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칼럼
한귀영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정책센터장

독일의 부국강병을 이끈 비스마르크는 세계 최초로 사회보험제도를 도입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강경 보수였으되 복지국가의 기초를 놓았다. 노예해방을 이끈 링컨, 자유당을 포용하고 반귀족 법안을 수용한 처칠, 알제리 독립을 받아들인 드골, 모두가 자기 진영의 반대를 무릅쓰고 담대하게 ‘선제적 개혁’에 나선 보수 정치인들이다. 보수주의 정치사회학자 로버트 니스벳의 <보수주의>에 나오는 사례들이다. 역시 탁월한 보수 정치인으로 거명된 영국 총리 디즈레일리는 “정치가란 본질적으로 실제적 인물”이라고 강조했다. 자기 이데올로기에 얽매이지 말라는 말이다.

보수주의자가 아니어도 이런 사례들이 부러울 때가 있다. <한겨레>의 미르재단 보도와 <제이티비시>(JTBC)의 태블릿피시 보도 등으로 박근혜 정부 국정농단 사태가 백일하에 드러난 지 벌써 일 년. 그사이 천만 촛불이 타올랐고, 탄핵과 문재인 정부 출범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한국 보수는 몰락했다. 그 자리를 합리적인 개혁보수가 대체하기를 바라는 열망도 커져갔다.

하지만 합리적 보수의 가능성은 요원해 보인다. 갤럽의 정기조사 결과는 상징적이다. 8월 4주차와 비교해 문재인 대통령 지지도는 79%에서 70%로 하락했지만 제1반대당 자유한국당 지지도는 10~11%에 머물러 있다. 자칭 합리적 보수 바른정당은 6~7%로 사정이 더 딱하다. 역대 정부에서 대통령 지지도와 제1야당 지지도는 대개 반비례했다. 대통령에게 실망한 층이 제1야당을 선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정치 동학이다. 지금 이 동학이 멈춘 이유는 간단하다. 개혁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무시하고 무조건 반대를 일삼고 있기 때문이다. 언제라도 자유한국당으로 돌아갈 것만 같은 바른정당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잠시 가출한 듯한 태도로 국민의 마음을 얻을 수는 없다.

합리적 보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이때, 마침 계간지 <문화과학> 가을호의 특집 ‘한국 우익의 형성’이 흥미롭다. 한국 우익의 역사적 계보, 뉴라이트, 우익 대중운동 등 유용한 관찰지들이 펼쳐진다. 그중 조형근 한림대 연구교수의 ‘합리적 보수는 언제 올까?’라는 글이 인상적이다. 에드먼드 버크, 새뮤얼 헌팅턴, 니스벳 등을 인용하며 보수주의의 본질을 통찰한다. 보수주의 유토피아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보수주의에는 사회주의, 민주주의, 자유주의 등 다른 모든 이데올로기가 가진 ‘정치사회가 조직되어야 하는 방법’에 대한 비전이 없다. 그래서 보수주의에는 유토피아가 없다. 보수주의는 급진적 변화를 막기 위해 불가피한 변화를 수용하되, 그 속도를 조절하여 균형을 취하려는 정치적 실천들의 집합이었다. 즉 보수주의는 이념에 얽매이지 않는 실용주의적 태도에 가깝다. 현대 보수주의의 타락은 하이에크식 자유시장 이데올로기를 수용하면서 보수주의와는 가장 거리가 먼 것, 즉 관념적 이데올로기가 된 결과라는 것이다.

논문의 주장을 수용한다면 보수세력에게 던질 질문은 이렇다. 현실에는 존재하지도 않는 자유시장 따위의 관념에 집착하면서 수구세력으로 몰락할 것인가? 아니면 양극화 타파라는 불가피한 시대적 과제를 진보세력보다 더 담대하고 선제적으로 실천하되, 속도 조절을 통해 사회적 균형을 추구할 것인가?

정당성 있는 견제세력의 존재는 문재인 정부의 성공을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아니, 대한민국의 성공을 위해서 꼭 필요하다. 이 중대한 과제를 위해 보수주의자들이 할 일은 보수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의 미망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툭하면 보수주의를 입에 올리는 버릇부터 버려야 한다. 버려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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