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칼럼

한귀영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정책센터장


2004415일은 한국 진보정치사에서, 아니 한국 정치사에서 역사적인 날이다. 이날 한 시대가 가고 한 시대가 시작됐다. 민주노동당이 총선에서 지역구 2, 비례대표 8석을 얻어 원내에 처음 진출했다. 비례 8번으로 막차를 탄 이가 노회찬이었다. 비례대표 마지막 한 자리를 놓고 새벽까지 이어진 혈투 끝에 김종필이 탈락했다. 5·16쿠데타 주역 김종필이 퇴장한 자리에 진보정치의 상징 노회찬이 등장했다. 이후 그는 유머와 촌철살인의 화법으로 대중과 소통하며 진보정치의 매력과 가능성을 한껏 보여주었다. 그 노회찬이 떠난 지 1년이다.

 

사회운동도 어렵지만 정치도 어렵다. 이상이 아닌 현실에서 최선과 차선, 심지어 차악을 추구해야 하는 탓이다. 권력과 영광이라는 보상만큼이나 고통스러운 윤리적 도전을 감당해야 한다. 노회찬은 그 힘든 길에서 인간적 풍모, 매력을 유지하면서 나날이 전진할 수 있도록 스스로와 인생 전체를 걸었던 사람이다. 그는 진보와 정치 사이의 좁은 오솔길에서 진보의 이상과 척박한 현실 사이의 접점을 부단히 탐색했다.


그가 구현하고자 했던 진보적 가치는 노동시장 안에서는 국가가 노동자를 보호하고 노동시장 밖에서는 든든한 사회안전망이 떠받치는 사회, 즉 북유럽식 사민주의에 가까웠다. 진보정당은 이를 구현할 도구였다. “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당은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고 마지막 말을 남겼다.


노회찬 없는 정의당의 미래는 어떨까? 당장 내년 4월 총선이 분수령이 될 것이다. 최근 조사에서 정의당 지지도는 9% 안팎에서 안정된 3위를 유지하고 있다. 40~50대가 핵심 지지층이다. 고학력, 고소득의 중산층에서 지지도가 높고 지역적으로도 고른 지지를 얻고 있다. 반면 60대 이상과 20대에서 취약하다. 40대 이상의 정치적 선호는 비교적 안정적이다. 오랜 경험과 판단 속에서 형성된 정치적 선택인 탓이다. 지금의 지지도가 쉽게 허물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15년 전 진보정당이 처음으로 원내 진출하던 시기를 복기해보자. 2004년 민주노동당의 지지도는 12~17%를 유지했고, 강력한 양당체제에서 의미있는 대안으로 등장했다. 청년층이 핵심 지지기반이어서 30, 20대 순으로 지지가 높았다. 고질적 지역주의가 한국 정치의 가장 큰 균열축이던 시기, 지역주의에 기대지 않고 계층·의제를 중심으로 민심을 대변했다는 평가도 높았다. 당시 민주노동당 지지층에는 진보층은 물론 합리적 보수 등 양당체제에 만족하지 못하는 층도 다수 포함됐다.


이후 진보정당은 많은 부침을 겪으며 변화했다. 지지기반이 안정적인 반면 확장성 면에서는 한계가 적지 않다. 지지층은 당과 함께 나이를 먹었다. 청년을 끌어안지 못하면 진보정당의 미래는 어둡다. 서민과 노동자의 대변자를 자처하지만, 현실적 지지층은 중산층, 고소득층, 화이트칼라층이다. 대변하려는 층과 실제 지지층 간 괴리가 제법 크다.


무엇보다 공정과 평등이라는 진보정당의 핵심 가치가 청년세대에게 의심받고 있다. 지난해 평창올림픽 아이스하키 남북단일팀 구성 과정에서 극적으로 드러났듯이 청년세대의 공정성 감각은 진보가 지켜온 감각과 다르다. 경쟁 속에서 나고 자란 청년세대에게 공정함의 요체는 경쟁 규칙의 공정함이다. 청년들도 비정규직이 만연한 불평등 세상에 분노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하지만 동일한 경쟁 절차 없는 정규직 전환은 더 불공정한 처사라고 믿는다. 경쟁 절차 자체의 계급적 폭력성을 비판해온 진보정치가 어떻게 청년세대를 설득할지가 큰 숙제다.


그래도 내년 총선은 진보정당에 기회가 될 수 있다. 선거제도 개혁의 성사가 가장 큰 관건이지만, 자유한국당의 퇴행적 행보에 대한 불만과 민주당의 독주를 견제하려는 민심 사이에서 정의당의 기회가 열릴 수 있다. 막말과 혐오를 일삼으며 정치불신을 조장하고 심지어 한-일 갈등이 격화되는 국면에서조차 문재인 정부 때리기에 골몰하는 자유한국당의 행태는 보수층에서도 외면받을 가능성이 높다. 2016년 총선 이후 대선, 지방선거에서 연거푸 승리한 민주당이지만, 집권 후 성과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4연승을 거둘지는 불확실하다.


진보정치의 역량이 시험대에 올랐다. 노회찬 없는 진보정당을 평생의 경쟁자이자 영혼의 벗 심상정이 이끈다. 심 대표와 그의 동지들이 걸어갈 새로운 오솔길을 주목한다.


hgy4215@hani.co.kr


한겨레에서 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0337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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