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스플래쉬
“ 빌려준 돈은 반드시 회수해야 한다. ”
대금업자 사무실에 걸려있을 법한 이 표어는 정부의 각종 기금에도 적용된다 . 정책금융기관과 지방자치단체가 운영하는 사회투자 성격의 지원기금도 예외가 아니다 . 정부의 사회적 금융 활성화 방안 (2018 년 ) 에 힘입어 많은 정책금융기관과 여러 지자체에서 사회적 경제를 지원하기 위한 기금을 운용하고 있다 .
그리고 이 기금들 대부분이 ‘ 융자성 기금 ’ 이다 . 무이자나 낮은 금리로 사회적 경제 기업들에 돈을 빌려준다 . 지원하는 대상에 따라 보조금이나 투자 등을 섞어 맞춤형으로 설계하는 방식은 쓰지 않는다 . 따라서 이 기금에는 필요한 곳에 빌려주되 원금은 반드시 돌려받아야 한다는 꼬리표가 붙어 있다 . 원금을 회수하지 못하면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이다 .
이 업무를 맡은 공무원은 기금 정책이나 관련 규정에 손실을 어떻게 처리한다는 근거가 없으면 단돈 1 원이라도 손해가 나지 않도록 행동할 것이다 . 다른 여지가 없다 . 결과적으로 기금 운용은 화석처럼 딱딱하게 굳어지게 된다 . 이는 기금 운용과 관리를 민간에 위탁해도 마찬가지다 . 위탁한 기관에 손실 책임을 묻는 방식으로 위험이 이전될 뿐이다 .
기금도 시민의 세금으로 조성된 것이므로 기금 운용을 허투루 해서는 안 된다는 건 당연하다 . 문제는 사회투자 성격의 지원기금이 다른 기금들과 다르게 손실 발생 위험을 태생적으로 안고 있다는 점이다 . 따라서 이 기금을 융자 목적으로 사용코자 한다면 손실 문제를 해결할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 . 그렇지 않으면 기금을 만든 취지와 목적이 훼손될 것이기 때문이다 .
하지만 손실 문제에 대한 대책을 수립한 곳은 보이지 않는다 . 빌려준 돈은 모두 ‘ 차입 ’ 이기 때문에 반드시 갚아야 하고 , 그렇지 못하면 변상 책임을 지라는 으름장만 놓고 있다 . 이런 방식으로는 사회변화를 촉진할 수 있는 모험 투자는 꿈꿀 수 없다 . 결국 사회적 가치를 창출할 잠재력을 지닌 기업과 조직 상당수는 배제될 것이 자명하다 .
기금은 조성 목적에 따라 운용하는 방식이 다르고 또 달라야 한다 . 돈을 갚을 수 있다고 판단되는 기업 , 수익 창출 가능성이 큰 사업에만 돈을 빌려주는 건 은행이 하는 일이지 사회변화를 촉진하기 위해 만든 기금의 역할이 아니다 . 금전적인 잣대만 가지고 기금을 운용해선 안 된다 . 기금이 창출하는 사회적 가치를 해석할 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 .
이 대목에서 풀어야 할 숙제 두 개가 생긴다 . 하나는 ‘ 왜 이 기금만 손실을 인정해야 하는가 ?’ 이고 , 다른 하나는 ‘ 어떻게 손실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 이다 . 전자는 정책의 영역이다 . 시장도 정부도 풀지 못하는 사회문제를 사회적 경제와 사회혁신을 통해 해결하는 과업에 의미를 부여하고 시민적 공감대를 끌어내야 한다 . 법률과 조례 제정이 필요하다 . 후자는 다양한 접근법이 있다 . 정부와 지자체에 손실기금을 만들어도 되고 , 공적 보증제도를 활용해도 된다 . 핵심은 손실 위험을 이전 하는 것이다 . ‘ 손실 측정을 어떻게 할 것인가 ?’ 에 대한 연구도 필요하다 . 모든 손실을 다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가치를 창출한 부분에 대해서만 손실을 인정해 상계 ( 相計 ) 하는 방식을 적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

사회투자 활성화를 위한 정부의 역할 개요도
정부의 역할은 사회투자의 촉매자 가 되는 것이다 . 시장금융이 받으려 하지 않는 위험을 인수 또는 이전함으로써 이 영역에 돈이 흐를 수 있도록 촉진 하는 기능을 담당해야 한다 . 단언컨대 지금의 운영방식으로는 사회투자 영역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지 못할 것이다 . 붕어빵의 틀이 바뀌지 않으면 붕어빵의 모양은 언제나 같을 수밖에 없다 .
현실의 금융 시스템은 비가 오면 우산을 빼앗고 비가 그치면 우산을 주는 방식으로 움직인다 . 신용점수가 낮은 사람에게는 인색하고 신용점수가 높은 사람에게는 너그럽 다 . 자본주의 시장에서 금융 공백 은 피할 수 없는 현상이다 . 하지만 이 공백이 방치되면 사람들이 위험에 처하고 , 사회를 바꾸려는 시도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 공백을 메우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다.
문진수 사회적금융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