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속 HERI
[기획/집이 복지다] 서울 임대주택사업 현장 점검②

수요자 맞춤형 공공임대주택, 2011년부터 1453세대 공급
만화인·노인·1인창조기업인 등 수요 세분화해
취약계층에 주거와 함께 ‘미래 기반’ 마련 기회 제공

만화인 마을 1호점에 입주한 작가들. 왼쪽부터 이한새·심정민·최대성·양정미·이정민·이종현 작가.
만화인 마을 1호점에 입주한 작가들. 왼쪽부터 이한새·심정민·최대성·양정미·이정민·이종현 작가.

“모든 고객들은 자신이 원하는 색의 차를 고를 수 있습니다. 검은색이기만 한다면.” ‘마이카 시대’를 연 헨리 포드의 말이다. 헨리 포드는 티(T)형 자동차의 색을 검은색으로 통일시켰다. 검은색 페인트는 빨리 말라 ‘더 빨리, 더 많은’ 차를 만들기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공공임대주택도 비슷하다. ‘더 싸게, 더 많이’ 공급하는 데 집중하다 보니 입주자의 다양한 욕구를 반영하지 못했다. 외부에서는 임대주택의 슬럼화를 우려하고, 임대주택 예정지 주민들이 건설에 반대하는 현상도 나타났다.


서울주택도시공사(SH)의 수요자 맞춤형 공공임대주택은 양적 공급에 치중한 기존 공공임대주택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했다. 주거 취약계층의 요구를 반영해 보다 다양한 주거환경을 제공하고, 나아가 이들이 지역사회에 기여할 수도록 만든 주택이다. 2011년 도입 직후엔 입주 대상자가 신혼부부나 청년 등으로 다소 포괄적이었지만, 최근 들어선 기초자치단체와 협력해 지역 특성 등에 맞게 좀 더 세분화했다. 노인가구 비율이 높은 금천구엔 ‘홀몸어르신주택’을, 서대문형무소역사관과 독립공원이 있는 서대문구엔 독립유공자들을 위한 ‘나라사랑채’를 조성하는 식이다. 매년 지난해 말까지 모두 1453세대가 공급됐다.

서울 지역 주요 수요자 맞춤형 주택. 서울주택도시공사 자료
서울 지역 주요 수요자 맞춤형 주택. 서울주택도시공사 자료

■ 만화가로의 재기 꿈 꿔

“나는 곧 죽어도 만화가였어요. 만화가로 살 수 있는 확신이 있지만, 애 둘을 혼자 어떻게든 키워야 하는 상황이 오니 뭐라도 해야겠더라고요. 계기판 공장에서 일할 땐 그냥 이대로 식당 다니며 돈이나 벌까 생각했죠.”

‘둘리의 고향’ 도봉구 쌍문동 만화인 마을 1호점에서 만난 양정미 작가에게 ‘어떻게 만화가 꿈을 버리지 않았느냐’고 묻자 양 작가의 목이 메어왔다. 20살에 만화가가 돼 23살에 책을 냈고 37권의 작품을 그렸지만, 2013년 같이 일하던 출판사가 망하면서 수입이 끊겼다. 생계를 꾸리려고 공장과 어린이단체에 나가면서도, 교회 성경학교 교재나 포스터를 만들며 꾸준히 그림을 그렸다. 경력이 끊겼어도 만화가의 꿈은 놓지 않으려는 노력이었다.

한숨을 돌리게 된 건 지난해 11월 말 만화인 마을 1호점에 들어오면서다. 만화인 마을은 지난 가을 입주가 시작돼 현재 13명의 작가가 함께 산다. 10대인 아들·딸을 혼자 키우는 양 작가에게 집은 늘 큰 부담이었다. 이전에 살던 망우동 다가구 주택은 “앞집 남자가 틈만 나면 소리를 지르는 곳”이었는데, 월세와 보증금 대출이자를 합쳐 다달이 42만6000원이 나갔다. 조금 더 나은 환경은 없을까 하는 생각에 찾아간 서울주택도시공사 주거복지센터의 주거복지상담사가 만화인 마을을 추천해줬다. 경력 단절이 3년이 넘는 탓에 마을에 들어갈 수 있을지 반신반의했지만 주거복지상담사가 만화가협회 등을 오가며 노력해준 덕에 다행히 입주할 수 있었다. 51㎡(15평)로 아이들은 “집이 커서 좋다”고 하는데, 월세와 보증금 이자로 매달 나가는 돈은 전보다 10여만원이 줄었다. 이곳엔 별도로 마련된 커뮤니티실을 중심으로 마을 공동체도 형성돼있어 이웃 작가들이 형, 언니처럼 애들을 봐주기도 한다.

이 집으로 이사면서 양 작가한테는 만화가로 재기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아직 만화로 고정적인 밥벌이는 못하지만, 만화인 마을에 들어온 만큼 그림으로 ‘정당하게’ 돈을 벌려 한다. 실력있는 현역 작가들과 함께 산다는 점은 부담이지만 한편으론 동기부여가 된다. 지난해 12월엔 도봉문화재단이 도봉 주민 사연을 만화로 만드는 프로젝트에도 참여했다. 양 작가는 “3년 만에 처음으로 그림이 책자에 실리고, 구청 로비와 재단에 작품이 전시됐을 땐 ’이게 현실인가’ 싶었다”며 “도와줬던 분들께 책자를 돌리고, 나도 닳도록 봤다”고 말했다. 아이들을 위한 성경 만화를 그리겠다는 목표도 뚜렷해졌다. “그림만 그리고 살다 일자리를 잃고 현실에 부딪혀보니 세상에 참 말이 안되는 게 많더라고요. 그래서 성경 만화를 만들어 보려고 합니다. 말 안되는 세상에 다가가고 싶어요.”

10일 신내의료안심주택 사랑채에서 ’어르신 건강 상담’이 열리고 있다.
10일 신내의료안심주택 사랑채에서 ’어르신 건강 상담’이 열리고 있다.

■ 생활의 편리에서 공동체 형성으로

조경희(75)씨는 병원을 갈 때 더는 딸들과 며느리의 도움을 받지 않는다. 조씨는 당뇨와 고혈압에 1994년 사고로 철심을 넣은 다리, 2013년 척추협착증 수술 등으로 2∼3달에 한 번씩 정기검진을 받는다. 이전에 살던 불광동 집에서 차로 30분 거리의 종합병원까지 가는 날이면 딸들이나 며느리가 와서 도와야 했다. 그런데 2015년 11월 남편과 신내의료안심주택에 들어온 뒤론 자식들한테 느끼는 미안함이 줄었다. 신내의료안심주택 길 바로 건너에 서울의료원이 있어, 혼자서도 오갈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서울의료원 간호사들이 2주에 한 번씩 ’어르신 건강검진’을 해주고, 3∼4달에 한 번은 집에 방문하기도 한다. 처음엔 원룸형으로 만들어진 29㎡(9평) 집이 좁아 적응이 안됐지만, 일단 자식이 편해하니 좋았다. “진료예약이 잡히면 혼자 걸어갑니다. 몸 더 불편하신 분들은 119(구급차를) 타고 가기도 하고 장애인 택시를 부르기도 하는데, 나는 걸을 수 있으니 그냥 가요.”

신내의료안심주택은 홀몸어르신, 휠체어 사용자, 기초수급자 등 의료취약계층을 위한 수요자 맞춤형 임대주택이다. 서울의료원이 가까이 있는 입지조건을 활용해 건립한 국내 1호 의료안심주택이다. 복지서비스와 반찬나눔, 영화상영같은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영안복지재단이 1층에 입주해 주민들을 돕는다. 신내의료안심주택의 특징은 1∼2인 가구 형태로 지어졌다는 점이다. 노인만으로 구성된 1∼2인 가구가 늘어나고 고독사, 무연고 노인 등이 사회문제가 되는 상황이 반영됐다. 집안 곳곳엔 가족이나 보호자 없이 몸이 아픈 경우를 대비해 동작감지센서가 설치돼 있다. 화장실과 방안엔 관리실과 바로 연결된 비상벨과 줄도 설치돼있어, 응급 상황이 생겼을 때 벨을 누르거나 줄을 당기면 관리실에서 119에 연락하는 등 후속 조치를 해준다. 전체 220세대인 신내의료안심주택엔 현재 180세대가 입주해 있다.

수요자 맞춤형 공공임대주택에서 신경 쓰는 또다른 부분은 커뮤니티 활성화다. 이를 위해 모든 건물에 설계 단계부터 커뮤니티 공간을 포함하도록 의무화했다. 신내의료안심주택의 경우 건물 곳곳에 사랑채·노인정이 있고, 60여명이 노인회를 결성한 상태다. 만화인 마을·드론 마을 등 원룸 형태의 건물은 1층에 커뮤니티실을 만들어 입주민들이 모일 공간을 만든다. 이동훈 서울과학기술대 주택도시대학원 교수는 “1∼2인 가구는 가구 내에서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해결하기 어렵다”며 “커뮤니티를 통해 서로 도움을 주고받아 주거의 질을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

서울주택도시공사에서는 공동체 코디네이터를 양성해 마을마다 공동체 형성을 돕는다. 최정희 공동체 코디네이터는 “일반 주택은 주인이 책임을 갖고 집을 관리하지만, 공공임대주택은 이웃이 함께 집을 관리할 수 있도록 내부규약을 만들어야 한다”며 “관리비를 책정하고 분리수거나 주차 문제 등 공동 문제를 자율적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가교를 놓고 있다”고 설명했다.

입주민끼리 협력을 통해 시너지를 내는 방향은 장기적인 숙제다. 1인 창조기업인을 위한 원룸형 임대주택 ‘도전숙’의 한 대표는 “창조기업은 혼자서 힘들다.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응용기술 등의 분야가 협업하는 게 중요한데, 비슷한 분야 사람들이 모여 살며 서로 많이 성장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글·사진 조창훈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정책센터 연구원 hu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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