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칼럼

김공회 연구위원.JPG

김공회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


러시아에서 5월9일은 2차대전 전승절로 국가 최대 기념일 중 하나다. 원래 독일군은 1945년 5월7일에 프랑스에서 백기를 흔들었지만, 이튿날 베를린에서 당시 소련군 원수 주코프 등 주요국 사령관들의 입회하에 항복의식이 재차 거행되었다. 이를 기념해 많은 유럽국들이 8일을 전승절로 기린다.

그런데도 유독 소련이 9일을 전승절로 지정한 것은 항복문서 서명이 모스크바 시간으로 자정을 넘겼기 때문이다. ‘공휴일의 정치학’이라고 할까? 소련과 동구권에서는 대체로 9일을 전승절로 기렸으나, 소비에트연방(소련)의 해체 뒤 발트3국 등은 자국의 시간대에 맞춰 이를 유럽식으로, 즉 8일로 돌리기도 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공휴일의 정치학은 낯설지가 않다. 이번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임시공휴일 지정만 해도 최근의 총선 참패와 계속된 지지율 하락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과연 이로써 대통령의 ‘기스’ 난 자존심이 얼마나 회복될까? 그런데 이번 조치는 그 ‘정치학’만큼이나 ‘경제학’도 관심거리다. 정부가 줄기차게 강조하고 있는 게 바로 ‘내수 활성화’였으니 말이다. 마침 국내의 한 민간연구기관은 임시공휴일 하루에 발생할 소비지출액이 1조3천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하기도 했다.

참 고약하다. 국민 대다수가 노동자인 이 나라에서 노동자가 열심히 일해 국민경제의 성장에 기여하라는 훈계야 우리에게 결코 낯선 게 아니다. 그런데 이제 노동자는 열심히 소비함으로써도 국민경제의 성장에 기여해야 한다. 경제라는 게 돌고 도는 것이니 못할 것도 없지만, 이를 위해선 소득이 전제되어야 한다. 즉 임시공휴일에 돈을 더 쓰려면 그 임시공휴일에 놀면서도 돈을 받아야만 한다. 현재 그것이 가능한 노동자는 임시공휴일을 유급휴일로 한다는 조항을 담은 취업규칙의 적용을 받는 일부 노동자뿐이다. 그런데 현재 정부는 ‘노동개혁’이라는 이름으로 그러한 취업규칙을 없애기 쉽게 만들고 있으니, 입장에 일관성이 없다. 차라리 예전처럼 노동자에게 근검절약을 강조하는 편이 낫지 않은가? 그게 지금의 사실상의 저임금 정책과 어울린다.

이번 조치를 건의한 게 재계였다는 얘길 듣고 웃음이 났다. 그간 틈만 나면 공휴일을 줄이려고 혈안이던 게 재계였으니 말이다. 3일 연휴였던 신정(새해 첫날) 연휴가 1999년부터 하루로 줄어들 때도, 2004년부터 공공기관을 시작으로 단계적으로 주5일제가 시행될 때 토요일 무급화와 함께 공휴일 축소를 요구한 것도 재계였다. 특히 2005년 7월부터 300인 이상 민간사업장에 주5일제 확대적용을 앞두고는, 대한상공회의소·전국경제인연합회·한국경영자총협회·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한국무역협회 등 ‘경제 5단체’가 모두 나서 이미 식목일과 제헌절이 공휴일에서 빠졌는데도 개천절을 당장 공휴일에서 제외하고 2012년부터는 어린이날과 현충일도 공휴일에서 빼야 한다고 정부에 건의했었다. 이에 따르면 이번 임시공휴일 지정은 논의될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반성 없는 정부와 재계가 조금 얄밉지만, 그래도 이번 임시공휴일 지정에서 한 가지 긍정적인 면은 있다. 이제야 정부와 재계가 휴일의 경제적 의의에 대해 눈을 뜨고 있는 것 같아서다. 기실 휴일의 경제적 가치는 단순히 내수 진작에만 머물지 않는다. 충분히 휴식을 취했을 때 노동자는 더 높은 생산력을 발휘할 것이고, 노동자들이 다양한 여가와 정신활동을 즐길 때 진정한 ‘창조경제’도 가능하다. 다만, 노동시간 단축 없는 휴일의 경제적 가치 인정, 사회 전반의 임금수준 인상 없는 내수의 중요성 강조가 모순이라는 것쯤은 이제 정부와 재계도 인정할 때가 됐다.

김공회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 gg@hani.co.kr



등록: 2016-05-08 19:17
한겨레에서 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42882.html
첨부
서비스 선택
댓글
로그인해주세요.
profile image
powered by SocialXE
List of Articles

[유레카] 전기요금의 비밀 / 박순빈

전기는 독특한 상품이다. 일반 상품과 달리, 일물일가의 원칙이 잘 지켜지지 않는다. 수요주체와 목적, 언제 어디서 사용하느냐에 따라 요금이 천차만별이다. 공급 원가가 때와 장소에 따라 다 다르다. 그렇지만 전기사업자는 ...

  • admin
  • 2016.08.25
  • 조회수 2761

[유레카] 놀 권리 / 박순빈

유엔아동권리협약 31조는 ‘아동은 휴식을 충분히 즐기고, 나이에 맞는 놀이와 오락 활동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와 교육 현장은 이런 권리를 보장해주지 않는다. 어린이들이 목소리를 내는...

  • admin
  • 2016.08.25
  • 조회수 2549

[한겨레 프리즘] ‘진정한’(?) 기본소득 / 김공회

기본소득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 듯하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똑똑하지만 게으르고 불만 많은’ 일부 젊은이들의 ‘투정’ 정도로 치부되던 게 기본소득이었다. 기본소득 지지선언은 야권 정치인에겐 진보적 색채를 선명히 ...

  • admin
  • 2016.08.23
  • 조회수 2928

[한겨레 프리즘] 어떤 재조명 / 김공회

김공회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전태일이 기름을 부은 몸에 불을 댕기며 남긴 말이다. 그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도 그가 자신의 죽음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는지...

  • admin
  • 2016.07.27
  • 조회수 2949

좋은 일터, 좋은 임금의 조건 / 서재교

국내 굴지의 글로벌 아이티(IT) 기업에 근무하는 김아무개(40) 과장은 지난해 성과급을 포함해 약 1억2천여만원의 급여를 받았다. 매달 천만원 정도를 월급으로 받은 셈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처럼 많은 급여를 받을 수 있을지 ...

  • admin
  • 2016.07.27
  • 조회수 2911

[유레카] 민자철도의 위험 / 박순빈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는 민간자본의 힘을 절대적으로 신봉했다. 국가와 시장의 구분을 허물어버리고, 공공서비스에 민간자본의 참여를 과감하게 끌어들였다. 대처 정부는 어정쩡한 민영화가 아니라 일시에 전면적으로 시장에...

  • admin
  • 2016.07.12
  • 조회수 2722

[한겨레 프리즘] ‘주휴수당 논란’을 넘어 / 김공회

김공회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 매년 찾아오는 최저임금 결정 시즌이다. 올해는 금액 자체뿐 아니라 고시 방법을 둘러싸고서도 의견 대립이 첨예하다. 이제껏 최저임금은 시급으로 고시되는 게 관례였으나 노동계에서 이를 ...

  • admin
  • 2016.06.27
  • 조회수 3497

[싱크탱크 시각] 리더십의 빈곤과 과잉 / 조현경

영화 <명량>이 한국 영화 역사상 최고의 관객수를 기록했던 이유 중 하나는 ‘진정한 리더에 대한 갈망’이었다. 당시 한국을 방문했던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한 뜨거운 반응 역시 같은 맥락이다. 그는 4박5일 동안 세월호 유...

  • admin
  • 2016.06.20
  • 조회수 3006

[한겨레 프리즘]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 / 김공회

김공회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 ‘사내유보금’을 놓고 진보와 보수 간에 갈등이 첨예하다. 지난 4월 재벌의 사내유보금 754조원 중 일부를 환수해 실업 해소 등에 쓰자고 주장하는 ‘재벌사내유보금환수운동본부’가 본격...

  • admin
  • 2016.06.17
  • 조회수 2663

[싱크탱크 시각] 어떤 숟가락 / 조계완

조계완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동향분석센터장 기술공고를 막 마친 김군은 ‘노동자’가 되었다. 숟가락과 컵라면이 든 작업가방을 메고 집을 나서면서부터 그는 더 이상 ‘청소년’일 수 없었다. 꿈·연애 그리고 펼쳐질 장래. ...

  • HERI
  • 2016.06.07
  • 조회수 2892

[싱크탱크 시각] 진격의 ‘카카오드라이버’ / 조현경

조현경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적경제센터장 요즘 카카오톡 피시(PC) 버전에선 대리운전기사를 모집하는 ‘카카오드라이버 사전예약’ 광고를 쉽게 볼 수 있다. 카카오가 ‘카카오택시’로 모바일 교통서비스에 공들인 지 1년여...

  • admin
  • 2016.05.30
  • 조회수 2991

[유레카] 화폐의 권위 / 박순빈

"화폐는 자기 자신을 다스리지는 못한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의 3대 편집장을 지낸 월터 배젓의 말이다. 그는 1873년 출간한 <롬바드 스트리트>라는 책에서 화폐를 공정하게 다스릴 수 있는 권력구조를 제안했다. 핵심은...

  • admin
  • 2016.05.18
  • 조회수 2864

[싱크탱크 시각] 근로자이사제의 오해와 진실 / 이상호

이상호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연구위원 서울시 박원순 시장이 지난 10일 산하 15개 투자출연기관의 근로자이사제 도입을 발표하였다. 경총은 물론, 경제일간지를 비롯한 보수언론들은 시장경제가 심각하게 훼손되고 노사관계가 더욱 ...

  • admin
  • 2016.05.16
  • 조회수 3169

[싱크탱크 시각] 자유로운 개인들의 공동체 / 조현경

조현경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적경제센터장 ‘자유’와 경쟁하는 가치는 무엇일까. 가치가 경쟁한다는 것은 ‘좋은 것과 나쁜 것’ 가운데 선택하는 일이 아니라, ‘더 좋은 것과 좋은 것’, ‘좋은 것과 덜 좋은 것’ 사...

  • admin
  • 2016.05.09
  • 조회수 2930

[한겨레 프리즘] 공휴일의 경제적 가치 / 김공회

김공회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 러시아에서 5월9일은 2차대전 전승절로 국가 최대 기념일 중 하나다. 원래 독일군은 1945년 5월7일에 프랑스에서 백기를 흔들었지만, 이튿날 베를린에서 당시 소련군 원수 주코프 등 주요...

  • admin
  • 2016.05.09
  • 조회수 3431

[싱크탱크 시각] ‘정의로운’ 구조조정이 가능한가? / 이상호

20대 총선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낳았다. 16년 만의 ‘여소야대’를 만든 주요 요인으로 ‘박근혜 경제 심판론’이 주목받았다. 정책경쟁이 실종된 이번 총선에서 이런 평가가 나온 배경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지난 2월 ...

  • HERI
  • 2016.04.25
  • 조회수 4341

[유레카] 민생 정치 / 박순빈

박근혜 대통령이 총선 결과를 놓고 “국민의 민의를 겸허히 받들어서 국정의 최우선 순위를 민생에 두겠다”고 밝혔다. 18일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한 말이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도 같은 날 “민생문제 해결이 최우선 과...

  • HERI
  • 2016.04.20
  • 조회수 3044

[싱크탱크 시각] 당신이 계신 곳은 안전합니까 / 조현경

지난 14일 밤부터 16일 새벽까지 일본 구마모토현을 연이어 강타한 규모 6.5와 규모 7.3의 강진으로 17일 현재, 41명이 숨지고 3100여명이 부상했다. 약 1700채의 주택이 무너졌고, 20만채가 넘는 주택에 전기 공급이 끊겼다. 땅...

  • HERI
  • 2016.04.18
  • 조회수 3870

[한겨레 프리즘] ‘경제민주화’ 되살리려면 / 김공회

수백가지 특권을 가졌다는 국회의원들이 ‘흙수저’ 청년들에게까지 고개를 조아린다. 선거는 선거인 모양이다. 평소엔 ‘고용에의 악영향’ 따위를 들며 난색을 보이던 최저임금 인상에 대해서도 모든 정당이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고...

  • HERI
  • 2016.04.18
  • 조회수 3133

[싱크탱크 시각] 노동이 사라진 총선공약

이번 국회의원 선거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정책 경쟁이 실종되고 있다는 점이다. 선거를 채 2주도 남겨놓지 않은 현재에도 여전히 여권은 ‘진박 논란’에, 야권은 ‘후보단일화’에 파묻혀 있다. 그래서 그런지 새누리당이 아무...

  • admin
  • 2016.04.04
  • 조회수 26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