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칼럼

김공회 연구위원.JPG


기본소득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 듯하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똑똑하지만 게으르고 불만 많은’ 일부 젊은이들의 ‘투정’ 정도로 치부되던 게 기본소득이었다. 기본소득 지지선언은 야권 정치인에겐 진보적 색채를 선명히 뽐내는 기호로, 여권 정치인에게는 ‘반(反)박근혜’를 드러내는 소극적인 표지로까지 작용하는 듯하다.

사태가 이러하니, 꽤 오래전부터 존재해온 진보진영 내의 전통적인 기본소득 비판론의 입지가 난처해졌다. 이런 비판들은 기본소득론은 자본주의 경제의 작동 메커니즘에 대한 몰이해에 근거해 있다는 매우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차원에서부터, 비용 문제를 너무 쉽게 본다거나 정부의 역할을 무시하는 무정부주의적 발상이라는 등의 실무적 또는 정치적 차원에까지 걸쳐 있다.

그렇지만 기본소득론에 비판적인 ‘정통 좌파’라도 현실에서 시행 중인 기본소득 성격이 있는 개별 정책들의 의의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추상적이고 잘 정의된 이념의 세계와 달리 현실은 늘 질퍽한 ‘시궁창’임을 그들도 모르진 않으니 말이다. 여기서는 어떤 정책에 대한 판단은 그것의 이념적 지향점이 무엇이냐는 것보다는 그것이 지금 당장 대중의 물질적 삶을 풍요롭게 하고 정신을 사회적으로 고양시키는 데 기여하느냐 여부에 더 의존한다. 물론 그러한 기여란 상대적이어서, 현실이 더 ‘시궁창’일수록 용인의 범위는 넓어지게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우리 사회에서 기본소득의 대표적 형태로 간주되는 노인에 대한 기초연금이나 ‘청년수당’은 기본소득에 대한 입장과 상관없이 진보진영의 보편적인 지지를 받을 자격이 있다.

하지만 이것이 기본소득 지지자들에게 ‘희소식’인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그들은 기초연금이나 청년수당이 정말로 그들이 지지하는 기본소득인가를 아주 진지하게 자문해야만 한다. 첫째, 그런 정책들은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인공지능에 의한 일자리 위협에 따라 불가피해진 것인가? 아니다. 현재의 청년고용대란은 인공지능이 아니라 자본의 무제한적 이윤추구에 따른 고용 양극화, 새로운 고부가가치 영역으로의 생산과 고용의 고도화 실패 등의 결과일 뿐이다. 이 와중에 일자리도 줄기보다는 늘고 있다.

둘째, 그것들은 전통적인 복지국가 모델의 한계를 진보적으로 극복하기 위한 것인가? 아니다. 한국을 ‘복지국가’라고 보기도 어려울뿐더러 기초연금과 청년수당은 국가가 과감한 복지정책 시행을 주저하고 그 효과성도 낮기 때문에 ‘차라리 돈을 주자’는 차원에서 도입된 것에 가깝다. 청년일자리 사업에 배정된 중앙정부 예산(2016년) 약 2조원을 청년들에게 나눠주면 1인당 얼마를 줄 수 있다는 식의 선정적인 가정들이 난무하지만, 애초 2조원은 청년일자리 문제를 해결하기엔 턱없이 적은 액수다. 기초연금 또한 실제 그 상당 부분이 의료비로 지출되고 있음을 보면, 그 인기는 공공의료체계 미비를 방증할 뿐이다.

지금 한국에서 도입 중인 기본소득 성격의 정책들은 아사 직전의 환자에게 투여되는 영양주사 같은 것이다. 이 환자에게 정상적인 삶을 돌려주려면 좀 더 근본적이고 장기적인 처방이 필요하다. 현실의 경제에서 결국 그것은 국가의 역할, 곧 적극적인 복지정책의 시행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국가 역할이 충분히 확대·강화되고 나아가 부작용까지 일으킬 때 비로소 ‘진정한’ 기본소득 제도가 가능할 것이다. 적어도 이것이 우리가 부러워하는 서구 ‘선진국’의 경험이다.



김공회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 gg@hani.co.kr


등록: 2016-08-21 18:02수정: 2016-08-22 14:29
한겨레에서 보기: 등록 :2016-08-21 18:02수정 :2016-08-22 14:29
첨부
서비스 선택
댓글
로그인해주세요.
profile image
powered by SocialXE
List of Articles

숨겨진 일자리

[유레카] 박근혜씨가 대통령직에서 파면된 뒤로 대선 후보들 간 공약 경쟁이 뜨거워지고 있다. 각 후보는 장밋빛 일자리 창출 방안들을 쏟아내고 있다. 그러나 왠지 희떠운 소리로 들린다. 안팎 경제 상황으로 봐서는 고용 ...

  • HERI
  • 2017.03.16
  • 조회수 2277

대선의 출발, 4·16 그날

[한겨레 프리즘] 대한민국 여기저기에서처럼, 그날 밤 우리 동네에서도 뜨거운 파티가 열렸다. 겨우내 촛불 드느라 수고한 서로를 위로하고 축하했다. 삼년 전 그날의 참사가 없었다면 서로 비껴갈 인연들이었다. 세월호 이후의 ...

  • HERI
  • 2017.03.13
  • 조회수 2094

재벌 경영권은 챙기고 소비자 권익은 외면하는 공정위

[Weconomy | 주수원의 협동조합 A to Z] 국회가 마련한 생협 공제사업 허용 법률, 6년여 만에 공정위는 ‘바꾸자!’ 생협 매장에서 물건을 고르는 생협 회원.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마침...

  • admin
  • 2017.02.24
  • 조회수 2541

[유레카] 위대병 증후군

우리 속담에 ‘사주에 없는 관(冠)을 쓰면 이마가 벗어진다’는 말이 있다. 타고난 자질이나 능력이 없는데 벼슬을 맡으면 머리칼이 빠진다는 것으로, 제 분수에 넘치는 일을 맡으면 도리어 괴롭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속담에...

  • HERI
  • 2017.02.09
  • 조회수 2122

[한겨레 프리즘] 진짜 ‘이적행위’ / 김공회

페이스북 트위터 공유 스크랩 프린트 크게 작게 김공회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 <러시아 혁명>이라는 절판된 책을 대중이 읽기 쉽게 인터넷에 올렸다는 이유로 사람이 잡혀갔다. 러시아혁명 100주년이 되는 해 벽두에 벌어...

  • admin
  • 2017.01.09
  • 조회수 2459

[토요판] 법인세 논쟁, ‘자원배분 왜곡’ 바로잡는 차원에서 봐야

페이스북 트위터 공유 스크랩 프린트 크게 작게 [토요판] 뉴스분석 왜? 법인세 실효세율 논란 자료사진" alt="세액감면이 대기업에 집중되다 보니, 일부 대기업의 실효세율이 그보다 작은 규모의 기업에 비해 낮아지는 기현상이...

  • admin
  • 2017.01.09
  • 조회수 2425

[토요판] 특집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2017년이 기억해야 할 교훈들

페이스북 트위터 공유 스크랩 프린트 크게 작게 [토요판] 특집 2017년과 세계 ▶ 2017년. 누구는 민주화운동 30년으로, 또 누구는 박정희 100년을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시야를 확장하면, 지구촌의 2017년은 다른 얼굴로 다...

  • admin
  • 2017.01.05
  • 조회수 2604

【HERI 쟁점진단】사회보험도 없는 비정규직 499만, 그들은 누구인가?

페이스북 트위터 공유 스크랩 프린트 크게 작게 【HERI 쟁점진단】 비정규직의 57.8%, 건강보험-국민연금-고용보험 ‘직장가입’ 모두 제외돼 통계청 경제활동인구부가조사(2005 vs. 2015) 분석 결과 비정규직 문제인가, 영세사업장...

  • admin
  • 2016.12.21
  • 조회수 2317

【HERI 쟁점진단】노동자 임금상승률은 떨어지고 불평등은 커져

페이스북 트위터 공유 스크랩 프린트 크게 작게 【HERI 쟁점진단】 ILO ‘세계임금보고서’ 발간…기업간·기업 내부 불평등 심화 기업간 불평등과 기업내 불평등 현상 동시에 나타나…최저임금 인상, 초기업 단체교섭 촉진 등 ...

  • admin
  • 2016.12.21
  • 조회수 2283

경제 위기에 서민이 ‘호구’되는 이유

페이스북 트위터 공유 스크랩 프린트 크게 작게 긴축 마크 블라이스 지음, 이유영 옮김/부키·2만2000원 경제학자에겐 두 가지 편견이 따른다. 하나는 경제학자라면 경제에 대해 무조건 잘 알리라는 것이다. 이웃에 경제학자라도 ...

  • admin
  • 2016.12.21
  • 조회수 1737

[한겨레 프리즘] 혐오와 물신주의 / 김공회

페이스북 트위터 공유 스크랩 프린트 크게 작게 김공회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자본주의를 정치와 경제라는 양대 영역으로 구분하는 것은 근대사상사의 오랜 전통이다. 이 둘은 서로 꽤 명확히 ...

  • admin
  • 2016.12.15
  • 조회수 1770

‘뜨는 동네’ 서촌 지키는 지역공동체 | 청년이 바라본 주민자치 ⑨ 종로구 주민네트워크

‘뜨는 동네’ 서촌 지키는 지역공동체청년이 바라본 주민자치 ⑨ 종로구 주민네트워크 페이스북 트위터 공유 스크랩 프린트 크게 작게 지난 10월 통인시장 고객센터에서 정홍우 통인커뮤니티 대표가 동국대생들에게 ‘통인시장 어제...

  • admin
  • 2016.12.08
  • 조회수 2017

[한겨레 프리즘] 세계화의 종말? / 김공회

페이스북 트위터 공유 스크랩 프린트 크게 작게 김공회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 누가 당선되든 예정된 수순이긴 했다. 미국의 보호무역주의로의 회귀 말이다. 그래도 오바마 정부가 한참 공들여 키운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

  • admin
  • 2016.11.15
  • 조회수 1569

[한겨레 프리즘] 세계화의 종말? / 김공회

페이스북 트위터 공유 스크랩 프린트 크게 작게 김공회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 누가 당선되든 예정된 수순이긴 했다. 미국의 보호무역주의로의 회귀 말이다. 그래도 오바마 정부가 한참 공들여 키운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

  • admin
  • 2016.11.15
  • 조회수 1444

[유레카] 더불어 행복 / 박순빈

사람들은 즐겁고 만족스러운 상태일 때 흔히 “행복하다”고 한다. 즐거움과 만족이 행복의 모든 조건일 수는 없다. 여러 조건 가운데 일부일 뿐이다. 그런데 즐거움과 만족의 충족을 매우 중시하는 학자들이 있다. ‘이기적인 ...

  • admin
  • 2016.11.11
  • 조회수 1258

[한겨레 프리즘] 노벨상 잡상/김공회

밥 딜런의 노벨 문학상 수상은 신선한 충격이었지만, 역설적이게도 노벨 문학상 존립에 대한 의문도 던져준다. 이미 세계적 스타인 밥 딜런 같은 이가 상을 받아서 인류가 얻을 이익이 무엇일까? 앞으로는 사람들이 그의 음악...

  • admin
  • 2016.10.16
  • 조회수 1634

국가경쟁력 떨어뜨리는 ‘노사간 협조’, 누구 책임인가?

【세계경제포럼(WEF) 경쟁력보고서】 한국 ‘노사간 협조’, 꼴찌에서 4번째…2008년 이후 ‘정부 무능’ 탓 세계경제포럼(WEF)의 ‘2016~17년 경쟁력보고서’가 28일 나왔다. 우리나라 전체 순위는 26위로, 역대 최하위 수준에서 3...

  • admin
  • 2016.09.29
  • 조회수 2139

국가경쟁력 떨어뜨리는 ‘노사간 협조’, 누구 책임인가?

페이스북 트위터 공유 스크랩 프린트 크게 작게 【세계경제포럼(WEF) 경쟁력보고서】 한국 ‘노사간 협조’, 꼴찌에서 4번째…2008년 이후 ‘정부 무능’ 탓 세계경제포럼(WEF)의 ‘2016~17년 경쟁력보고서’가 28일 나왔다. 우리나...

  • admin
  • 2016.09.29
  • 조회수 1966

급속하게 늘고 있는 ‘혼자 사는 중년들’

인구주택총조사에서 드러난 40~50대 1인 가구 증가세, 다른 연령층 압도 가구 구성의 변화 추이(1980~2015), 자료: 통계청 10년이면 강산도 몰라보게 달라지는 것처럼, 사람들의 삶에 대한 가치관이나 사회경제적 환경도 빠르게...

  • admin
  • 2016.09.28
  • 조회수 2302

급속하게 늘고 있는 ‘혼자 사는 중년들’

인구주택총조사에서 드러난 40~50대 1인 가구 증가세, 다른 연령층 압도 가구 구성의 변화 추이(1980~2015), 자료: 통계청 10년이면 강산도 몰라보게 달라지는 것처럼, 사람들의 삶에 대한 가치관이나 사회경제적 환경도 빠르게 ...

  • admin
  • 2016.09.28
  • 조회수 21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