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칼럼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9월 미국 뉴욕에서 열린 글로벌 펀드 제7차 재정공약회의를 마친 뒤 대화를 나누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9월 미국 뉴욕에서 열린 글로벌 펀드 제7차 재정공약회의를 마친 뒤 대화를 나누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이봉현 | 경제사회연구원장 겸 논설위원

반도체·자동차·배터리(2차 전지). 한국 경제의 현재와 미래 먹거리다. 요즘처럼 이 핵심산업의 앞날이 불안한 적이 없었다. 미국이 어디로 튈지 몰라서다. 미국은 지난해 만든 반도체 지원법, 인플레이션 감축법의 후속 조처를 잇달아 내놓고 있다. 중국을 억누르고, 자국의 산업 생태계를 복원하려는 의도다. 최근 발표한 전기차 보조금 수혜 대상 차종은 미국 차 일색이고, 현대·기아차는 제외됐다. 배터리 소재 원산지 규정, 반도체 보조금 수혜 기준이 발표될 때도 가슴을 졸이며 지켜봐야 했다.

미국은 확실히 변했다. 세계를 경영하는 풍모나 ‘자애로운 패권국’ 같은 허울은 벗어던졌다. 산업정책을 노골적으로 쓰고, 교역을 제한한다. 패권국으로 올라선 이래 한 세기 가까이 확장해온 규칙 기반의 자유무역 질서를 제 손으로 허물고 있다. 모든 면에서 다른 도널드 트럼프와 조 바이든 전·현직 대통령이 일치하는 게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우방과 함께 ‘신뢰 가치사슬’을 새로 만든다지만 기준이 모호하다. 우방을 특별히 봐주는 것 같지도 않다. 포드가 세계 최대 배터리업체 중국 닝더스다이(CATL)의 기술, 장비, 인력을 활용한 배터리 공장을 미시간주에 짓는 걸 허용한 것이 한 예다. 포드가 공장을 100% 소유한다지만 중국 업체의 우회 진출이 분명하다. 테슬라도 비슷한 계획을 추진 중이다. 다른 나라에는 중국산 배터리 원료 사용 비율까지 간섭하는 걸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다. 아마 중국이 잘 만드는 리튬인산철(LFP) 계통의 값싼 배터리가 미국 내 전기차 보급 속도를 높이는 데 필요해서일 것이다. 중국과 치열하게 경쟁하는 한국 배터리업체로서는 미국의 이중적 태도가 신경 쓰이는 게 사실이다. 반도체 보조금을 주는 조건으로 삼성전자나 하이닉스에 민감한 기업 기밀까지 내놓으라는 게 지금의 미국이다.

주류 교과서로 경제학을 배운 이들에게 이런 미국의 변화는 난감한 일이다. 보호주의의 울타리를 허물고 무역을 확대하면 모두에게 이익이라는 게 미국이 믿도록 한 상식이었다. <파이낸셜 타임스>의 칼럼니스트 마틴 울프는 “미국에서 교역에 대한 적대감이 점점 커지면서 지난 90년간 대단히 성공적이었던 정책이 뒤집”히고 있다며 “규칙 기반의 자유무역은 세계의 빈곤을 획기적으로 줄였고 번영을 가져와 냉전 시기 서구 경제의 성공을 이끌었다”고 밝혔다.

경제학자 장하준은 “미국은 원래 그런 나라”라고 말한다. 국익이라면 뭐든 해왔다는 것이다. 최근 <시사인>과의 인터뷰에서 “반농담이지만, 2차 대전 이후 미국의 가장 중요한 산업정책이 ‘우리는 산업정책을 하지 않는다’고 우기는 것이었다”고 했다. ‘국방연구’란 명목으로 예산을 투입해 컴퓨터, 반도체, 터치스크린, 인터넷 같은 것을 만든 게 그들이다. 플라자 합의나 반도체 협정으로 일본 자동차와 반도체의 팔을 비튼 것도 미국이었다.

미국은 다시 좁은 국익에 갇힌 나라가 됐다. 이 나라가 명분과 원칙을 내세우며 점잖게 나갈 때는 좋든 싫든 예측이 가능했다. 이제 체면 불고하고 폭주하는 미국을 세계가 불안하게 지켜보고 있다. 윤석열 정부의 외교는 이런 미국에 바짝 붙어서 ‘선처’를 기대하는 전략인 듯하다. 북한의 핵 위협에 대응하고 핵심산업이 불이익을 받지 않게 하려면 미국과 잘 지내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대통령실 도청에 항의조차 않고 미국 ‘입안의 혀처럼 구는’ 것은 완전히 다른 얘기다. 우려했던 대로 중국과 러시아가 한국과 빠르게 멀어지고 있다.

우리와 달리 프랑스, 독일, 영국 등은 미-중 갈등에서 한발 떨어져 중국과의 관계를 관리해 가려 한다. ‘신냉전’이라지만 냉전 시기와 같은 분리로 가기 어렵다는 게 현실적인 판단이다. 그러기엔 지난 수십년간 안착된 상호의존성이 워낙 크다. 재닛 옐런 미국 재무장관마저 지난 20일 연설에서 안보 관련 등 제한된 영역에서 경쟁할 뿐, 중국 경제와의 ‘디커플링’은 “재앙적인 결과를 낳을 것”이라며 선을 그었다.

한국은 교역으로 큰 나라다. 중진국 함정에 빠지지 않고 선진국에 도달한 것도 미·중을 축으로 촘촘히 연결된 교역 환경이 있어서 가능했다. 안보와 연관된 첨단 분야에서는 적당히 미국의 장단에 맞춰주되, 자유롭고 개방된 교역 환경이 망가지지 않도록 하는 전략이 우리에게 유리하다. 비슷한 처지의 나라들과 연대를 공고히 할 수도 있다. 미국과 한국은 각자의 국익이 있다. 둘이 ‘싱크로율 100%’일 리는 없다.

bhlee@hani.co.kr


한겨레에서 보기 :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8903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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