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에겐 별칭이 둘 있었다. ‘어린 왕자’와 ‘까칠이’다. 나는 두 별칭에서 그의 치열함과 외로움을 동시에 느꼈다. 대학시절부터 ‘어린왕자’로 불리곤 했던 그는 마음 깊은 순수의 자리에서 타오르는 꿈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살았다. 그 꿈을 외면하고 조금 더 안전한 선택을 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내내 꿈꾸기를 멈추지 않았다. 언젠가 내가 그의 까칠함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지금도 그의 대답에 묻어있던 외로움을 잊지 못한다. “그건 제가 약해서 그래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저를 지킬 수 없었을 것 같아서...’
내 기억에 그는 자신의 활동과 일만큼 가족과 가정을 소중하게 지켜온 ‘사랑의 사람’이었다. 그는 술자리에서도 종종 휴대폰에 있는 아내와 아들의 사진을 보며 흐뭇한 표정으로 내게 보여주었다.
장원봉, 51세, 그에 대한 안타까운 기억을 더듬는 글을 마무리하며 나에게, 그리고 함께하였던 동료들에게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생각해본다. 그는 사회적 경제가 단지 경제조직이나 사업활동이 아니라 대안적인 사회 원리로 정착되기를 소망하며 현장을 누볐다.
한국의 사회적 경제 활동가 중 이런 그의 글이나 강의를 접하지 않았던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사회적 경제 안팎에선 “질문할 스승, 견결한 동지이자 벗을 잃었다”고 애통해하며, “그의 열정과 뜻을 잊지 않겠다”는 애도의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그는 현장에서 도움을 요청하면 자신을 아끼지 않고 달려갔고, 명확하게 자기 생각을 말해 주면서도 현장에서 답을 찾기 위해 끝까지 애를 쓴 사람이다. 장원봉, 그는 비겁해지는, 무감해지는, 완고해지는 ‘우리들의 마음을 습격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깨어나게 하는 사람’이었다.
지구별에 와서 까칠한 어린 왕자 장원봉을 만난 것에 깊이 감사한다. 그가 떠난 지구별이 내게는 한동안은 너무 허전할 것 같다. 하지만 그가 우리에게 남기고 간 선물 같은 동지들 속에서 그를 다시 보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사랑하는 장 박사, 또 만나자!
김홍일 사회투자지원재단 이사장·성공회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