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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한국사회정보연구원 박보희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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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구순의 박보희 원장은 “형광등 불빛에도 눈이 아프고, 엉덩이가 약해 오래 앉아 있는 것도 힘들다”고 했지만 여전히 새로운 출발의 의지를 키우고 있었다. 사진 김소연 수석연구원

“나는 여성이냐 남성이냐 이런 생각을 하고 살지 않았어요. 사회적 틀에도 얽매이지 않았어요. 나의 자존감이 훼손되는 일은 하지 않았고 마음속 울림에 따라 살았던 것 같아요.”

1929년에 태어나 올해 90살이 된 우리나라 첫 사회복지학 박사이자 국제사회개발 전문가인 박보희 한국사회정보연구원장의 말이다. 시대에 순응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개척한 박 원장은 묵직한 경력에 견줘 우리 사회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이다.


최근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자전에세이 <모든 삶은 아름다워야 한다>(소화 펴냄)를 낸 박 원장을 지난 1일 서울 혜화동 자택에서 만났다. 다리가 약간 불편한 것을 빼놓고는 구순의 나이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건강한 모습이었다.


황해도 사리원여중 때 1947년 서울로 
1973년 한국인 첫 사회복지학 박사 
자전 에세이 ‘모든 삶은 아름다워야 한다’ 
“회고 아니라 새로운 출발 기회로”

사회참여·학술 기고·강연 등 왕성 
“4차 산업혁명 준비돼 있나?” 쓴소리도



책상 위에 수북하게 쌓인 자료와 노트북에 먼저 눈이 갔다. “요새 무슨 일을 하냐”는 물음에 박 원장은 조금 의외의 대답을 했다. “4차 산업혁명에 대한 글을 쓰고 있어요. 정보통신기술(ICT)과 인공지능(AI)을 중심으로 하는 4차 산업혁명 체제는 우리 삶 전반에 영향을 줄 텐데, 우리 사회는 제대로 준비를 하고 있는지 의구심이 들어요.” 박 원장은 건강이 허락하는 선에서 조금씩 생각을 정리하고 있다고 했다.


“4차 산업혁명은 순기능도 있겠지만, 역기능도 클 수밖에 없어요. ‘고용 없는 성장’ 속에서 일자리 없이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딜레마가 꽤 만연할 거예요. 에스엔에스(SNS) 등 정보통신망 사용을 두고도 세대, 성별, 교육수준, 경제·사회계층 사이에 괴리가 커질 겁니다.” 박 원장은 “지금의 사회안전망은 충분한 답이 될 수 없다”며 사회·경제정책의 일원화, 기초생활보장이 아닌 보편적 적정생활수준의 보장 등이 시급히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것이 ‘박보희 스타일’이다. 지금도 학술지에 기고를 하고, 강연도 하는 등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박 원장이 사회복지에 대해 본격적으로 고민을 시작한 것은 한국전쟁 때다. 황해도에서 태어난 박 원장은 사리원여중에 다니던 1947년 18살 때 부모·형제와 헤어져 서울에서 홀로 살았다. 전쟁이 터지고 죽을 고비를 넘기며 서울에서 부산까지 피난을 간 그는 한국 원조사업 등을 담당했던 유엔 한국민사원조처(UNCACK)에 취직을 했다. 그는 어떻게든 배움을 이어가고자 이화여대 기독교사회사업과에 들어가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했고 이런 경력이 일자리를 구하는 데 도움이 됐다.


어느 추운 겨울날 출근하던 길에 죽어 가고 있던 아이를 도운 것이 그의 삶에 큰 변화를 줬다고 한다. 아이에게 미래가 없다면 우리나라에도 미래가 없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1952년에 아동교육을 전공하던 동문 한 사람과 의기투합해 보호자가 없는 아이들과 같이 살기로 결정했어요. 5명으로 시작된 것이 20명으로 늘었죠. 시설이 아니라 한 가족으로 살자는 의미를 담아 이름도 ‘우리집’이라고 불렀어요.” 그의 나이 겨우 23살 때다.


박 원장은 공부의 끈도 놓지 않았다. 캐나다 토론토대학 사회사업대학원, 미국 뉴욕에선 가정상담기관, 지적장애인 교육기관 등을 거치며 사회서비스 현장에서 활동했다. 1973년엔 컬럼비아대학 사회복지대학원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사회복지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해 이화여대 부교수를 하면서 정부 위원회 등 여러 기구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때부터 시대를 앞서간 제안을 많이 했지만, 우리 현실이 그것을 따라가기에는 한참 더뎠다. “노인·장애인 정책에 있어 자립할 수 있는 기회와 먹고살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해주는 것이 중심이 돼야 한다고 제안을 했어요. 한국에서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정책이 전반적으로 시혜적 성격을 지니는 경향이 있어요.” 그가 오랜 시간 국외에서 머문 것도 이런 사회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사회복지를 자선사업 차원에서 이해하는 데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런 인식의 후진성은 지금도 사회정책, 사회복지 발전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 같아요.”


박 원장은 목소리를 좀 더 높였다. “복지·경제·환경·인권·문화 이런 것을 따로 떼어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자꾸 나눠서 생각하는 것은 행정 편의에서 나오는 거예요. 서비스를 받는 수요자를 중심으로 종합적인 정책이 필요하거든요.” 사회복지라는 말도 생소하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의 소신이다.


현실의 벽은 높았지만 박 원장은 포기하지 않고 좀 더 넓은 곳에서 일할 기회를 찾았다. 1979년 국제연합아시아·태평양경제사회위원회(UNESCAP) 사회개발계획 겸 정책 수석으로 타이의 방콕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1988년 59살에 늦깎이 결혼으로 일을 그만두기 전까지 인구 노령화의 대책, 삶의 질 증진, 빈곤 퇴치를 위한 전략 등 폭넓은 연구와 사업을 했다. 귀국해서도 유엔 산하 기구의 자문위원, 국무총리 산하 여성정책심의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고, 1992년 한국사회정보연구원을 만들어 지금껏 활동하고 있다.


“소박한 구십 평생을 살았지만 한 가지 자부심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나 자신에게 충실하려 했다는 거예요.” 이번에 책을 낸 것도 “단순히 생을 정리하고 회고하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점으로 삼고자 하는 의지의 표명”이라고 말했다.



김소연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수석연구원 dandy@hani.co.kr

한겨레에서보기: 
http://www.hani.co.kr/arti/economy/it/90042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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