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칼럼

뉴스를 읽을 때도 ‘넛지’가 필요해

admin 2017. 11. 27
조회수 5979
이봉현의 책갈피 경제

넛지
리처드 세일러·캐스 선스타인 지음, 안진환 옮김
/리더스북(2009)

<넛지>의 내용을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지난 10월 공동 저자 중 한명인 리처드 세일러 미국 시카고대학 교수가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을 때 여러 매체에서 서평을 다시 내보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사람들은 체계적으로 틀린다. 그 틀리는 방식을 잘 연구해 활용하면 개인과 사회를 유익하게 할 수 있다”는 <넛지>의 통찰을 언론과 독자의 관계에 적용해 보려 한다.

책에 나오는 한 실험 결과를 보면, 학교 급식실에서 음식의 진열만 바꾸어 놓아도 학생들이 몸에 좋은 음식을 최대 25%까지 더 먹는다고 한다. 저자는 이런 넛지 활용을 ‘자유주의적 개입주의’라 부른다. 사람들의 선택권을 지나치게 제한하지 않으면서도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결과를 유도한다는 의미다.

신문과 방송의 뉴스는 저자의 표현대로 하면 ‘자유주의적 개입’을 한 사례다. 언론인이 시급성, 공공성 등의 기준에 따라 뉴스를 고른 뒤 중요한 순서대로 크기를 달리해 배치한 것이다. 영양사가 몸에 유익한 음식을 눈에 잘 띄게 배열하고, 입만 즐거울 뿐인 음식은 눈을 돌려야 볼 수 있는 구석에 둔 배식대에 비유할 수 있다. 신문을 펼치거나 텔레비전 뉴스를 볼 때는 관심을 끄는 뉴스뿐 아니라 그 옆에 있는 내용도 한두개 같이 보거나 듣게 된다. 비록 맛은 없을지 모르나 몸에 필요한 음식을 먹는 것과 같다.

반면, 온라인 뉴스는 무작위로 늘어놓은 뷔페식당과 같다. 신문?방송 뉴스가 묶음으로 소비된다면 온라인 뉴스는 단품으로 선택된다. 온라인 뉴스라는 뷔페에선 당근이나 시금치 같은 음식에는 아무래도 손이 잘 안 가고, 영양은 적지만 칼로리가 높은 음식을 편식하기 쉽다. 언론도 이런 변화를 재빨리 알아채고 자극적인 뉴스 생산을 늘려왔다.

균형 잡힌 판단을 위해 다양한 의견과 정보를 골고루 접하는 게 여전히 중요하지만, 현실은 반대로 흘러간다. 사람들은 온라인에서 이미 가진 생각과 취향을 확인하고 강화하는 방향으로 뉴스를 소비한다. <넛지>에도 소개된 인간의 ‘확증편향’, 즉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경향이 온라인에서는 한층 강화된다. 여기에 에스엔에스(SNS)에서 친구끼리 뉴스를 추천하고 ’좋아요’를 누르며 격려하는 ’메아리방 효과’까지 더해지면 편향된 의견이 신념으로 굳어지게 된다.

인터넷이 처음 등장했을 때 우리는 민주주의의 새 지평이 열릴 것이라며 들떴다. 언론과 엘리트의 오만과 독주를 깨고, 보통 사람에게 발언권을 돌려줌으로써 숙의민주주의가 네트워크에서 활짝 피어날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걱정하는 것은 디지털 포퓰리즘과 그에 따른 민주주의의 위기다. 지난해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이나 그 몇달 앞서 벌어진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결정도 유권자의 ‘확증편향’이 강하게 작용한 사례다. 정확한 정보와 균형 잡힌 토론이 없이 건강한 민주주의는 가능하지 않다. 그렇다고 디지털이 이미 우리 삶의 일부가 된 마당에 올드미디어의 향수에 젖어 있을 수는 없다. ‘달달한’ 뉴스만 찾는 독자들이 건강한 시민성에 필요한 정보를 쉽게 접하게 하는 넛지(선택 설계)는 무엇일까?

이봉현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 bhlee@hani.co.kr

원문보기: 
서비스 선택
댓글
로그인해주세요.
profile image
powered by SocialXE
List of Articles

[한겨레 프리즘] 20대의 잘못이 아니다 / 한귀영

한귀영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정책센터장 평창올림픽이 개막하고 메달 레이스가 시작되었다. 승자에게 박수를 보내지만, 패자에게 더 큰 감동을 느낄 때도 있다. 규칙에 승복하는 경쟁이 주는 감동 덕분일 것이다. 불공정으로 찌...

  • admin
  • 2018.02.12
  • 조회수 5565

협동조합은 협동조합 다워야 한다

Weconomy |이봉현의 책갈피경제 한국협동조합협의회 펴냄 (2017) 신협 등 대형 협동조합 선거마다 과열, 혼탁 협동조합 본래의 가치, 정체성, 원칙 되새겨야 지난 1월19일 오전 코트야드메리어트 서울 남대문에서 열린 전국사회연대...

  • admin
  • 2018.02.09
  • 조회수 5853

기업들은 지금 사회적 가치 ‘열공’ 중

Weconomy | 이봉현의 책갈피 경제 <빅프라핏>, 신현암·이방실 지음/흐름출판(2017) 네슬레의 농학자들이 커피 묘목을 살펴보고 있다. 네슬레의 농학자들은 다수확 묘목을 얻기 위해 연구개발을 하고, 여기서 얻은 기술을 다시 농민들...

  • admin
  • 2018.01.30
  • 조회수 5749

[유레카] 열병식, 평창 그리고 남북관계 / 이창곤

북한이 평창올림픽 개막식 하루 전날인 2월8일 건군절 열병식을 치르겠다고 발표하면서 열병식이 남북관계의 이슈로 떠올랐다. 사진은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2013년 창건 81주년을 맞아 금수산태양궁전 광장에서 열린 군사...

  • admin
  • 2018.01.29
  • 조회수 5077

[한겨레 프리즘] 세대담론의 함정 / 한귀영

한귀영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정책센터장 영화 <1987>을 계기로 그 시대 ‘주역’이던 86세대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이들은 20대 민주항쟁을 이끌었지만 여느 세대처럼 기성의 정치와 경제 질서에 잘 적응해갔다. 20세기 이후 ...

  • admin
  • 2018.01.17
  • 조회수 5876

[유레카] 북간도에서 다시 만난 '동주' / 이창곤

윤동주 탄생 100돌을 기려 지난 12월30일 찾은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 동산(東山)에 있는 윤동주의 묘소와 묘비. 무덤 왼편으로 이름 모를 묘소 하나를 사이에 두고 고종사촌이자 평생의 벗인 송몽규의 무덤이 있다. 1931...

  • admin
  • 2018.01.04
  • 조회수 6843

[한겨레 프리즘] 주거 분리의 욕망 / 한귀영

한귀영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정책센터장 내가 사는 아파트 맞은편에 꽤 큰 행복주택단지가 들어섰다. 요란하지는 않았지만 불평의 목소리가 아파트 카페에 스멀스멀 올라오기도 했다. 집값 걱정임은 물론이다. 개구리 올챙이 적...

  • admin
  • 2017.12.20
  • 조회수 5756

유로, 허약한 기초 위에 쌓은 화려한 성채

Weconomy | 이봉현의 책갈피 경제 경제학자 스티글리츠의 진단 유럽통합의 주춧돌이었던 유로 제도적 장치 미비한 단일통화 유로존 위기의 근본 원인 경제학자 스티글리츠는 제도적 장치가 미비한 채 단일통화를 시도한 유로가 유...

  • admin
  • 2017.12.12
  • 조회수 5935

[유레카] 4차 산업혁명과 사회정책 4.0 / 이창곤

김주영 한국노총 위원장이 지난 11월22일 오전 베를린에 있는 독일통합서비스노조(베르디)에서 바르바라 주제크 ‘혁신과 좋은 노동국장’과 함께 ‘노동 4.0’ 논의를 한 뒤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최근 한국노총 일행과 함께 독...

  • admin
  • 2017.12.12
  • 조회수 5726

뉴스를 읽을 때도 ‘넛지’가 필요해

이봉현의 책갈피 경제 넛지 리처드 세일러·캐스 선스타인 지음, 안진환 옮김 /리더스북(2009) <넛지>의 내용을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지난 10월 공동 저자 중 한명인 리처드 세일러 미국 시카고대학 교수가 노벨 경제...

  • admin
  • 2017.11.27
  • 조회수 5979

[한겨레 프리즘] 우리 안의 ‘갑질’ / 한귀영

한귀영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정책센터장 성심병원 갑질 사태를 계기로 직장 갑질에 대한 폭로가 분출하고 있다. 마침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과 민주노총 산하 산별연구원 모임인 산별노동연구포럼이 지난 6개월 동안 직장민주주의를...

  • admin
  • 2017.11.21
  • 조회수 5401

[한겨레 프리즘] ‘대놓고 보수’ 안철수 / 한귀영

한귀영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정책센터장 정치인과 연예인은 대중의 관심을 먹고 산다는 점에서 퍽이나 닮은 직업이다. 자기 부고 기사만 아니라면 나쁜 기사라도 반긴다며 두 직업의 비슷함을 꼬집는 말들이 적지 않다. 이들이...

  • admin
  • 2017.11.02
  • 조회수 5180

[이봉현의 책갈피 경제] 세계 경제, 변곡점에 서다

인플레이션의 시대 김동환·김일구·김한진 지음/다산북스(2017) 9년 전 이맘때, 세계는 6천억 달러의 빚을 지고 손을 들어버린 미국 투자은행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 충격에서 헤매고 있었다. 나날이 들려오는 경제 소식은 최악이었...

  • admin
  • 2017.11.02
  • 조회수 4944

[유레카] 반복지의 덫 / 이창곤

한국은 왜 경제 규모에 견줘 복지 수준이 낮을까? 국내총생산(GDP) 규모로 보면 2017년 우리나라는 세계 11위의 경제 대국이지만 복지에 쓰는 돈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소속 국가 가운데 여전히 꼴찌에 가깝다. 파이부터 늘...

  • admin
  • 2017.10.24
  • 조회수 5633

비트코인은 사기일 뿐인가?

Weconomy | 이봉현의 책갈피 경제 비트코인 현상, 블록체인 2.0 마이클 케이시·폴 비냐 지음, 유현재·김지연 옮김/미래의창(2017) 비트코인 전문기업 코인플러그가 2014년 서울 삼성동 코엑스 별관에 설치한 비트코인 전용 현금자동...

  • admin
  • 2017.09.25
  • 조회수 5598

비트코인은 사기일 뿐인가?

Weconomy | 이봉현의 책갈피 경제 비트코인 현상, 블록체인 2.0 마이클 케이시·폴 비냐 지음, 유현재·김지연 옮김/미래의창(2017) 비트코인 전문기업 코인플러그가 2014년 서울 삼성동 코엑스 별관에 설치한 비트코인 전용 현금자동...

  • admin
  • 2017.09.25
  • 조회수 6706

[한겨레 프리즘] 합리적 보수라는 미망 / 한귀영

한귀영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정책센터장 독일의 부국강병을 이끈 비스마르크는 세계 최초로 사회보험제도를 도입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강경 보수였으되 복지국가의 기초를 놓았다. 노예해방을 이끈 링컨, 자유당을 포용하고 반귀...

  • admin
  • 2017.09.25
  • 조회수 5104

[한겨레 프리즘] 합리적 보수라는 미망 / 한귀영

한귀영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정책센터장 독일의 부국강병을 이끈 비스마르크는 세계 최초로 사회보험제도를 도입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강경 보수였으되 복지국가의 기초를 놓았다. 노예해방을 이끈 링컨, 자유당을 포용하고 반귀...

  • admin
  • 2017.09.25
  • 조회수 5890

[유레카] 뒤틀린 ‘비둘기집’ / 이창곤

페이스북 트위터 공유 스크랩 프린트 크게 작게 “집은 사회생활이 유지되고 모든 재생산이 이뤄지는 중심 장소다.” <제3의 길>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앤서니 기든스의 집에 대한 정의다. 프랑스의 과학철학자인 가스통 바슐라...

  • admin
  • 2017.09.25
  • 조회수 5384

[유레카] 뒤틀린 ‘비둘기집’ / 이창곤

페이스북 트위터 공유 스크랩 프린트 크게 작게 “집은 사회생활이 유지되고 모든 재생산이 이뤄지는 중심 장소다.” <제3의 길>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앤서니 기든스의 집에 대한 정의다. 프랑스의 과학철학자인 가스통 바슐라...

  • admin
  • 2017.09.25
  • 조회수 5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