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칼럼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4일 충청남도 삼성디스플레이 아산캠퍼스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모듈라인을 돌아보면서 설명을 듣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4일 충청남도 삼성디스플레이 아산캠퍼스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모듈라인을 돌아보면서 설명을 듣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곽정수ㅣ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기자

“대통령께서 얼마 전 나라를 위해 미래를 생각하는 게 정치인의 국민에 대한 최선의 일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직접 들었습니다. 제 마음 깊숙한 곳에 울림이 있었습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며칠 전 충남 아산에서 열린 삼성디스플레이 4조원 투자협약식에서 한 말이다. 언론은 그냥 지나쳤지만, 개인적으로는 귀를 의심했다. 평상시라면 이 회장의 ‘윤(尹)비어천가’를 웃어넘겼을지 모른다. 하지만 대통령의 ‘미래를 위한 결단’은 다름 아닌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제3자 배상안’이 아닌가? 여야가 첨예하게 대립 중인 예민한 정치 쟁점이다. 더구나 다수 국민이 부정적 평가를 하고 있다. 기업은 정치와 ‘불가근불가원’ 관계를 유지하는 게 불문율이다. 특히 한일 역사문제 같은 비경제적 논란에 휘말리는 것은 절대 금기시한다. 연설문은 이 회장이 직접 썼다고 한다.


“한일 양국의 미래를 위한 결단을 응원합니다.” 경제6단체는 3월초 정부의 ‘3자 배상안’ 발표 직후 모든 신문에 정부 지지 광고를 실었다. <한겨레>와 <경향>만 광고를 사양했다. 경제단체들이 한미자유무역협정(FTA) 같은 경제 이슈에 대해 공동입장을 내놓은 적은 있었다. 하지만 비경제적인 정치·외교적 쟁점에 끼어든 적이 있었는지 기억에 없다. 경제단체들에 누가 광고를 주도했는지 물었지만 얼버무린다. 이재용 회장과 경제6단체가 잇달아 ‘돌출행동’을 한 배경은 무엇일까?

“속았다.” 기업 사정에 정통한 대형로펌의 한 지인은 최근 윤 정부에 대한 경제계 분위기를 이렇게 전한다. 윤 정부는 출범 이후 대기업 감세, 규제 완화 등 친기업 정책을 전면에 내걸었다. 지난해 8월에는 기업 총수 사면복권도 단행했다. 총수일가 일감몰아주기 규제를 받는 ‘공시대상 기업집단’의 범위 축소 등 재벌규제 완화책도 내놓았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검찰은 한국타이어의 조현범 회장을 계열사 부당지원과 배임 횡령 혐의로 구속기소했다. 공정위는 애초 법인만 고발했는데, 검찰은 압수수색을 통해 조 회장의 개인 비리까지 찾아내 재벌들을 긴장시켰다. 윤 정부가 잘하는 재벌은 도와주고, 잘못하는 재벌은 혼내주는 게 박수받을 일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문제는 방식이다. 재벌 개혁은 법제도 개선과 엄정한 집행이 함께 가야 한다. ‘시장경제 파수꾼’인 공정위는 무력화하고, 검찰 수사만 앞세우는 것은 정상이 아니다. 공정한 시장질서 확립보다는 ‘재벌 군기잡기’와 검찰 권력 강화로 변질될 위험성이 크다.

윤 정부는 검찰 수사를 앞세워 케이티(KT) 인사에 무리하게 개입했다. A그룹 총수 내사설도 솔솔 흘러나온다. 조폭이 겉으로는 동네상권 보호를 내걸면서, 상인들에게 순순히 말을 듣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케이티의 주요주주인 현대차그룹이 주총에 앞서 일찌감치 윤경림 대표 후보 선임에 반대한 것도 권력에 찍히지 않으려는 보신책이 아닐까? 경제단체의 간부는 “대선 때 경제계에서는 ‘이재명 민주당 후보는 깡패,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는 칼잡이’라는 말이 돌았다”면서 “윤 정부 지지율이 더 빠지면 언제든 국면전환용으로 재벌사정 카드를 꺼낼 것이라는 불안감이 크다”고 말했다.

2017년 국정농단 사태는 불법·편법 경영승계에 도움을 바라는 삼성과, 권력의 힘을 이용해 사적 이익을 노린 대통령과 비선실세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담합형 정경유착이었다. 반면 윤 정권의 정경유착은 정권이 검찰을 앞세워 재벌을 제 입맛대로 동원하는 권력주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윤 정부의 이런 ‘신(新)정경유착’에서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주목 대상이다. 전경련은 국정농단 때 정경유착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다가 존폐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런데 얼마전 김병준 국민대 명예교수가 갑자기 회장 직무대행을 맡았다. 그는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겠다고 강조했지만 많은 사람이 고개를 갸웃했다. 김 회장은 윤석열 후보 캠프 상임선거대책위원장을 지낸 측근이다. 김 회장이 ‘용산’과 사전조율 없이 독단적으로 전경련 자리를 맡았다고 생각하면 너무 순진할 것이다. 오이밭에서는 신발 끈을 고쳐매지 말라는 옛말이 있다. 윤 대통령은 김 회장의 전경련 행을 말렸어야 했다.

윤 정부로서는 한일 정상회담 때 전경련의 일본 경제계 네트워크를 활용하고 싶은 유혹이 컸을 수 있다. 하지만 국민신뢰를 아직 회복하지 못한 전경련과 손을 잡는 것은 성급했다. 이러다간 윤 정부가 4대그룹에 전경련 재가입을 압박하지 않겠느냐는 얘기까지 나온다.

윤 대통령은 검사 시절 권력과 재벌의 정경유착을 법의 심판대에 올린 주역이다. 그런 윤 대통령이 또다시 정경유착 논란을 자초하는 것은 ‘자기부정’이다. 자신이 강조한 민간·시장 중심 경제에도 역행한다. 현 정부의 ‘거대한 후퇴’ 리스트에 하나 더 추가되지 않을까 벌써 걱정이다.

jskwak@hani.co.kr


한겨레에서 보기 :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8708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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