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칼럼
“선은 악마저도 포용하고 받아안는 것이지요. 허나 정의는 악을 결코 용납하지 않습니다. 정의는 오로지 악을 방벌함으로써 정의롭습니다.” 에스비에스(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 어린 이방원(남다름)이 홍인방(전노민)에게 던진 대사다.

근래 ‘착한 소비’라고도 하는 ‘윤리적 소비’가 대중의 주목을 받고 있다. ‘착한 소비·윤리적 소비’란 자연과 환경, 주변과 이웃까지 생각하는 사려 깊은 소비를 하는 것, 윤리적 가치판단에 의해 상품이나 서비스를 구매하는 것을 말한다. 나눔을 실천하거나 윤리적으로 생산한 제품 또는 서비스를 구매하는 것, 비윤리적인 제품이나 그 회사에 대해서 불매운동을 벌이는 것, 소비 자체를 자제하는 것, 재사용과 재활용을 권장하는 것, 포장을 최소화한 상품을 선택하는 것 등이 착한 소비 생활 수칙들이다.

이에 반해 정의로운 소비는 어떤가. 정의로운 소비는 어린 이방원의 대사에서 시사하듯 악을 방벌하는 데 방점을 찍고 있다. 국내 소비자들은 불매를 외치다가도, 돌아서서 해당 기업 제품과 서비스를 구매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역설적 메커니즘을 꿰뚫고 있는 기업은 상황을 모면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정의로운 소비’는 이런 역설적 현실을 바로잡기 위한 수사적 장치라 하겠다. 즉, 제대로 된 ‘불매운동’을 통해 불공정한 불법과 비윤리적 기업 활동에 대한 응징 시스템을 엄정하게 작동시키자는 취지다.

나이키는 소비자의 ‘불매운동’을 변화의 계기로 삼아 지속가능한 성장의 발판을 마련한 대표적 사례로 손꼽힌다. 1996년 미국의 <라이프>지에 한 소년이 나이키 축구공을 바느질하는 사진이 실린 뒤 아동노동 착취에 대한 경각심은 전세계를 뒤흔들었다. 이를 반면교사 삼아 나이키는 개발도상국의 청소년을 적극적으로 돕고 있다. 이젠 미국 경제지 <포천>이 선정한 ‘2015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 목록 13위에 이름을 올렸다.

국내 사정은 어떠한가. 지난 7월 롯데그룹에서 벌어진 경영권 분쟁을 계기로 황제경영·비밀경영뿐 아니라 불공정 경쟁으로 소비자에게 피해를 끼쳤다는 비난 여론이 일면서 롯데제품 불매운동으로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불매운동에 돌입한 7월말 일주일 동안 롯데마트 매출은 오히려 전주 대비 약 4% 증가했다. 당위적인 여론만 형성했을 뿐, 휴가철과 맞물려 벌어진 불매운동이 실제 행동으로 이어지진 않았다는 뜻이다. ‘가습기 살균제 사태’ 이후 4년이 흘렀지만, 이들 기업은 여전히 건실하다. 공식적으로 집계된 피해자 530명 중 403명이 ‘옥시싹싹 가습기 당번’을 사용했으며 사망자 143명 중 70%가 옥시레킷벤키저 제품을 썼다. 피해자와 유가족들은 옥시를 비롯해 가습기 살균제 제조 판매사를 상대로 불매운동을 꾸준히 벌여왔지만, 효과는 미약하다. 역시 대대적인 ‘불매운동’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2013년 5월 남양유업의 ‘물량 밀어내기’로 촉발된 불매운동이 일부 성과를 냈다고는 하지만, 2013년 상반기 커피믹스 시장점유율은 전년보다 0.9% 상승했으며, 그해 출시한 컵커피는 출시 1년 만에 매출 220억원을 달성했다.


한국 소비자는 착하다. 이슈가 터질 때마다 불매운동의 움직임이 없지 않지만, 실제 기업의 변화를 끌어내기까지 전개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정의로운 소비’는 작은 불편과 희생이 필요한 번거로운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를 감수하고라도 착한 소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정의로운 소비로 각을 세워보는 건 어떨까.

조현경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적경제센터장 gobogi@hani.co.kr


등록: 2015-12-06 18:49

한겨레에서 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20561.html

서비스 선택
댓글
로그인해주세요.
profile image
powered by SocialXE
List of Articles

[싱크탱크 시각] 노동개혁(?)의 침몰, 자업자득이다 / 이상호

3월10일 340회 임시국회가 종료되면서 정부의 노동법 ‘개악’은 일단 좌절되었다. 물론 집권여당인 새누리당이 바로 3월 임시국회를 소집한 상태이긴 하지만, 정치일정상 19대 국회에서 박근혜표 노동‘개혁’(?)은 사실상 물 건...

  • admin
  • 2016.03.14
  • 조회수 3352

[싱크탱크 시각] 협동의 교육학, 사회적 경제 / 조현경

협동조합, 사회적 기업 등 사회적 경제 조직들은 자발적 결사에 의한 공동체 활동을 통해 대안적인 가치들을 구현하고자 사업을 전개한다. 사회적 경제란 민주적 참여와 자율성을 기반으로 공동체를 위한 생산과 분배를 하는 ...

  • admin
  • 2016.03.07
  • 조회수 4307

[싱크탱크 시각] 그러므로 ‘사람 중심’ 경제다 / 이상호

이상호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 정치의 계절이 돌아오면서 새로운 성장론이 유행이다. 새누리당은 ‘일자리 중심’ 성장론, 더불어민주당은 ‘더불어’ 성장론, 국민의당은 ‘공정’ 성장론을 내세우고 있다. 경제성장론의 백...

  • admin
  • 2016.02.29
  • 조회수 3895

[유레카]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 박순빈

날아다니는 국수를 창조신으로 떠받드는 종교가 있다. 일명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FSM: Flying Spaghetti Monster)교’다. 미국 오리건주립대학의 보비 헨더슨이라는 한 물리학도가 2005년 창시했다. 그에 따르면, 날아다...

  • admin
  • 2016.02.18
  • 조회수 4045

[한겨레 프리즘] 안보이슈의 총선 효과 / 한귀영

한귀영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조사센터장 한반도 평화경제의 상징인 개성공단이 출범 12년 만에 전격 폐쇄되었다. 박근혜 정부는 북한의 4차 핵실험과 로켓 발사에 대한 대응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사람들은 총선이 다가왔음...

  • admin
  • 2016.02.15
  • 조회수 3844

[싱크탱크 시각] 기억 속 가라앉은 세월호의 시그널 / 조현경

조현경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적경제센터장 지난 1월 시작된 티브이엔(tvN) 드라마 <시그널>의 흥행몰이가 한창이다. 나 역시 요즘 <시그널>에 빠져 산다. <시그널>은 현재의 경찰청 ‘장기미제전담팀’의 프로파일러 박해영 경...

  • admin
  • 2016.02.15
  • 조회수 4081

[싱크탱크시각] ‘해고 자유화’에 내몰린 국민 / 이상호

이상호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 결국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지난 22일 이기권 고용노동부 장관은 ‘노동개혁을 위한 공정인사·취업규칙 지침’을 발표했다. 한국노총이 노사정 합의에 대한 파기선언을 공식적으로 발표한 ...

  • admin
  • 2016.01.25
  • 조회수 4175

[유레카] ‘뱀의 입’ 속으로 / 박순빈

박순빈 연구기획조정실장 겸 논설위원 금융위원회가 18일 정부합동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온라인 ‘로보어드바이저’ 전문업 도입 방침을 밝혔다. 박근혜 정부가 내세우는 ‘창조경제’와 ‘문화융성’의 일환이란다. 누구를 위한 창...

  • admin
  • 2016.01.20
  • 조회수 4802

[싱크탱크 시각] 임금피크제의 불편한 진실

조현경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적경제센터장 2015년 11월 종영된 제이티비시(JTBC) 드라마 <송곳>의 대사 중 도드라졌던 단어 하나를 꼽으라면 ‘취업규칙’이다. 취업규칙이란 ‘직원들의 노동조건에 관한 회사의 규정’을 말한...

  • admin
  • 2016.01.18
  • 조회수 4477

[한겨레 프리즘] 제3지대 신당의 가능성 / 한귀영

한귀영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조사센터장 2016년 새해 정가의 키워드는 단연 안철수다. 지난 주말 발표된 갤럽 조사 결과를 보면, 안철수 신당의 지지도는 21%로 새누리당(35%)에 이어 2위로 올라섰고, 더불어민주당은 19%로...

  • admin
  • 2016.01.11
  • 조회수 4488

[싱크탱크시각] 쌍용차 복직과 통상해고 지침 / 이상호

이상호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 박근혜 정부가 새로운 해고 방식으로 ‘통상해고’ 도입을 공식화하던 바로 그날, 해고의 고통과 상처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를 우리 사회에 각인시켰던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사태가 6년 만...

  • admin
  • 2016.01.04
  • 조회수 4204

[김공회의 경제산책] 경제본질 보려면 ‘중산층’보다 ‘중간계급’ 개념을

김공회 연구위원 ‘중산층을 70%로 늘리겠다.’ 지금은 가물가물해진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이다. 이 때문인지, 중산층 논의가 이번 정권 들어 특히 많다. 중산층이란 누구인가? 흔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중산층을 중위소득...

  • admin
  • 2015.12.21
  • 조회수 4123

[싱크탱크시각] 독일 국민이 부러운 이유

이상호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 지난 12월9일 미국 <타임>은 독일 총리 앙겔라 메르켈을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는 메르켈 총리의 얼굴을 전면에 내건 표지의 제목은 ‘자유세계의 총...

  • admin
  • 2015.12.14
  • 조회수 4272

[한겨레 프리즘] 이 시대 구원은 어디에

한귀영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조사센터장 파시즘의 군홧발이 저벅저벅 다가오고 있는 것만 같다. 설마설마하던 일이 정말로 벌어지고 있다. 국가는 우리 머릿속을 국정 사상으로 채우겠다고 선언했다. 대통령은 복면을 쓰고 ...

  • admin
  • 2015.12.14
  • 조회수 4009

[싱크탱크 시각] 착한 소비에서 정의로운 소비로 / 조현경

“선은 악마저도 포용하고 받아안는 것이지요. 허나 정의는 악을 결코 용납하지 않습니다. 정의는 오로지 악을 방벌함으로써 정의롭습니다.” 에스비에스(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 어린 이방원(남다름)이 홍인방(전노민)에게 던...

  • admin
  • 2015.12.07
  • 조회수 4230

[싱크탱크 시각] ‘응팔’…골목이여 응답하라 / 조현경

88서울올림픽 당시 나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당시 우리집은 서울 광진구(옛 성동구) 자양동 59번 버스 종점 옆 상가 1층 ‘물망초양품점’에 딸린 작은 가겟방이었다. 그 시절 나의 골목은 버스기사 아저씨들의 담배 냄새와 ...

  • admin
  • 2015.12.07
  • 조회수 5139

[유레카] 부채의 원죄 / 박순빈

빚을 갚아야 할 의무는, 냉정한 경제이론에선 존재하지 않는다. 빚은 반드시 갚는다는 게 법칙일 경우 금융시스템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만약 은행이 원금과 이자를 늘 돌려받는다는 전제로 대출 영업을 한다면 어떤 일...

  • admin
  • 2015.12.02
  • 조회수 3800

[싱크탱크 시각] ‘청년수당’이 두려운 박근혜 정부 / 이상호

이상호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 경기 성남시의 ‘청년배당’에 이어 서울특별시의 ‘청년활동지원(청년수당) 사업’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한쪽에서는 취업 기회조차 갖지 못한 청년들을 위한 획기적인 ‘이행 노동시장 정...

  • admin
  • 2015.11.23
  • 조회수 4704

[김공회의 경제산책] 정부 눈에는 실업자도 취업자로…

김공회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 지난주 기획재정부는 10월 고용동향을 발표하면서 전체 실업률이 전년도에 비해 0.1%포인트 준 3.1%를 기록했고, 청년층(15~29살) 실업률도 같은 기간 8.0%에서 7.4%로 크게 줄었다는 ‘희...

  • admin
  • 2015.11.17
  • 조회수 3971

[한겨레 프리즘] ‘헬조선’의 분노 / 한귀영

한귀영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조사센터장 지난 토요일, 많은 시민들이 거리로 나섰다. 2008년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를 위한 촛불집회 이후 7년 만에 가장 많은 숫자다. 이날 정권은 위헌 결정 따위는 무시하고 다시 차벽...

  • admin
  • 2015.11.17
  • 조회수 39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