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칼럼

법률전문매체인 <법률신문>이 선정한 ‘2021년 주요 판결’ 중에서 기업 담합행위에 대해 이사의 책임을 잇달아 인정한 대법원과 고등법원의 판결이 당당히(?) 1위에 올랐다.


대법원은 지난해 11월 유니온스틸(현 동국제강)의 소액주주가 장세주 회장을 상대로 제기한 주주대표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린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법에 환송했다. 서울고등법원은 지난해 9월 경제개혁연대 등 소액주주가 대우건설의 이사 10명을 상대로 제기한 주주대표소송 항소심에서 대표이사에게만 배상 판결을 한 원심을 깨고 사내·외이사 10명 모두에게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앞서 두 회사는 각각 강판 담합과 4대강 사업 입찰 담합으로 공정위로부터 수백억원의 과징금을 부과받았다.


법원은 이사가 중대한 위법행위를 막기 위한 내부통제시스템 구축 등 감시·감독 의무를 소홀히 한 책임을 인정했다. 담합을 사전에 몰랐다는 변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법원이 그동안 이사의 책임을 묻는 데 매우 소극적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중대한 변화이다.


그동안 회사의 최고의사결정기구인 이사회는 총수를 포함한 경영진에 대한 감시·감독 기능을 제대로 못 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특히 사외이사는 ‘거수기’라는 조롱까지 받았다. 하지만 이사의 책임을 엄격히 묻게 되면 ‘거수기’ 이사회와 이사는 더 이상 설 자리가 없게 된다.


법원이 결정한 손해배상액이 실제 손해액의 일부에 그치는 등 아직 개선할 점이 있다. 하지만 벌써 올봄 주주총회를 앞두고 달라진 모습이 보인다. 고위 관료 출신의 한 사외이사는 “계속 사외이사를 맡을지 고민”이라면서 “만약 한다면 위법행위를 막을 내부통제 시스템 구축을 요청하고, 이사회 안건에 반대할 때는 꼭 근거를 남기려 한다”고 말했다.


재벌은 지배구조 개선을 강조할 때마다 ‘이사회 중심 경영’을 내세웠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최태원 SK 회장이 SK㈜ 대신 실트론 주식을 인수한 것에 대해 공정위가 부당한 사업 기회 제공이라며 과징금을 부과했다. 이사회는 큰 이익이 예상되는 사업 기회를 총수에게 양보하는 것을 미리 알고서도 정식 안건으로 다루지 않았다.

삼성은 준법감시위원회의 제2기 위원장에 이찬희 전 대한변협 회장을 선임했다. 삼성이 준법경영을 강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준감위는 법적 권한이 없는 임의 조직에 불과하다. 법적으로 준법경영은 이사회의 책임이다. 그동안 삼성에서 뇌물 공여, 불공정 합병, 분식회계 사건이 줄줄이 터진 것은 이사회가 제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사회가 거수기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준감위를 열개 만든들 근본적 변화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는 경제개혁을 위해 공정시장위원회를 만들었다. 공정시장위가 발표한 ‘주식시장 개혁 방안’에는 이사가 회사뿐 아니라 전체 주주의 이익을 위해 직무를 수행한다는 이사 의무 강화 방안이 포함됐다. 김종인 국민의힘 총괄선대위원장도 이번 대선에서 ‘윤석열의 공정경제’를 대선 슬로건으로 내걸겠다고 밝혔다. 누가 대선에서 이기든 거수기에 그치는 이사회와 이사는 더는 견디기 힘든 날이 머지않은 것 같다.


곽정수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기자 jskwak@hani.co.kr

서비스 선택
댓글
로그인해주세요.
profile image
powered by SocialXE
List of Articles

[아침햇발] 로비스트가 총리·장관 하면 안된다 / 이봉현

새 정부 초대 총리 후보로 지명된 한덕수 전 국무총리가 3일 서울 통의동 인수위 기자회견장에서 발언을 하기 위해 마스크를 벗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이봉현 | 경제사회연구원장 겸 논설위원 흔하게 보지만 계속 없는 척하기...

  • HERI
  • 2022.04.15
  • 조회수 1278

[유레카] 삼성 수사와 윤석열의 ‘친기업’ / 곽정수

검찰이 최근 삼성전자와 웰스토리를 압수수색했다. 공정위가 지난해 6월 삼성전자 등이 웰스토리에 사내 급식 물량 몰아주기를 했다면서 2349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하고, 고발한 지 9개월 만이다. 그동안 뒷짐 지고 있던 검찰이 ...

  • HERI
  • 2022.04.11
  • 조회수 1943

[유레카] 아마존 노조와 빅테크 힘의 균형 / 구본권

지난 1일 세계 최대 온라인상거래 업체 아마존에서 노조 설립안이 통과했다. 미국 뉴욕의 스태튼아일랜드 아마존물류센터 직원들의 투표 결과, 55%가 찬성했다. 1994년 온라인 서점으로 출발해 디지털 삶을 혁신시켜온 아마존닷컴...

  • HERI
  • 2022.04.05
  • 조회수 1185

[유레카] 러시아를 꿇린 31살 우크라 장관의 사이버 전투/ 구본권

땅, 바다, 하늘에 이어 사이버 공간을 제4의 영토로 선언하고 사이버군대를 창설한 국가가 여럿이다. 미국은 2009년, 한국은 2010년 사이버사령부를 창설해 정보전쟁을 대비하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정보전이 또하나...

  • HERI
  • 2022.03.16
  • 조회수 1745

[아침햇발] 플랫폼, 규제와 진흥의 줄타기 / 이봉현

지난해 11월 마포구 용강동에서 한 배달노동자가 배달음식을 오토바이 상자에 담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이봉현 경제사회연구원장·논설위원 아파트 정문이 내려다보이는 집에 살다 보니 저녁의 한적함을 잊은 지...

  • HERI
  • 2022.03.15
  • 조회수 1922

[유레카] 정부 정책 뒤집기 ‘올인’ Y(윤석열)노믹스가 놓친 것들

대통령 이름에 이코노믹스(경제학)의 뒷부분을 붙인 합성어는 특정 정부의 차별화된 경제정책을 함축하는 용어다.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의 ‘레이거노믹스’가 대표적이다. 감세, 정부지출 축소, 규제 완화 등 공급 중시 ...

  • HERI
  • 2022.03.15
  • 조회수 1427

D-데이 훤히 내다보고, 틱톡으로 여론 모으고…초연결시대의 전쟁

“틱톡은 전쟁위해 설계된 도구” 짧은 동영상 순식간 세계 전파 우크라이나 지지 여론 확산 기여 콘텐츠 승리로 현실 해결 못해 2011년 ‘아랍의 봄’ 무위로 끝나 빅테크 기업 ‘이미지 쇄신’ 기회 중립 위치·책임 회피 어...

  • HERI
  • 2022.03.07
  • 조회수 1225

대선 주자도 모르는 부동산 문제 해결법

[문진수의 사회적 금융 이야기 20] 공공 지원으로 시세보다 저렴한 사회주택 입주민엔 좋지만, 주택 공급자는 무관심 사회주택 사업자에 인내 자본 공급해 양질의 사회주택 많이 보급하게끔 해야 정부의 적극적 금융 지원이 필...

  • HERI
  • 2022.02.28
  • 조회수 1581

[유레카] ‘15초 영상’ 인기가 알려주는 미래 / 구본권

틱톡은 세대 차가 유난히 큰 모바일 플랫폼이다. 중국 바이트댄스가 서비스하는 15초 동영상 기반의 소셜미디어인 틱톡은 10대 사이에선 선풍적 인기지만 기성세대는 존재조차 모르는 이가 많다. 2020년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안...

  • HERI
  • 2022.02.24
  • 조회수 1866

[유레카] 이재용의 ‘노사화합’ 약속은? / 곽정수

지난해 8월 삼성전자와 노조가 창사 52년 만에 처음으로 단체협약을 체결했다. 이재용 부회장이 2020년 5월 대국민 사과에서 “더는 무노조경영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하겠다”며 삼성 역사 81년 만에 ‘무노조경영’을 포기...

  • HERI
  • 2022.02.22
  • 조회수 1228

사회적 금융이란 무엇인가?

[문진수의 사회적 금융 이야기 19] 사회적 금융은 시장금융 공백 채우는 활동 금융 취약계층과 낙후 지역 발전 돕고 사회혁신기업 지원과 구성원 삶의 질 높이는 사람과 사회 중심의 따뜻한 금융 언스플래쉬 사회적 금융은 시...

  • HERI
  • 2022.02.11
  • 조회수 1481

[아침햇발] “이건 당신이 대통령이야” 하면 다 되나 / 이봉현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지난해 12월26일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상식 회복 공약-성장과 복지의 선순환’ 관련 기자회견을 하기 전 마스크를 벗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경제사회연구원장· 논설위원 지난주 열린 첫 대선 후...

  • HERI
  • 2022.02.10
  • 조회수 1507

‘보행중 시청’ ‘1.5배속 재생’ 유튜브 시청 ‘짜내기’ 신공

삼성전자가 최근 전 직원을 대상으로 ‘5대 안전규정’ 준수를 의무화했다. 5가지 규정은 주요 사업장에서 보행 중 휴대전화 사용 금지, 무단횡단 금지, 운전 중 휴대전화 사용 금지, 운전 중 과속 금지·사내 제한속도 준수,...

  • HERI
  • 2022.02.07
  • 조회수 1724

신협, 사회적 경제 지원해야

[문진수의 사회적 금융 이야기] 자조와 협력으로 전후 어려움 극복한 신협 세계 4위 협동조합 금융기관으로 성장했지만 민간 금융사 운영 방식 따르며 정체성 잃어 사회적 경제 특화 금융 체계 만들어 정부 정책자금에 의존 ...

  • HERI
  • 2022.02.03
  • 조회수 1455

[유레카] 인간만이 지닌 능력 / 구본권

1492년 아메리카 대륙의 존재를 유럽에 알린 콜럼버스는 이후 10여년간 4차례 항로를 변경해가며 신대륙 탐험을 이어갔다. 콜럼버스의 배는 1503년 6월 마지막 항해 때 자메이카 해안에 좌초해 원주민들의 도움을 받았는데, 체류...

  • HERI
  • 2022.01.26
  • 조회수 1641

[유레카] ‘갑질 기업’의 전략적 봉쇄소송 / 곽정수

미국의 사회학자 카난과 법학자 프리그는 기업·정부·공직자 등이 공적 관심사나 쟁점에 대해 자신에게 반대하거나 불리한 주장을 하는 것을 위축시킬 목적으로 제기하는 소송을 ‘전략적 봉쇄소송’이라고 정의했다. 전략적 봉쇄소...

  • HERI
  • 2022.01.25
  • 조회수 1480

‘사회성과연계채권’을 활용하자

[문진수의 사회적 금융 이야기] 언스플래쉬 ‘사회성과연계채권’(social impact bond, SIB)이란 비용이 많이 들고 다루기 힘든 사회문제를 정부, 민간기업, 비영리단체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협력해 해결하는 성과 기반 보상 ...

  • HERI
  • 2022.01.17
  • 조회수 1598

[아침햇발] 8년 숙원 사회적 경제 기본법, 이번엔 마침표 찍자

‘사회적 경제 기본법’ 제정이 차일피일 미뤄지자 이 법 제정을 열망하는 사회적 경제 단체와 사회적 경제인들이 ‘시민행동’을 결성하는 등 수년간 입법 청원 활동을 벌였다. 사진은 ‘시민행동’에 참여한 사회적 경제인들이...

  • HERI
  • 2022.01.07
  • 조회수 1400

기업의 ‘임팩트 워싱’ 우려된다고? ‘임팩트’ 평가기준부터!

[문진수의 사회적 금융 이야기] 산출·성과보다 목표 실현하는 ‘임팩트’ 중요 임팩트 측정 어떻게 할 것인가는 향후 과제 국내·외 사회적 가치, ESG 측정법 많지만 ‘임팩트 워싱’ 현상 일어나지 않으려면 정부가 올바른 방...

  • HERI
  • 2022.01.03
  • 조회수 2166

[유레카] ‘거수기 이사회’ 종언 판결 / 곽정수

법률전문매체인 <법률신문>이 선정한 ‘2021년 주요 판결’ 중에서 기업 담합행위에 대해 이사의 책임을 잇달아 인정한 대법원과 고등법원의 판결이 당당히(?) 1위에 올랐다. 대법원은 지난해 11월 유니온스틸(현 동국제강)의 소액주...

  • HERI
  • 2022.01.03
  • 조회수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