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10.04.05 수정: 2014.10.21
경영은 통찰이다. 통찰력을 완성하기에 데이터만으로는 부족하다. 오랫 동안 숙성된 지혜가필수적이다. 그 지혜는 쉽게 정형화되지 않는다. 비정형적인지혜는 결국 경험과 직관을 지닌, 사람에게서 나온다. 그래서 경영은 사람이다. 숫자와 실증을 강조하는 MIT에서조차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내가MBA과정에 입학했을 때의 미국 경영계는 엔론 사태의 충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미국을대표하는 기업 중 하나로 인식되다가 투자자 기만행위 등의 혐의로 수사를 받으며 한 순간에 파산하고 만 엔론은, 스피드와효율성을 신주단지처럼 모시던 재계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엔론은 한 때 미국 자본주의의 기린아로칭송 받았다. 이 기업의 신사업 포착과 빠르고 과감한 전략을 모두들 배우고 싶어했다. 파산 직전 해에 미국 경제잡지 포춘은 이런 점을 인정해 엔론을 “가장존경 받는 기업”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신화가 하루아침에 무너진 것이다.
비즈니스스쿨에서는 그 충격을 극복하려는다양한 움직임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야기는 한 마디로 압축됐다. “사람이전략이다." MBA과정에 들어서는 날부터 그 곳을 떠나는 날까지, 이 메시지는 끊임없이 반복됐다.
"Put People above Profit"
조직을 기계처럼 생각하고 인수합병이나 구조조정을 떡 주무르듯할 수 있는 것처럼 가르치던 과거 MBA 교육에 대한 반성은 이미 대부분 비즈니스 스쿨에서 시작됐다. 그것은 주가가 폭등하고 인터넷 붐이 일고 천문학적 액수의 인수합병이 일어나던1990년대 후반, 분기실적에 따라 수천 수만 명의 직원을 아무렇지도 않게 잘라내던 그거품 시기의 경영 관행에 대한 반성이기도 했다. 그 모든 것은 바로 내일의 주가 상승을 위해서 이뤄졌었다.
내일의 주가 상승을 위한 경영 관행은 급기야 엔론 사태를낳았다. 투자자를 모으기 위해 주가를 올려야 했고, 주가를올리기 위해 실적을 조작해야 했고, 그것을 위해 수많은 불법과 편법을 동원해야 했다. 그게 바로 엔론 스캔들의 본질이었다. 경영자가 10년 뒤의 기업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일의 주가를 신경쓰기시작하면서부터 모든 비극이 시작된 것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장기적’인 관점이다. 먼 미래를 생각한다면,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업문화이고 기업윤리다. 기업의 내부 의사결정과정을 지배하는 조직문화, 그리고 외부 사회와의 관계를 규정짓는 윤리. 이 두 가지를 만드는것은 역시 숫자가 아니라 사람이다. 기업이 사람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고민, 기업이 주주나 사회에 대한 책임을 어떻게 질 것인가 하는 고민은 물론 이런 반성의 끝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전략”이라는 말이 나온다.
조선 상인과 MIT MBA
“장사는 이문을 남기는 게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게야.” 최인호씨가 쓴 소설이고 드라마로 제작돼 큰 인기를 끌었던 <상도>의 주인공 임상옥에게 그의 정신적 스승 홍득주가던진 말이다. 임상옥은 평생 이 뜻을 받들어 장사를 한 끝에 조선 후기 최대의 거상으로 자라났다. 18세기 말 조선의 상인이 받들던 이 말을 다시 만난 건 21세기초 미국 MIT MBA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었다.
MBA 과정 오리엔테이션에서 슬론 스쿨(MIT의 경영대학) 학장 리쳐드 슈말렌지의 소개를 받고 연단에 오른찰스 베스트 MIT 총장의 입에서는 이런 말이 흘러나왔다. “Put people above profit.” (사람을 이익보다 소중히 하라) 오리엔테이션 첫 날, 첫 번째 강연, 첫 마디였다. 익숙하면서 동시에 낯설었다. 사람을 이익보다 소중히 하라는 가르침이 <상도>에서들어 익숙한 것이었는데도 낯설었던 이유는, 그 자리가 미국 최고의 과학도들이 모여든 MIT라는 학교였기 때문이다. 그 MIT의경영대학인 슬론 스쿨MBA 신입생 전체를 놓고 2년 간의 교육 방향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나온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MBA’는그 어떤 학위보다도 개인의 이익보다는 기업 조직의 전략과 이익을 중시하는, 시장과 ‘정글의 법칙’을 가르치는 곳 아니었던가?‘MIT’는 그 어느 학교보다도 기술과 과학을소중히 하는 곳 아니었던가? 아닌 게 아니라 MIT슬론 스쿨 역시 그 어느 비즈니스 스쿨보다도과학을 소중히 하던 학교다. 실제로 MBA 과정은 출발부터단순한 경영학이 아닌 ‘경영과학’을 지향했다. 모태가 된 과정은 20세기 초 MIT의 ‘공학경영’(Engineering Administration)이었고 창시자 알프레드 슬론(GM 전 사장)은 “현대기업 경영 현장의 복잡한 실제 문제들을 과학적으로 푸는 것을 지향”하며 학교를 열었다. 수학과 통계학 등계량적 방법론을 가장 앞장서서 경영 현장에 접목시킨 학교이기도 하고, 경영자를 지향하는 하이테크 기업기술자들이 가장 가고 싶어하는 학교이기도 하다.
그런 학교에서 첫 마디부터 과학도 아니고 기술도 아니고 사람을 소중히 하라니.그것도 경영의 궁극적 목표인 이익보다도 소중히 하라니. “조선의상인이 MIT보다 200년을 앞섰구나” 하는 생각에 감개가 무량하기도 했지만 낯설게 들린 것도 당연했다.
“사람을 남기는 장사”를가르친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서 오리엔테이션 전체를 휘감고 있는 ‘사람’이라는 주제가 그저 구호인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문제는 MIT에서만 관심을 가진 주제가 아니라는 사실도 알게 됐다. 최고 명성을 자랑하는 경영대학원 교수들이 앞다퉈 이 분야 연구에 나서고 있다. MIT와 이웃한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뉴욕의 콜롬비아대 경영대학원, 프랑스의 유명한 경영대학원 인시아드 등 세계 각지 톱스쿨 MBA과정에서는“기업윤리”나 “기업과 사회” 같은과목을 개설하고 윤리교육을 강조한 교과과정을 선보이고 있다.
유수한 기업 경영자나 정계의 리더들도 이런 움직임에 동참하고 있었다. 슬론스쿨의 동문이기도 한 전 HP 최고경영자 칼리 피오리나는 “기업의지속 가능한 가치는 신뢰에서 나온다” 면서 기업과 사회의 관계를 강조했다. HP를 포함해 마이크로소프트, 나이키 등 유수한 기업들이 속속 기업내에 사회책임경영 담당부서를 따로 두고 부사장 급 책임자를 배치하고 있다.
이런 움직임에는 정계나 시민단체들의 공도 크다. 정치권이나 시민단체들이기부나 환경경영 등 사회 책임 경영활동 지출에 대한 세금 공제 등 각종 인센티브를 제안하고 있다. 역시슬론 스쿨 동문인 코피 아난 UN 사무총장 역시 기업의 관심사가 “주주에서이해관계자들로, 한 가지의 (재무적) 가치에서 다양한 (사회적) 가치들로, 재무제표에서 균형 잡힌 발전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회계장부를 조작하며 투자자들을 속이다 파산한 엔론이나 월드콤이 몰고 온 기업투명성 스캔들, 그리고 자신들의 고객 기업들을 위해 터무니없는 기업분석 보고서를 써대던 월 스트리트 애널리스트들의 비도덕성스캔들이 비즈니스 세계에 몰고 온 위기감은 이렇게 컸다. 경영 이론가들이 모여 있는 세계 유수 경영대학들을포함해 기업가, 정치가들이 순식간에 사람과 윤리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경영 패러다임을 만들자는 깃발아래 뭉쳤다.
200년 전 한국의 상인이 생각해냈던 것을 이제야 생각하는 미국 비즈니스스쿨을 보며 감개무량해하던 나는, 이런 사정을 속속들이 알게 되면서 오히려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미국 자본주의는 도덕성스캔들이 터지자 마자 뿌리를 근본부터 돌아보고 치료에 나섰다. 기업가, 금융권, 학계, 정치권 모두가 순식간에 힘과 아이디어를모았고 불과 2~3년 만에근본적인 변화가 시작됐다. 미국 자본주의의 무서움, 또는위대함이 여기 있다. 소름 끼칠 정도의 적응력이다. 그럼 한국 사회는 급변하는 현실에 얼마나 제대로 적응하고 있을까? 다시한 번, 소름이 돋았다.
* 단행본 'MIT MBA 강의노트'의 일부를 수정, 보완한 글입니다.
* '단행본 공개 프로젝트'의 일환입니다.
이원재 한겨레경제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