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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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사회학자 카난과 법학자 프리그는 기업·정부·공직자 등이 공적 관심사나 쟁점에 대해 자신에게 반대하거나 불리한 주장을 하는 것을 위축시킬 목적으로 제기하는 소송을 ‘전략적 봉쇄소송’이라고 정의했다. 전략적 봉쇄소송은 헌법상 표현의 자유와 국민의 알권리를 침해하는 반사회적 행위이다. 특히 언론을 겨냥한 봉쇄소송은 대기업·정부·정치인에 대한 감시와 비판 같은 공익적 활동을 위축시킨다.


통상적인 소송은 원고가 승소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하지만 봉쇄소송은 명예훼손 등을 앞세워 상대방에게 경제적 부담, 두려움, 고통을 안겨줘 활동을 포기하도록 하는 게 목적이다. 또 통상적인 소송의 원고는 법원의 신속한 판결을 원한다. 그러나 봉쇄소송은 최대한 시간을 끌어서 추가 행동을 차단하는 효과를 극대화하려 한다. 매출이 수조원에서 수천억원에 달하는 대기업으로서는 언론 보도를 막을 수 있다면 수천만원에서 수억원 정도인 변호사 비용은 오히려 싸다고 생각한다.

치킨 프랜차이즈 비에이치씨(BHC)가 다수 언론을 겨냥해 명예훼손을 이유로 민사소송과 형사고소를 남발하는 것은 언론의 입을 막으려는 전형적인 ‘전략적 봉쇄소송’이라는 지적을 받는다. 비에이치씨는 지난 3년 간 자신의 갑질과 비리를 보도한 <한겨레>와 <한국일보> 등 4개 언론사와 기자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한겨레>와 <한국일보>에 대한 청구액은 각각 10억원에 이르고, <한겨레>에 대해서는 형사고소까지 병행했다.


최근 이런 봉쇄소송에 쐐기를 박는 판결이 나왔다. 서울고등법원은 14일 비에이치씨가 <한겨레>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 소송 항소심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린 1심 선고를 그대로 인정했다. 앞서 서울동부지방법원은 2020년 12월 “‘비에이치씨가 가맹점에 공급하는 해바라기유의 올레산 함량이 60.6%에 그치는데도 고올레산 해바라기유라고 가맹점주와 소비자를 기만하고, 부당하게 고액의 가격으로 원재료를 공급하는 갑질을 저질렀다’는 <한겨레>의 2019년 3~4월 보도가 허위이고 명예훼 손이라는 비에이치씨 의 주장은 인정하기 어렵다 ”고 판결했다. 비에이치씨가 대법원에 상고할 수 있지만, 상고심은 1·2심과 달리 법리 해석을 주로 하기 때문에 결과가 뒤집힐 가능성은 희박하다. 검찰이 2019년 형사 고소에 대해 명예훼손 혐의가 없다며 불기소 처분한 것에 이어 봉쇄소송이 사실상 실패로 끝난 것이다.


비에이치씨는 가맹점의 인테리어 비용 분담 의무 위반(2018년), 가맹점주의 권리 보호를 위해 설립된 가맹점협의회 소속 가맹점주에 대한 부당한 계약 해지(2021년)로 공정위로부터 두번이나 제재를 받은 ‘상습 갑질 기업’이다. 그런데도 봉쇄소송으로 인해 비에이치씨에 대한 언론의 감시와 비판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언론이 봉쇄소송에 위축되지 말고 ‘정론·직필’의 자세를 유지하면 된다는 시각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거액의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당한 기자와 언론사로서는 “일단 재판이 끝나고 보자”는 소극적 자세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다.


언론 자유가 중요하다고 해서 언론의 부당한 횡포나 오보까지 정당화할 수는 없다. 언론 보도에 대한 정당한 방어권도 존중돼야 한다. 하지만 갑질 기업이 반성은커녕 언론에 재갈을 물리기 위해 소송을 남발하는 것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 미국에서는 캘리포니아주 등 여러 주에서 전략적 봉쇄소송을 규제한다. 우리나라도 안호영·박주민 의원 등이 비슷한 취지의 민사소송법 개정안 등을 발의했으나, 국회 문턱을 못 넘었다. 제도적 개선과 함께 봉쇄소송을 남발하는 기업의 제품은 사지 않는 국민의 ‘현명한 선택’도 요구된다.


곽정수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기자 jskwak@hani.co.kr

한겨레에서 보기 : https://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102855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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