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칼럼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지난해 12월26일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상식 회복 공약-성장과 복지의 선순환’ 관련 기자회견을 하기 전 마스크를 벗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지난해 12월26일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상식 회복 공약-성장과 복지의 선순환’ 관련 기자회견을 하기 전 마스크를 벗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경제사회연구원장·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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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열린 첫 대선 후보 텔레비전 토론회에서 이재명 후보의 질문에 윤석열 후보가 “알이(RE) 100이 뭐냐”고 되묻는 장면은 토론회 뒤에도 널리 회자했다. 민주당은 기후위기에 대한 윤 후보의 인식이 부족하다 공격했고, 국민의힘은 장학퀴즈 하냐고 반박했다. 대선 토론회가 전문용어 겨루는 자리는 아니지만, 모르면서 당당한 것은 남사스럽다.



리더가 갖출 덕목은 ‘깨알 지식’보다는 식견일 것이다. 식견은 ‘학식과 견문. 즉 사물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다.(표준국어대사전) 관심이 있어야 찾아보고, 아는 만큼 보이는 게 세상 이치다. 이런 ‘축적의 시간’을 거쳐 자신의 관점이 생기면, 사안의 경중과 선후를 분별하는 안목이 열린다. ‘콘텐츠가 있는 사람’이란 평을 듣는다.


윤 후보는 정책의 세부 내용을 모르거나, 실언을 자주 해 곤경을 치렀다. 일부 유권자에겐 이런 모습이 지식 부족을 넘어 식견 부족을 드러낸 거로 보일 것이다. 부동산 정책이 최우선이라면서도 청약제도에 대해 거듭 오답을 내고, 탈원전 정책을 거세게 공격하면서 에너지 전환은 잘 모르는 것 같고, 디지털이 중요하다면서 대학생들 앞에서 “앞으로 휴대폰에 앱을 깔아 구인·구직하는 시대가 온다”는 어리둥절한 말을 하기에 그렇다.

식견이 있는 리더는 세세한 것은 몰라도 무엇이 중요한지는 안다. 참모에게 송곳처럼 질문하고 토론하며 균형 잡힌 결론을 내릴 줄 안다. 소통도 이런 점에서 식견의 문제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대면보고를 거의 받지 않았다. 독대 한 번 못하고 청와대를 나오는 수석비서관도 있었다. 2015년 초 기자회견에서 “대면보고가 부족한 것 아니냐”는 기자의 질문에 전화와 이메일이 있는데 굳이 대면보고 받을 일이 뭐 있냐고 반문했다. 이어 배석한 장관들을 돌아보고 웃으며 “그게 필요하다고 생각하세요?”하고 물었다. 나중에 ‘문고리 3인방’과 최순실의 은밀한 조력을 받아 국사를 판단한 것으로 드러나, 대통령이 ‘콘텐츠가 부족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보여줬다.

물론 전문가의 보좌를 받아 잘 판단하면 된다는 이들도 있다. 그러면서 드는 예가 전두환 전 대통령과 김재익 경제수석의 일화이다. 김재익은 군복에서 양복으로 막 갈아입은 전두환의 경제 가정교사였다. 미국 유학을 하고 돌아와 경제기획원 기획국장을 할 때 고시 출신 엘리트 관료들에게 짓눌려 있던 기억이 있어 경제수석 제의를 받고 망설였다. “여러 말 할 것 없어,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 전두환은 힘을 실어줬다. 김재익은 1983년 아웅산 테러로 타계하기까지 안정화, 시장화에 초점을 둔 경제 운용으로 전환기 한국경제의 방향을 잡은 인물로 평가된다. 윤석열 후보도 정치 초보 이미지가 부담됐는지, 전두환-김재익 모델을 높이 사는 말을 했다. 지난해 10월 전두환을 찬양해 여론의 뭇매를 맞게 되자, “그런 위임의 정치를 하는 게 국민을 편안히 모시는 방법이란 취지였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이런 역사의 삽화가 식견이 부족한 리더를 방어해주지는 않는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좋은 조언이란 누가 하든 상관없이, 근본적으로 군주의 지혜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못박는다. 현명하지 않은 군주가 여러 조언을 듣게 되면, 이해관계가 상충하게 마련인 주장들을 조정할 수 없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총리와 장관에게 권한을 주고 밀어줄 필요가 있지만 “00은 당신이 대통령이야”가 무슨 요술 주문일 리는 없다. 전두환의 경제적 성과는 ‘3저 호황’ 같은 기막힌 외부 호재와 관료, 노동계, 시민사회를 찍어누르는 권위주의 정권이어서 가능했다는 평가도 있다. “머리는 빌려도 건강은 못 빌린다”던 김영삼 전 대통령은 말년에 “우리 경제의 펀더맨털은 튼튼하다”는 경제 관료의 보고를 철석같이 믿다 외환위기를 당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경제정책을 언급할 때 자신의 언어로 말하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 결과가 지금 같은 부동산 가격 급등일 것이다.

세력 갈등의 한복판에 놓인 한반도 주변 외교와 남북관계, 기후위기, 불평등, 디지털 전환 등 할 일은 태산인데 세상의 변화는 빠르다. 학습능력이 뛰어나도 알만하면 하산길인 게 임기 5년의 대통령이다. 부동산 정책 실패에 대한 응징 정서가 강하고, 후보의 도덕적 흠결이 크게 부각되다 보니 정책적 식견은 부차적으로 보이는 선거를 치르고 있다. 이번 대선이 ‘커다란 뒷걸음’으로 보이는 이유이다.

bhlee@hani.co.kr


한겨레에서 보기 :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3056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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