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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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이름에 이코노믹스(경제학)의 뒷부분을 붙인 합성어는 특정 정부의 차별화된 경제정책을 함축하는 용어다.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의 ‘레이거노믹스’가 대표적이다. 감세, 정부지출 축소, 규제 완화 등 공급 중시 경제정책을 내걸었다. 유효수요 확대를 위한 정부 역할을 강조한 케인스식 경제정책과 대조를 이룬다.

한국에서는 김대중 대통령의 ‘디제이(DJ)노믹스’가 시초 격이다.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과거 권위주의적 관치경제의 틀을 깨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강조하며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을 표방했다.

‘작은 정부, 큰 시장’을 앞세운 이명박 대통령의 ‘엠비(MB)노믹스’는 ‘비즈니스 프렌들리’(친기업)가 키워드였다. 박근혜 정부의 ‘근혜노믹스’는 ‘일자리 중심의 창조경제’라는 국정 목표와 경제민주화라는 시대정신을 버무렸다. 문재인 대통령의 ‘제이(J)노믹스’는 소수 수출 대기업 중심의 불균형 성장모델에서 탈피한 새로운 경제패러다임으로 ‘포용성장’(소득주도성장)을 제시해 차별화했다.

언론은 윤석열 당선자에게도 ‘와이(윤석열)노믹스’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 그의 공약집은 경제정책으로 ‘행복경제시대, 성장과 복지의 선순환’, ‘공정과 상식의 회복, 대한민국 정상화’ 등 2개 분야에 걸쳐 좋은 일자리, 규제 혁파, 공정 사회, 부동산 정상화 등 12개 과제를 제시했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차기 정부가 새롭게 추구하려는 자기만의 경제철학이나 비전, 정책을 찾기 힘들다. “성장과 복지의 선순환”은 현 정부가 소득주도성장을 강조하며 했던 얘기다. “역동적 혁신성장으로 … 양질의 일자리 창출”이나 “규제 혁신으로 신산업 육성”, “시장과 민간 중심 경제”도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수없이 들었던 해묵은 구호다. 이미 시효가 끝난 ‘시장만능’이나 ‘신자유주의’와 어떻게 다른지도 모호하다. 결국 이전 정부에서 조금씩 차용해 짜깁기에 그친 인상이다. 불평등, 코로나, 기후위기, 디지털 전환과 같은 시대적 과제에 대한 대책도 조각조각 파편화되어 인상적이지 않다. 당선자의 철학과 가치가 담긴 시대정신을 제시하는 데도 실패했다.

그러다 보니 문재인 정부의 기존 정책을 180도 뒤집는 정책들이 더 주목받는다. 주택공급 확대, 세금 인하, 금융규제 완화로 요약되는 부동산정책이 대표적이다. 남이 지은 집을 무너뜨리기는 쉽지만, 편안하고 안전한 새 집을 짓는 것은 어려운 법이다. 윤 당선자는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 실패를 비판하며 대선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새 정부가 과거를 뒤집는 것만으로 성공할 수는 없다. 그게 가능했다면 역대 정권마다 부동산정책의 실패를 반복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경제정책이 성공하려면 올바른 방향. 적절한 정책. 뛰어난 관리 능력의 3박자가 잘 어우러져야 한다. ‘제이노믹스’는 정책 방향은 옳았으나 최저임금 인상, 주52시간제 등을 추진하면서 중소기업과 자영업, 고용에 미칠 악영향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반면 ‘엠비노믹스’는 전형적인 방향 착오였다. 대기업의 성장 과실이 전체 국민으로 흘러가는 ‘낙수효과’가 끊기면서 양극화와 불평등이 심화하는 상황에서 공정경제, 경제민주화 대신 친기업을 내걸었으니 결과는 자명했다. 집권 중반기 대-중소기업 상생에 초점을 맞춘 동반성장 정책으로 급선회했다.

윤 당선자는 검찰총장 사임 116일 만에 초고속으로 대선 도전에 나서다보니 불가피했다고 변명할 수도 있다. 곧 출범하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설계도 없이 100층 짜리 초고층 건물을 짓거나, 나침반도 없이 항해에 나서는 것 같은 일이 생겨서는 안 된다. 문재인 정부는 5년 전 인수위도 없이 출범한 “개문발차 정권”이라고 표현했다. 윤석열 정부는 그런 변명이 안 통할 것 같다.

곽정수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기자 jskwak@hani.co.kr


한겨레에서 보기 :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3489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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