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03650_20161215.JPG
긴축 
마크 블라이스 지음, 이유영 옮김/부키·2만2000원

경제학자에겐 두 가지 편견이 따른다. 하나는 경제학자라면 경제에 대해 무조건 잘 알리라는 것이다. 이웃에 경제학자라도 살면 ‘대체 이 불황은 언제 끝나는 거죠?’라고 대뜸 묻고 싶은 사람들이 많겠지만, 맞든 틀리든 이런 질문에 답을 준비하고 있는 경제학자는 그리 많지 않다. 반대로, 경제학자는 경제만 알 것이라는 편견도 있다. 사람들은 경제학자가 음악 이야기를 할 때, 사회학자나 정치학자가 그러는 걸 볼 때보다 더 놀라는 것 같다.

이런 편견 때문일까? 오늘 우리가 겪는 장기불황을 그럴싸하게 설명해주면서 철학이나 역사에도 정통한 경제학자가 특히 매력적으로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마크 블라이스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게다가 그는 재미있다. 한 인터뷰에서 “나는 죽음이나 침울함 속에서도 유머를 찾으려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적도 있다.

<긴축: 그 위험한 생각의 역사>에서 블라이스는 그런 자신의 매력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이 책에서 블라이스는 2008년 이후 세계경제의 위기와 불황이 장기화되는 이유를 ‘긴축’이라는 열쇳말로 설명한다. 동시에, 이 ‘긴축’이라는 잘못된 처방의 기원을 17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추적한다. 존 로크와 데이비드 흄이 나오는 경제학 책이라니, 멋지지 않은가!

긴축(austerity)이란 한마디로 ‘허리띠 졸라매기’다. 아버지가 직장에서 해고되면 가족 외식을 못 하는 것, 그것이 긴축이다. 이렇게 온 가족이 합심해 아껴 쓰는 동안 아버지가 새 일자리를 구하면 상황은 서서히 회복된다. 이렇게 긴축은 경제적 위기에서 벗어나는 좋은 해법이다.

하지만 늘 그렇지만은 않다. 보통 가족이란 혈연과 사랑으로 맺어진 공동운명체로 여겨지지만, 부모가 힘들게 번 돈을 철없는 자식이 흥청망청 쓰는 사례는 적지 않다. 이 경우 부모와 자식의 이해관계가 같다고 볼 수 없으며, 이런 집은 아무리 긴축을 해도 사정이 나아질 리가 없다.

가정 경제라는 측면에서 이런 경우는 예외일 수 있지만, 한 나라로 보면 오히려 일반적이다. 흔히 ‘국민’이라고 불리는 단위는 ‘가족’에 견줘 훨씬 더 이질적이고 이해관계 상충이 크다. 노동자와 그를 고용하는 사업주, 돈을 빌린 사람과 빌려준 사람, 도시민과 농어민, 남성과 여성, 청년과 장년 등의 이해관계가 같을 리 없다. 그러니 기본적으로 ‘긴축’이 침체에 빠진 한 나라의 경제를 살리는 데 좋은 해법이 되기 어려운 까닭은, 단순히 이렇게 이해관계가 천차만별인 집단이 똑같이 허리띠를 졸라매게 만들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지난 2008년 위기 때는 금융기관이 ‘철없는 자식’ 노릇을 톡톡히 했다. 저 철부지를 위해 대량해고를 일삼고, 힘없는 서민들에게 허리띠를 더 조여 매라고 강요했던 것이 바로 ‘긴축정책’이었던 것이다.

긴축정책은 이렇게 불공정하기만 한 게 아니다. 그것은 국민경제를 침체에서 건져 내고 다시금 성장궤도에 올려놓는 데에도 실패했다. 그 과정에서 엄청난 비용을 선량한 국민들이 치렀다. 또한 금융기관의 파산을 막으려 국가가 나선 결과 국가부채가 늘었는데, 긴축정책의 옹호자들은 국가부채 증가의 주범으로 복지국가를 내세웠다. 복지 축소 때문에 서민은 이중으로 쪼들렸다. 블라이스는 차라리 금융기관들을 망하게 놔두는 편이 나았으리라고 말한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간다. 긴축에 호소하지 않고 금융기관을 살리는 방법은 없을까? 있다. 세금을 더 걷으면 된다. 하지만 이 세금부담의 주체가 서민들이라면 긴축과 다를 바가 없으리라. 따라서 최고소득계층에 대한 증세, 자산보유에 대한 적극 과세 등이 적절하다. 이런 해법, 왠지 낯설지가 않다. 그렇다. 피케티가 <21세기 자본>에서 내놓은 것이다. 훌륭한 사람들은 이렇게 서로 통한다.

김공회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 g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