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칼럼
천연가스 소비의 55%를 러시아산에 의존했던 독일은 러시아의 가스 공급 축소 등으로 올겨울 가스 소비를 20% 줄여야 할 것이란 예상이 나오고 있다. 사진은 가스 공급망의 핵심을 이루는 ‘오픈 그리드 유럽’의 가스압축 시설. 베르네/AFP 연합뉴스
천연가스 소비의 55%를 러시아산에 의존했던 독일은 러시아의 가스 공급 축소 등으로 올겨울 가스 소비를 20% 줄여야 할 것이란 예상이 나오고 있다. 사진은 가스 공급망의 핵심을 이루는 ‘오픈 그리드 유럽’의 가스압축 시설. 베르네/AFP 연합뉴스

이봉현 | 경제사회연구원장 겸 논설위원

에너지 ‘돌봄 국가’가 있다면 한국일 것이다. 전기와 가스 요금이 아주 싸다. 주택용 전기는 관련 통계가 있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34곳 중 네번째로 저렴하다. 각국 평균 요금의 61% 수준이다(산업용은 88%, 2020년 기준). 도시가스 요금도 산유국인 영국의 절반 정도이다. 올해 들어 국제유가와 가스값이 급등하자 여러 나라가 전기·가스 요금을 많게는 두배까지 올렸는데, 우리 정부는 물가안정과 산업경쟁력을 앞세우며 늘 신중한 자세이다.

이대로 계속 가면 좋겠지만 무리이다. 그 비명이 터지는 곳이 한국전력의 천문학적 적자이다. 한전은 상반기에 14조3천억원의 영업손실을 봤다. 올해 적자가 최대 30조원에 이르리란 예측이다. 지난해 적자 5조9억천원은 오히려 왜소해 보인다. 한전 적자는 연료비 상승분을 요금에 제대로 반영하지 못해서이다. 원가 연동제를 2020년 말부터 시행하기로 해놓고, 정부 스스로 유명무실하게 운영한다.

싼 도시가스도 한전 적자에 일조한다. 가정용을 저렴하게 공급하고 이를 발전용에서 회수하는 ‘교차보조’ 때문이다. 연탄가스로 해마다 2천명이 사망하던 1980년대, 도시가스 보급을 촉진하려 만든 가격정책이 세계 최고 수준으로 보급된 지금도 살아남아 에너지 시장을 왜곡한다.

한전 적자의 불똥은 금융시장으로 튀었다. 올해 회사채 시장은 한전채에 휘둘렸다. 적자 내는 한전이 운영자금을 조달하려 한전채를 밀어내듯 발행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올해 6월 말까지 1년간 순증 발행액만 21조원이다. 정부를 믿고 사는 초우량채권(AAA)이 4% 가까운 이자를 주니 돈이 빨려 들어간다. 우량 대기업마저 회사채 발행 시장에 선뜻 나서기 어려운 돈 가뭄에 조달 금리도 훌쩍 올랐다. 이런 ‘구축 효과’가 계속되면 기업 자금조달비용이 증가하고 투자가 위축될 수도 있다.

물론 적자가 곧 파국은 아니다. 관망하다 연료비가 내려갈 때 요금을 동결해 앞선 손해를 벌충하는 방법도 있다. 2013~2016년에 그렇게 했다. 정부가 기대하는 최선의 시나리오이다. 하지만 국제정세와 에너지 시장이 돌아가는 모양은 그런 기대를 배신할 듯하다. 국제유가는 약간 고개를 숙였지만 국내 발전원의 30%를 차지하는 천연가스 가격은 계속 오르고 있다. 지금 가격은 원유로 치면 배럴당 400달러 수준으로, 지난 10년 평균 가격의 10배 수준이다.

우울한 것은 국제에너지기구(IEA) 같은 데서 이런 ‘미친 가격’이 앞으로 몇년 더 가리라 보는 것이다. 유럽은 자원 무기화에 맞서, 수요의 40%를 의존하던 러시아산 가스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있다. 이 물량은 미국, 카타르 등 다른 나라에서 수입해야 하는데 이 시장에서 중국·일본·한국과 유럽의 피 터지는 물량 쟁탈전이 벌어진다. 그렇다고 공급이 금방 늘 가능성도 없다. 유럽이 러시아산의 3분의 1을 대체하려는 미국 셰일가스의 경우, 수출을 위한 터미널 건설에 4년이 걸릴 것으로 전망된다.

유럽은 지금 가뭄과 폭염에 시달리면서도 몇달 앞의 겨울을 더 걱정하고 있다. 가스를 배급하게 될지 모를 국가 비상사태라는 긴장감을 갖고 대응하고 있다. 최근 유럽연합의 장관들은 각국의 올겨울 가스 소비량을 15% 줄이기로 합의했다. 스페인은 겨울 난방온도를 19도 이하로 내리도록 못박고, 독일 뮌헨은 피크 시간이 아니면 신호등도 끄는 등 애처로운 에너지 절감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원가를 반영한 요금 인상으로 소비절약을 유도하기도 한다. 네덜란드는 에너지 가격 인상으로 올해 5월까지 소비가 전년 대비 30%나 줄었다.

이에 견줘보면 우리는 정부나 민간이나 아직 평온해 보인다. 탈원전이 정치화되면서 전기요금에 대한 투명한 대응이 안 되는 것은 전 정권이나 현 정권이나 매한가지이다. 전기·가스 요금이 원가와 따로 놀다 보니 가격의 수요조절 기능도 작동하지 않는다. 그래서 여전히 에어컨을 켠 채 문을 열고 영업을 하고, 중국산 냉동고추를 들여다 저렴한 농업용 전기로 건조하는 등 비싼 원료로 만들었을 전기를 부담 없이 쓰고 있다.

기후위기 대응이 중요해지면서 싼 에너지가 복지인 시대도 저물고 있다. 주요 선진국들은 가격은 시장기능에 맡기고, 에너지 취약계층만 따로 지원한다. 한전 적자는 올해 말쯤 적립금이 바닥나면 정부가 세금으로 메워야 한다. 쓰레기를 물가안정이란 양탄자 밑으로 밀어 넣고 있는 셈이다. 유럽의 겨울, 우리에겐 먼 나라 일일 따름인가?

bhlee@hani.co.kr


한겨레에서 보기 :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5554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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