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칼럼
[문진수의 사회적 금융 이야기]
지방자치 의제는 중앙 집권식 공약이 아닌
지역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정책 설계 필요

언스플래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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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철이다. 후보들이 전국을 돌아다니며 표를 달라고 호소한다. 정책들이 쏟아진다. 하지만 유권자들에게 정책은 멀고 인물은 가깝다. 정책은 늘 거기서 거기 같다. 이해관계가 있는 주제만 살펴볼 뿐, 다른 것엔 관심이 가지 않는다. 대선 후보자 캠프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 만한 ‘뜨거운’ 공약을 찾는 일에 온 신경을 집중한다. 선거라는 게임이 본래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대통령 선거에 제출하는 공약은 모두 긴급하고 중요한 국가적 의제다. 주택 공급, 소상공인 지원, 청년실업 해소, 전염병 차단 등 풀어야 할 과제가 산더미다. 양쪽 진영의 정책을 살펴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모두 중앙 집권식이다. 보충성의 원리가 빠져 있다. 정책을 만들고 제도를 설계하는 건 중앙의 일이고, 지방과 그 아래 풀뿌리는 만들어진 것을 따르면 된다는 식이다.


지역은 중앙의 식민지가 아니다. 풀뿌리는 지키고 보호해야 할 자원이지 통치의 대상이 아니다. 지금은 왕조 시대가 아니다. 하지만 통치방식은 근대와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자치를 말하면서도 풀뿌리가 번창하려면 무엇이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모르는 것 같다. 지역과 지방의 지속가능성을 도모하는 큰 그림이 없다.


우리나라에 마이크로크레디트(microcredit) 사업이 도입된 건 2000년 무렵이다. 무담보 소액대출을 통해 빈곤층과 취약계층의 자립과 자활을 돕는 방식이다. 민간 비영리 단체들이 한국식 모델을 만들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효과가 입증되자 정부가 이 사업을 공공 영역으로 끌고 들어가 ‘미소금융’이라는 이름으로 전국 단위 사업으로 전개했다. 그 결과 비영리 단체들은 존폐 위기에 몰렸지만 정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전부를 뭉뚱그려 한 통에 넣으려는 전체주의적 사고.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획일화된 프레임. 정책 생산자와 관료들 대다수가 여전히 이 논리에 포섭돼 있다. 발밑을 들여다보지 않고 현장을 살피지 않는다. 숙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설익은 정책들이 비용편익 분석의 형식적 시험대를 통과해 손쉽게 만들어진다. 포장지는 그럴듯하지만 내용물은 하자가 많다. 그마저도 시효가 짧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길게 보고 가는 게 없다.


사회적 경제 영역을 살펴보자. 고용노동부는 사회적 기업, 행정안전부는 마을기업, 기획재정부는 협동조합, 보건복지부는 자활기업, 중소벤처기업부는 소셜벤처를 관할한다. 본디 유전자가 같은 사회적 경제 기업들이 정부 부처 아래 따로따로 매달려 있다. 정부가 짜놓은 수직적 전달체계 아래에서 사회적 경제 조직들은 이산가족처럼 따로 살아간다. 수평적 연대와 통합적 접근이 보이지 않는다.


사회적경제 조직 관할 정부 지원체계
사회적경제 조직 관할 정부 지원체계

연대의 힘은 연결과 신뢰에서 나온다. 같이 밥을 먹고 이야기를 섞으며 다른 이의 신발에 내 발을 넣어볼 때 비로소 상대를 이해하게 된다. 미래를 함께 도모할 수 있는 신뢰의 끈이 만들어지려면 그런 시간의 겹이 쌓여야 한다. 중앙에서 제도를 설계해 아래로 내린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아래에서 위로 힘이 모여야 튼튼한 공동체가 만들어진다.


많은 이가 지방소멸을 걱정한다. 수도권과 중앙에만 자원이 쏠리는 현상을 우려한다. 문제도 해법도 간단치 않다. 이 문제의 본질은 자원 배분이 아니다. 중앙과 지역의 역학 구도를 바꾸는 것이 먼저다. 지역이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지원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설계해야 한다. 중앙이 모든 걸 틀어쥐고 풀뿌리와 지방을 변화하는 방식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


금융 의제도 간과되고 있다. 지역과 지방을 살리는 금융 생태계를 설계해야 한다. 독일은 16개 주 모두에 지방정부가 소유한 공공은행이 존재한다. 주 정부와 공공기관으로부터 예금을 받고 이들 기관이 필요로하는 자금을 제공해준다. 미국은 대형 은행들이 매년 순이익의 일정 부분을 낙후된 지역에 투자하도록 법으로 강제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엔 지역을 위한 금융체계가 없다.


대선에서 누구를 찍어야 할까. 자치의 힘을 믿는 후보에게 표를 주자. 이미 유통기한이 끝난 재료를 가지고 뻔한 조리법으로 똑같은 음식만 생산하는 정책이 아닌, 현장에서 걸러진 재료로 신선한 요리를 만들겠다고 말하는 후보를 밀어주자. 풀뿌리와 지역을 살리는 것이 해법이라는 이야기에 공명하는 후보를 응원해주자. 민주주의의 꽃, 선거가 코앞이다.


문진수 사회적금융연구원장


한겨레에서 보기 : https://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102374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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