이 계획의 핵심 정책방향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한 달 이상 일할 때만 가질 수 있었던 계약서를 모든 노동자들이 하루라도 일을 하게 되면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둘째, 0시간 근로계약을 없애지는 않았지만, 같은 고용주와 26주 동안 계약이 되어 있는 경우 더 안정적인 근로시간을 요구할 수 있게 하였다. 이외에도 종사상 지위를 명확히 하고, 휴가급여에 대한 계산 방법 개선하고, 팁을 고용주가 가져갈 수 없게 하는 등 테일러 보고서를 받아들여 다양한 개정을 약속하였다. 이러한 대책이 노동의 변화를 대비하기에 충분할까?

지난 1월에 만났던 매튜 테일러 원장은 이 보고서가 고용 문제에만 한정되었기 때문에 충분한 대안이 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고 말했다. 영국노동조합의 사회경제국 케이트 벨 국장은 문제를 풀기에는 너무 약한 대안들이라고 비판하기도 하였고, 바스대학의 닉 피어스 정책연구소 소장은 고용주는 너무 경직이라고 생각하고, 노동자에게는 충분하지 않은, 모두를 만족시키기 어려운 해법이었다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벨 국장은 0시간 근로를 없애고 비정규직을 정규직과 동등하게 대우하는 등의 적극적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공공정책연구소(IPPR)의 클래어 맥닐 부소장은 유연한 근무를 선호해서 선택한 이들이나 주말 등을 활용해 추가소득을 벌기 위해 종사하는 이들이 많기 때문에 노동의 변화를 무조건 부정적으로 볼 것은 아니라고 지적하고 있다. 테일러 원장도 개인의 자율성이 증진될 수 있고, 생산의 효율성도 증가할 수 있기 때문에 균형된 시각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럼에도 영국의 전문가들은 공통적으로 두 가지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첫째, 영국이 지난 10년 간 생산성 증가율이 계속 떨어지고 성장잠재력이 약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아래 그림과 같이 2008년부터 생산성 증가가 거의 일어나지 않으면서 임금도 역시 정체되고 있다. 한 연구에 따르면 생산성이 외환위기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증가했다면 가구당 연간 약 5천파운드의 소득이 증가했을 것이라 예상하고 있다. 둘째는 지역 간이나 계층 간 불평등이 증가하고 있고, 기존의 제도들이 제대로 대처를 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영국 생산성의 변화(x축: 연도, y축: 1994년 대비 증가비율, %)
영국 생산성의 변화(x축: 연도, y축: 1994년 대비 증가비율, %)

첫 번째 지점과 관련하여 테일러는 영국 정부나 기업들이 생산성을 높이는 데 투자를 제대로 하지 않은 반면 이주민이나, 노인, 여성 등 잉여노동이 풍부했던 점이 낮은 생산성으로 귀결되었다고 지적하였다. 일반적으로 생산성이 낮아지면 고용상황이 악화되지만, 영국의 유연한 노동시장이 이를 상쇄하였다고 할 수 있다. 지난 10년 동안 보수당 정부의 강한 긴축정책은 정부부채도 줄이지 못하고 인적물적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생산성 하락으로만 이어졌다. 기업도 예외는 아니다. 벨 국장은 기술보다 인력을 활용하여 이윤을 얻으려 했던 고용주들이 더 불안정노동이 널리 퍼진 노동시장을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기업의 ‘혁신’은 대체로 기술보다는 노동비중을 줄이고, 임금을 낮추며, 상병수당이나 휴가수당을 주지 않는 방식을 찾아내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오히려 벨 국장은 단체협약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것도 저생산성 모델의 원인이 되었다고 비판하며, 최저임금 증가나 제대로 된 단체협약이 오히려 생산성을 높이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불평등과 관련된 두 번째 지점은 더욱 난제로 빠져들고 있다. 플랫폼 노동, 0시간 근로계약, 그리고 자영업의 증가는 모두 기존의 사회보장제도가 효과적으로 작동하는 것을 어렵게 하고 있다. 영국은 독일과 달리 사회보험보다는 다양한 조세지출이나 부조제도를 통해서 기초보장을 제공하는 국가로 잘 알려져 있다. 보수당 정부는 2012년 기존의 다양한 조세지출과 부조제도를 통합하여 통합부조(Universal Credit)를 도입한 바 있다. 여기에는 실업부조, 장애 관련 수당, 소득보조, 근로장려세제, 아동지원세제, 주택급여 등이 통합되어 있다. 하지만 이 제도가 도입된 이후로 빈곤층의 상황은 더욱 나빠지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다양한 제도를 통합하여 효율적으로 급여를 제공하려고 하였지만, 점차 사람들의 소득변동이 심해지고, 이를 파악하기 위해 설정한 5주간의 급여대기기간이 부정적 효과를 파생하고 있다. 피어스 소장에 따르면 더 많은 이들이 월세를 내지 못해서 노숙인이 되는 경우도 발생하고 있으며 푸드뱅크를 이용하는 이들이 급증하고 있다. 켄트대학 정희정 교수는 푸드뱅크에 제공하는 비상식량 수가 2010년 대비 2018년에 40배가 증가했다고 지적하였다. 근로빈곤층의 증가는 아동빈곤의 증가와 맞물리며 상황은 악화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코로나19로 인해서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뾰족한 대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한다. 통합부조제도가 문제가 많은 것은 사실이고, 노동당 역시 2019년 12월 선거에서 폐지할 것이라 공약을 하였지만, 실제 폐지한 뒤에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어떠한 대안도 뚜렷하지 않다는 것이다. 급여와 지급시기의 조정 그리고 행정체계 개편과 같은 점진적 방법들이 현 상황에서 영국을 구해낼 수 있을까?

최영준 연세대학교 행정학과 교수·복지국가연구센터 부소장 sspyjc@yonsei.ac.kr


한겨레에서 보기:
http://www.hani.co.kr/arti/economy/heri_review/949964.htmlonebyone.gif?action_id=8bc7acc7ab118e4bdad828041a03e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