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봉현ㅣ경제사회연구원장 논설위원
국민의 요구는 다양하고, 부문 간 이해관계는 복잡해졌다. 우리가 맞닥뜨린 인구 감소, 기술 변화, 불평등, 기후위기, 미-중 패권 갈등 같은 거대 도전은 복합적이고 다차원적인 대응을 요구한다. 현장에 밀착하고, 증거(데이터)에 기반을 두며, 장·단기 시야를 갖춘 융합적 정책만이 현실의 벽을 넘어설 수 있다. 그런데도 많은 정책이 과거와 다를 바 없이 단순하고 평면적이어서 효과는 작고 부작용은 크다. 세종시에 있는 한 국책연구기관의 10년차 박사급 연구원은 지금의 정책 환경을 “미적분을 해야 하는데, 덧셈·뺄셈을 하는 꼴”이라고 진단했다.
울창한 숲에서 나무도 동물도 건강하게 자란다. 정책도 마찬가지다. 천재 한둘의 아이디어가 아니라, 정책에 쓰이는 실용적 지식과 데이터를 다루는 여러 싱크탱크가 건강한 생태계를 이룰 때 잘 진화되고 숙성된 정책이 나온다. 하지만 우리의 ‘정책지식 생태계’는 갈수록 쇠잔해지는 모습이다. 무엇보다 민간의 연구 활력이 눈에 띄게 떨어졌다.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 부설 연구소나 노동·환경·보건·경제정책 영역을 다루는 민간연구소들은 현장에 밀착한 주요 현안을 정책 의제로 발제하고 비전을 제시하는 일을 해왔다. 하지만 만성적인 재정 및 인력 부족을 타개하지 못해 2010년대 내내 고전했다. 2012년 대통령 선거 국면에서 경제민주화나 복지 확대를 의제화해 활기차게 토론한 걸 “좋았던 옛날”로 회고할 정도이다. 2000년대 중반까지 나름의 역할을 하던 삼성·엘지 등 대기업 계열 연구소들도 외부 발언을 삼가고, 그룹 내 과제 해결에 치중하고 있다.
정부 재원으로 운영되는 국책연구기관도 규모나 위상에 걸맞은 존재감을 보여주지 못한다.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소속 26개 정부출연연구소에만 2천여명의 박사급 연구자가 있고, 연간 예산이 1조원이다. 정부 부처에서 독립적으로 일하도록 소속을 총리실 산하로 옮겨놨지만 일감을 주는 부처에 종속되긴 마찬가지다. 정부에 대해 때로 비판도 해야 하나, 눈치가 보여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모르게 얼버무린 연구보고서가 적지 않다. 경쟁해서 일감을 따야 하고, 공공기관 평가도 받는 구조에 들어가 있어 단기 현안에 대응하는 연구 외에 국가의 미래 비전 탐색이나 여러 분야에 걸친 융·복합 연구는 걸음마 단계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실력 있는 연구자가 열정을 쏟다가도 얼마 지나지 않아 나가떨어지게 된다.
내년에 누가 집권하든 ‘실패 회로’를 빠져나오려면 ‘정책지식 생태계’를 활성화해야 한다. 미국과 독일은 민간주도와 공공주도의 차이가 있지만 정책 의제와 실천전략이 싱크탱크들의 촘촘한 네트워크에서 튼실하게 연단되는 공통점이 있다. 국책연구기관이 중장기·융복합 연구를 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고,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 독일처럼 연구의 독립성을 실질적으로 보장할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공공과 민간의 파트너십도 확대해 현장의 목소리를 담고, 시민사회, 대학, 민간연구소가 정책 혁신의 모퉁잇돌이 되게 해야 한다. 국회와 정당도 정책의 주요 수요처이자 방향 제시자로서 제 몫을 해 공공 및 민간의 연구 열정을 북돋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