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칼럼

학교폭력을 다룬 드라마 <더 글로리>는 실제 상황이었다. 2018년 당시 서울중앙지검에서 윤석열 지검장과 함께 근무한 정순신 인권감독관이 ‘학폭 가해자’ 아들의 강제 전학을 막기 위해 동원한 ‘끝장 소송’은 드라마 작가의 상상력을 초월했다.

강원도학교폭력위원회에서 전학 처분이 내려지자 현직 고위검사 아빠는 아들의 전학을 취소해달라며 재심과 행정소송,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 항소와 대법원 상고 등 가능한 모든 법적 대응에 나섰다. 시간을 끄는 동안 피해 학생이 학교를 떠나야 했지만 소송은 1·2심, 대법원 모두 기각됐고 가해 학생 정군은 결국 전학 조처됐다.

‘법기술자’의 집요한 시도가 법정에서 안 통한 배경에는 학폭위 위원과 교사가 남긴 기록이 있다. “정군이 처분받은 12일 동안 그것(교내봉사 40시간, 출석정지 7일 등)을 이행하면 고교 생활의 마비가 온다고 했는데 피해 학생은 1학기 내내 학교를 못 나오고 있다” “선도 시도가 있을 때마다 어떻게든 책임 회피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등 생생하게 기록된 학폭위 회의록은 소송에서 가해자의 전략을 무력화시킨 결정적 증거였다. 골치 아픈 학폭위 활동에서 권한과 책임을 지닌 이들이 성실하게 수행한 일과가 훗날 법기술자의 파렴치함과 검찰권력의 현실을 고발하는 증거가 됐다.

한국 현대사에는 일반시민의 성실한 업무수행이 절대권력으로 군림하던 거악의 존재를 드러낸 사례가 꽤 있다. 1987년 1월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서울대생 박종철씨 주검을 검안한 오연상 중앙대병원 의사가 “바닥에 물이 흥건하게 고여 있었고, 폐에서는 수포음이 들렸다”고 한 증언은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1988년 6월 오홍근 <중앙경제신문> 사회부장이 ‘청산되어야 할 군사문화’라는 칼럼을 쓰고 출근길 집 앞에서 식칼로 수십차례 찔리는 백색테러를 당했다. 범행이 육군정보사령부 소행이라는 꼬리가 밟힌 것은 당시 오씨의 아파트 단지에 주차한 낯선 차의 번호판을 기록한 아파트경비원의 메모 덕이었다.

의사, 경비원, 교사 등 보통사람이 성실하게 양심에 따라 일상 업무를 수행한 결과가 고문경찰, 정치군인, 검찰공화국 등 거대 권력의 추악한 민낯을 드러내고 무너뜨리는 힘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알려준다.

구본권 사람과디지털연구소장 starry9@hani.co.kr


한겨레에서 보기 :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8261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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