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칼럼
한귀영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정책센터장

성심병원 갑질 사태를 계기로 직장 갑질에 대한 폭로가 분출하고 있다. 마침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과 민주노총 산하 산별연구원 모임인 산별노동연구포럼이 지난 6개월 동안 직장민주주의를 주제로 실태조사를 해왔다. 보건의료, 사무금융, 공무원, 서비스 등 4개 산별노조를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는 직장에서 이루어지는 갑질의 실체, 재생산 구조를 생생히 보여준다.

그동안 직장 내 갑질의 상당 부분은 ‘직장문화’로 포장되어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문화’라는 이름 아래 직장에서 작동하는 권력관계와 그 부당한 작동도 은폐되어 왔다. 이번 조사에서는 ‘미시적 권력관계’라는 개념으로 직장 갑질의 실태를 들여다보았다.

크게 네 가지 측면으로 구분했는데, 일상적 의사결정이 민주적인가? 성희롱이나 부당한 지시 등을 지적하고 시정할 수 있는가? 퇴근, 휴가 등 일과 삶의 균형을 위한 자율성이 보장되는가? 인사 및 성과평가는 공정한가 등이다.

결과를 보면 성과평가의 공정성이 100점 만점에 39.3점으로 가장 낮았고, 일상적 의사결정의 민주성 항목도 44.1점에 그쳤다. 부당한 것에 대한 시정 요구는 55.3점, 일과 삶의 균형을 위한 자율적 결정이 61.5점으로 가장 높았다.

낙제 수준에 가까운 이런 결과가 상대적으로 고용이 안정되고 노조가 든든한 방패막이가 되는 민주노총 소속 산별노조를 대상으로 한 조사라는 사실에 주목하자. 다른 곳이 얼마나 심각한 수준일지는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산별 차이도 눈길을 끈다. 대부분의 항목에서 공무원이 가장 점수가 높고 다른 산별과의 격차도 크다. 청년들의 꿈이 왜 9급 공무원인지를 실감하게 된다. 보건의료노조는 항목과 관계없이 가장 낮았고 일상적 의사결정의 민주성은 38.4점으로 특히 낮았다. 심층인터뷰에 응한 간호사 출신 노조 간부는 심지어 직원 간 폭행도 종종 있다고 토로했다. “폭언·폭행한 사람은 자기가 무얼 잘못했는지 모른다. 선배로부터 그렇게 받아왔고,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여겨왔기 때문이다.” 직장 갑질이 경영진의 갑질을 넘어 선임 노동자의 갑질이라는 중층적인 구조 속에 놓여 있음을 보여준다.

사무금융노조의 경우도 의미심장하다. 임금도 높고 복지도 좋아 소위 높은 ‘스펙’이 요구되는 선망의 직장이지만 조사 결과는 일상적 의사결정의 민주성, 성과평가의 공정성 모두 가장 낮게 나타났다. “폭언, 폭행 문제가 발생하면 피해자의 맷집, 멘탈이 나쁘다는 식으로 호도하고, 피해자를 탓하는 구조가 존재한다”는 사무금융노조 간부의 지적이 뼈아프다. 게다가 기업은 갑질을 시스템화한다. “중간관리자는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랫사람들을 강하게 쪼게 된다.” 갑질을 안 하면 낙오하는 구조 속에서 혼자 착하게 살 수는 없다. 갑질을 욕하는 우리 역시 갑질 구조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는 성찰이 절실하다.

노동이 불행한데 우리 삶이 존엄할 수는 없다. 행복할 수도 없다. 이번 조사는 강력한 노조의 보호를 받는 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조차 일상적으로 훼손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비정규 불안정 노동자들의 삶이야 말해서 무엇 하랴. 장시간 노동, 부조리한 의사결정, 미시폭력이 우리 삶을 황폐하게 만든다. 이 일터의 부조리함이 가정으로, 마을로, 사회로 전이되어 간다.

‘촛불’이 일어난 지 1년이 지났다. 광장 민주주의의 기억을 소중히 간직하되 일상에 스며든 권위주의, 부조리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민주주의가 멈춘 그곳이 바로 변화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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