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칼럼

[착한경제] 한-EU FTA 읽는 법

HERI 2014. 11. 11
조회수 3442

등록: 2010.10.11 수정: 2014.11.11


한국과 유럽연합(EU)이 자유무역협정(FTA)에 서명했다. 언론에는 국책연구소 보고서를 인용한 전망이 넘쳐난다. 국민총생산(GDP)가 10년간 5.6%가 늘어난다는 둥, 무역수지 144억달러 흑자 효과가 있다는 둥 장밋빛 일색이다.


10년뒤 GDP 예측은 허망한 숫자놀음


사실, 경제 효과 예측이란 뜯어보면 매우 허무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측은 몇 개의 자의적인 가정에서 출발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목표를 설정해 놓고 그 결과가 나오도록 가정을 덧붙여 숫자를 만들어 내기 일쑤다. 상식적인 가정에서 출발하는 경우는 그래도 좀 나은데, 그래도 예측은 어렵다. 시장 참여자들이 연구자의 가정과는 달리 움직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운 독립적 연구기관도 제대로 예측하기 어려운데, 정부 정책 효과에 대한 국책연구기관의 예측이야 더 말할 것도 없다. 한-유럽연합 자유무역협정의 효과 예측, 특히 장기 효과 예측은 마찬가지일 가능성이 높다.


한 켠에서는 이런 예측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도 높다. 목표를 설정해 놓고 자의적인 가정을 덧붙여 숫자를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일리가 있는 이야기다. 가정을 조금 바꾼다면 숫자는 모두 바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경제 예측 자체가 얼마나 신빙성을 가질 수 있느냐에 대해서 의심을 가져볼 수도 있다. 경제는 역동적이다. 참여자들의 움직임에 따라 바뀐다. 참여자가 예측자가 미리 설정해 둔 것과 다른 기준에 따라 움직이면,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심드렁하게 의미 없는 장기 예측 수치들을 지나친 뒤, 협정문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봤다. 그랬더니, 분명 매우 큰 장기적 효과를 가져올 한 장이 있었다. 바로 13장, '무역과 지속가능발전' 조항이다. 미래의 수입과 수출에는 제품의 가격과 쓰임새 뿐 아니라, 생산 기업이 추구하는 사회적, 환경적 가치도 큰 영향을 끼치리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조항이다.


환경/노동권, 공정무역, 윤리적소비, 사회책임경영(CSR)을 강조한 무역협정


주목할 만한 표현이 여러 군데서 나온다. 이번 한-유럽연합 자유무역협정에서 두 당사자는 '단순한 경제성장만이 아니라 경제, 사회, 환경이 균형있게 발전해야 한다는 지속가능발전의 목적에 기여하는 방식으로 국제무역의 발전을 증진하겠다'고 약속했다. 특히 협정문에는 서로의 노동이나 환경 기준을 적정한 선에서 조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노동과 환경 기준을 함께 강화하는 데 노력하겠다고 쓰여 있다.


더 구체적으로 보면, 노동 기준은 1998년 국제노동기구(ILO)의 선언을 준수하는 것이라고 특정되어 있다. 1998년 국제노동기구 선언은, 결사의 자유, 단체교섭권, 강제근로 금지, 아동노동 금지, 차별 철폐를 핵심노동기준으로 채택했다. 단연 눈에 띄는 것은 결사의 자유다.


한국 사회에는 결사의 자유에 대한 매우 큰 편견이 아직도 남아 있다. 한국 대표기업이 공공연하게 '비노조 경영'이라는 경영 방침을 내세우는 것이 사회적으로 용인될 정도로 인식 수준이 낮다. 노동자가 노동조합을 통해 권리를 주장하고 협상하고 경영에 참여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유럽 문화와 대조적이다. 이런 한국 문화를 변화시키지 않으면 새 무역 질서에 적응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또 눈여겨볼 점은 환경 관련 제품에 대한 호의적인 약속이다. 친환경 제품은 다른 제품보다 우선적으로 관세를 철폐하겠다고 이 협정은 약속하고 있다. 또 환경기술제품과 재생가능한 에너지 제품, 에너지 효율적 제품 등에 대해서는 비관세 장벽 역시 우선 철폐하기로 약속했다.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공정무역, 윤리적 소비, 사회책임경영(CSR)을 강조한 곳이었다. 두 협정 당사자는 협정문에 '공정무역'과 '윤리적' 제품 및 사회책임경영 기업 제품의 무역을 촉진하고 증진하기로 약속했다. 앞으로 생산자를 고려하는 공정무역 제품, 사회적 가치 실현을 경영의 주 목적으로 하는 사회적기업, 사회책임경영에 나서는 영리기업에게 더 큰 사업기회가 열릴 것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정부, 기업, 시민사회 모두 개입과 대응 필요


이런 모든 사항을 실현하기 위해, 반드시 시민사회와 대화를 하고 감시를 받는 매커니즘을 도입할 것을 협정문에 명시한 것도 인상적이다.


시장은 제품과 서비스만 거래되는 곳이 아니다. 문화와 사회적 가치가 동시에 교류되는 곳이다. 시장의 통합은 가치와 문화의 통합도 수반한다.


자유무역협정에서도 사회적 가치가 논의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자유무역협정에 대한 대응에도, 사회적, 환경적 가치와 관련된 것이 더해져야 한다.


한 -유럽연합 자유무역협정 시대에 대응하기 위해, 정부와 지자체가 먼저 구매에 지속가능성 개념을 도입해야 한다. 가격과 품질 이외에, 납품기업의 환경과 사회 기여도를 평가하는 '지속가능한 정부조달기준'을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또 사회적기업 제품, 공정무역 제품 등 환경 및 사회적 가치를 생각한 제품을 우대하는 공공기관 구매 기준을 만들어야 한다.


이렇게 해서 더 많은 기업이 경제, 환경, 사회를 생각한 경영을 하도록 유도해야만, 지속가능발전을 고려한 한-유럽연합 자유무역협정 틀 안에서 한국이 경쟁력을 갖게 될 것이다.


기업은 이제 사회책임경영을 본격적으로 도입하지 않으면 경제적 생존과 성장도 어렵게 된다는 점을 다시 한번 되새겨야 한다. 일부 대기업의 활동이라고 여겨지던 사회책임경영활동이, 이제 수출하거나 수출기업에 납품하는 중견, 중소기업의 이슈로 확대된다는 사실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시민사회는 한-유럽 자유무역협정이 지속가능발전을 지향하는 방향으로 실제 흘러가도록 이 의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무역은 관료와 기업의 일이라고 내버려 둘 일이 아니다. 한-유럽연합 자유무역협정문에서 보듯, 자유무역협정에서는 사회적 가치가 논의되기 시작했다. 이런 흐름을 더 강화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어떤 세상을 후손에게 물려줄 것인가


"장기적으로 볼 때, 우리는 모두 죽는다." (In the long run, we're all dead) 경제학자 케인즈가 '당장은 시장이 불균형 상태인 것처럼 보이지만 국가가 개입하지 않고 가만히 놓아 두면 장기적으로는 균형을 달성한다'고 주장하는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을 비꼰 말이다. 그런데 '장기적으로 몇 % 성장 달성' 등의 예측을 내놓는 경제학자, 즉 이번에 FTA 보고서를 내놓은 분들을 비꼰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마치 향후 10년 간의 국민생산 증가율을 예측한 국책연구소를 비꼬는 것처럼 들린다는 이야기다.


장기적으로 볼 때, 국민총생산 성장률이나 무역흑자 예측은 모두 허망한 숫자놀음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지속가능발전에 대한 한국과 유럽연합의 약속은 장기적으로 우리 삶에 강력한 영향을 끼칠 것이다.


장 기적으로 볼 때, 우리는 모두 죽는다.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 후손과 그들에게 물려줄 지구마저 죽여서는 안 된다. 10년 뒤 우리 소득이 1% 늘어날지 5%가 늘어날지보다는, 10년 뒤 우리가 어떤 사회, 어떤 환경 안에서 살게 될 것인지가 더 중요하다. 이번 협정 내용 중 가장 장기적으로 우리 삶에 영향을 끼칠, ‘무역과 지속가능발전’ 조항의 의미를 되새겨야 하는 이유다.


<한겨레> 10월 9일치 '세상읽기'에 쓴 칼럼의 원본입니다.



이원재 한겨레경제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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