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속 HERI
[제8회 아시아미래포럼 기획] 일의 미래: 독일을 보다 
③사회적 합의를 위한 대화

디지털화 격변에 ‘산업 4.0’ 대응 시도
정부 앞장서 ‘노동 4.0’ 프로젝트로 확대
노사정 1년반 끈질긴 토론 거쳐
‘좋은 노동’ 원칙 합의해 ‘백서’ 펴내

노조가 대화에 적극 참여·대응
“기술 중심 논의에 인간 옷 입혀”

한국, 양극화 치달을 위험 상존
노동의 미래 두고 합의 서둘러야
독일 ‘노동 4.0’의 엠블럼. “노동을 계속 생각하다”라는 말이 씌어 있다.
독일 ‘노동 4.0’의 엠블럼. “노동을 계속 생각하다”라는 말이 씌어 있다.
커피숍에서 노트북과 휴대전화로 일해본 이들은, 디지털 세상에선 꼭 출근해야 일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걸 느꼈을 것이다. ‘일의 미래’는 이미 우리 옆에 와 있다. 앱에서 일을 수주하는 플랫폼 노동이 늘고 있지만 이들이 자영업자인지 노동자인지 아직 회색지대에 있다. 로봇과 인공지능이 일을 대신 하면 임금노동으로 생계를 꾸리던 이들은 누가 부양할까? 의료보험이나 연금같이 전일제·정규직 노동을 전제로 만들어진 사회보장은 살아남을까? 기본소득은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엄청난 재원 마련은 어떻게 할까? 질문은 꼬리를 문다.

‘일의 미래’에 대한 논의는 사실 한 사회의 30년 청사진을 그리는 작업이다. 독일 사회는 노사정의 사회적 대화를 통해 이런 큰 변화에 대응해왔다. 제조업체의 국외 이전으로 일자리가 줄어들고 미국 주도의 디지털화에 밀리고 있다는 위기감에서 디지털 기술을 생산과정에 접목한 ‘산업 4.0’을 2012년부터 추진했다. 하지만 기술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음을 알고 연방노동사회부가 사회적 대화 프로젝트인 ‘노동 4.0’에 시동을 걸었다. 2015년 초, 산업 4.0에 사회적·인간적 의미를 담은 ‘좋은 일’이 무엇인지를 묻는 <녹서>를 펴내 이를 지방정부, 시민단체·연구소, 노동조합, 재계 등에 보내 토론하게 했다.

독일 ‘노동 4.0’ 사회적 대화를 이끈 기관 가운데 하나인 독일 연방노동사회부.
독일 ‘노동 4.0’ 사회적 대화를 이끈 기관 가운데 하나인 독일 연방노동사회부.
노동 4.0의 목표는 사회적 대화를 통해 ‘좋은 일’에 대한 구성원의 합의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목표를 공유해야 대응도 가능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누구나 일을 통해 성장하고 있음을 느끼며, 가정과 자신을 가꿀 안정된 소득과 여가를 보장하는 일의 가치는 미래에도 변함이 없다. 그와 관련한 환경이 미래에 어떻게 변하고, 이를 보장하는 제도적 방안은 무엇인지를 함께 모색하자는 것이다. 연방노동사회부가 대화의 물꼬를 트는 <녹서>에서 던진 질문은 “디지털화되어가는 사회변동 속에서 ‘좋은 노동’이라는 이상은 어떻게 유지, 강화될 수 있는가?”이다. 전국에 걸쳐 기업, 협회, 연구자, 일반시민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연구와 토론에 참여했다. 시민과의 대화를 이끌기 위해 <미래>(Futurale)라는 영화 시리즈를 18개 도시의 극장에서 상영하기도 했다.

1년 반의 대화에서 도출된 결론을 담은 <백서>가 2016년 말 발표됐다. 백서는 △원하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노동시장 △일과 삶의 균형과 직결되는 노동의 시·공간적 유연성에 대한 노사 합의 △자영업자와 플랫폼 노동자에 대한 사회보장 △노동자 개인정보의 보호 △사회복지 안전망의 미래 등 8개 주요 과제 토론 내용과 가능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독일의 노동자단체인 독일노동총동맹(DGB)에서 ‘미래의 노동’ 프로젝트를 담당하고 있는 볼프강 루터바흐 박사는 지난달 18일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정부에서 훌륭한 일을 했다”고 긍정적 평가를 하면서 “<백서>에 나와 있는 건의는 앞으로의 가이드라인이 되어 실제 변화로 이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백서>가 기본원칙에 대한 합의여서 세부적인 이견이 있으며, 9월 총선 뒤 연립정부가 재구성되고 있어 이 합의가 어찌 될지 불안한 구석도 있다고 덧붙였다.

산업 4.0과 노동 4.0으로 이어지는 사회적 대화의 과정에서 특징적인 것은 노조의 적극적 대응이었다. 산업협회가 깃발을 들어 기술과 산업 논리로 흐를 수 있었던 산업 4.0에 인간과 노동을 집어넣은 것은 금속노조, 서비스노조와 같은 산별노조였다. 독일 금속노조 집행위원인 콘라트 클링겐부르크는 “오는 것을 막는다고 안 오는 게 아니다. 큰 거리에서 타이어를 불태우고 경영자를 인질로 잡는다고 변하는 게 있는가?”라며 “기왕 변해야 한다면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처음부터 만들어가는 게 바르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독일 ‘노동 4.0’ 사회적 대화를 이끈 기관 중 하나인 독일노동총동맹.
독일 ‘노동 4.0’ 사회적 대화를 이끈 기관 중 하나인 독일노동총동맹.
한국의 4차 산업혁명 대응은 독일의 초기 모습같이 기술 중심, 산업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노동과 4차 산업혁명을 연결하는 논의는 어디에서도 미약하며, 노동자 대표 조직 역시 이를 주요 의제로 만들어나가지 못하고 있다. 연일 언론에서 직업의 소멸을 말하는 급진적 예언이 쏟아지는 가운데, 심각한 청년실업, 고용불안, 사회안전망에 주눅 든 이들은 4차 산업혁명을 두려운 미래로 받아들이고 있다.

독일 ‘노동 4.0’ 사회적 대화를 이끈 기관 중 하나인 ‘플랫폼 산업 4.0’.
독일 ‘노동 4.0’ 사회적 대화를 이끈 기관 중 하나인 ‘플랫폼 산업 4.0’.
박명준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독일은 노동의 인간화나 작업장에서의 참여 등 공감대를 만들고 유지하면서 4차 산업혁명을 맞고 있다”며 “산업이 첨단화될수록 노동복지가 무너지지 않고 같이 가야 하는데 우리는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4차 산업혁명이 갈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노동문제 전문가인 하르트무트 자이페르트 한스뵈클러재단 선임연구위원은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을 수 있다는 공포에서 해방시키고 새로운 능력을 키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해야 한다고 한국에 조언했다.

김성혁 전 금속노조 노동연구원장은 정부의 4차 산업혁명 추진 과정을 두고 “위원회 참가자들이 주로 기업인이고 벤처기업, 창업 중심으로 사람을 배치하고 주도하고 있다”며 “대기업에서 벤처기업으로 범위를 넓힌 것은 바람직하지만 노동의 참여, 기술을 넘어서 인간의 역할을 높이는 방향, 복지나 고용과 함께 가려는 생각은 부족한 것 같다”고 지적했다.

독일은 산업 4.0이 노동 4.0과 다른 것이 아님을 보여줬다. 우리도 노사정, 연구소, 시민단체가 마주 앉아 디지털 시대의 산업과 일, 일자리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를 만들어갈 때다.

베를린/글·사진 이봉현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시민경제센터 연구위원 bh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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