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칼럼
윤석열 대통령이 25일 오전 국회 본회의장에서 내년도 정부 예산안에 대한 시정연설을 마친 뒤 텅 빈 야당 의원석을 지나 퇴장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윤석열 대통령이 25일 오전 국회 본회의장에서 내년도 정부 예산안에 대한 시정연설을 마친 뒤 텅 빈 야당 의원석을 지나 퇴장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이봉현 ㅣ 경제사회연구원장 겸 논설위원

강원도 태백에는 ‘삼수령’이라는 고개가 있다. 해발 920m, 백두대간에서 낙동정맥이 갈라져 나가는 분기점으로 한강, 낙동강, 오십천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이곳에 내리는 비는 어느 능선으로 흐르냐에 따라 도달하는 곳이 완전히 달라진다. 지척에 떨어진 빗방울이지만, 서해(한강), 동해(오십천), 남해(낙동강)로 갈라진다.

분수령(分水嶺). 지금 시대를 이르는 말이다. 지난 9월에 열린 유엔 총회의 주제는 ‘분수령의 시대’(watershed moment)였다. 5월에 스위스에서 개최된 다보스포럼의 주제도 ‘전환점에 선 역사’였다. 세계가 수십년에 한번 오는 전환기에 들어섰고, 방향 잡기 어려운 혼돈의 시간이 왔다는 뜻을 담고 있다.

1990년대 초 공산권 붕괴와 함께 열린 탈냉전 시대는 저물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기점으로 미국·서방과 중·러 사이의 전선이 갈수록 선명해지고 있다. ‘신냉전’일지는 모르지만, 기후위기 및 감염병 대처, 핵확산 방지처럼 국가 간 협력으로 가능했던 여러 일들이 난항을 겪을 것이다. 냉전 종식과 함께 꽃이 핀 세계화 무대에도 막이 내리고 있다. ‘제한된 세계화’ 등 여러 버전의 전망이 있지만 무역과 투자의 장벽을 걷어내고 국제 분업체계를 만들어온 동력은 뚝 떨어질 것이다. 노골화하는 미-중의 기술패권 경쟁으로 보호주의 장벽이 높아지면,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에서 보듯 중간에 낀 한국 같은 나라가 타격을 입을 가능성이 크다.

북한 핵을 포함한 동북아 정세에도 질적인 변화가 오고 있다. 북한은 핵과 운반체를 모두 손에 쥐고 핵보유국 행세를 하고 있다. 중·러가 이젠 든든한 뒷배가 되고 있으니 북한은 거리낄 게 없다는 태도로 나오고 있다. 핵보유국 북한을 어떤 얼굴로 마주해야 하는지, 미·일에 바짝 붙어 안전을 도모할 것인지, 그렇게 되면 중국과의 경제적 관계는 어찌 되는지 등 살필 게 한두가지가 아니다.

지금 시대 상황은 운전으로 치면 국도에서 나와 지도에 없는 오프로드에 들어선 것이다. 길만 잘 따라가면 목적지에 이르는 게 아니라, 표지판이 없고 갈림길도 수시로 나오는 그런 도로다. 멀리 보며 방향을 잡고, 신중히 판단해서 좌회전, 우회전해야 하는 운전이다.

걱정스러운 것은 우리 사회가 이런 험로를 잘 살펴 가고 있는가이다. 지금 일어나는 질서 변화의 본질이 무엇이고, 정치·경제·시민사회는 각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가닥을 잡는 논의가 부족하다. 무엇보다 국정을 이끄는 정부·여당이 제 몫을 해야 하는데, 큰 그림을 제대로 그리지 못하고 있다. 여당인 국민의힘은 이준석 대표를 내치는 일로 집권 초반의 몇달을 지리멸렬하게 보냈다. 정부는 현안 대응에 급급할 뿐 전략과 해법을 제대로 내놓지 못한다. 야당인 더불어민주당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북한이 곧 핵탄두를 200기나 갖게 된다는데, 그때도 여전히 화해협력으로 비핵화를 추진하는 게 실효성이 있는지 답을 찾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모든 문제에 앞서는 것은 대통령의 비전과 리더십 부족이다. 탈냉전과 세계화의 30년이 열리던 무렵, 한국 대통령들은 나름의 소임을 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북방정책으로 소련·중국과 수교의 물꼬를 텄다. 북한과도 남북기본합의서, 비핵화 공동선언 채택과 유엔 동시 가입으로 새로운 관계의 틀을 만들어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4년 말 ‘세계화’ 선언을 한다. 대우그룹이 한해 전에 ‘세계경영’을 선포하는 등 기업이 먼저 알아챈 변화의 흐름을 그도 읽어낸 것이다. 이후 개방시대에 맞게 제도와 관행을 바꾸는 노력을 기울였다. 서투른 개방으로 1997년 말 외환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2020년대 초까지 이어지는 개방과 교류의 흐름을 활용해 한국 경제는 선진국으로 발돋움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금 무얼 생각하고 있는 걸까? 지난 다섯달 반 동안 그가 보여준 것은 혼돈의 시대를 헤쳐나가는 리더십과는 거리가 멀었다. 대통령이 나서 각계의 지혜와 힘을 모아야 하지만 ‘협치’는 간데없고 분란만 커진다. 경제 상황도 위기로 가는데 그의 정부에서 오로지 도드라진 것은 검사들의 활약이다. 검사는 과거에 사는 직업이다. 뒷거울도 봐야 하지만 오프로드에서 전방 주시를 소홀히 하면 차가 구를 수 있다. “눈떠보니 선진국이라더니 벌써 하산길이냐”는 걱정의 소리가 커간다.

bhlee@hani.co.kr


한겨레에서 보기 :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6450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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