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칼럼
AI ‘버추얼 인플루언서’ 본격화


가상세계 익숙한 젊은층에 인기
명품모델 기용되며 높은 수익성
“과거엔 기술이 사람 따라했지만
현재는 사람이 가상인간 모방”
“줄리엣·심청의 불멸은 스토리덕”

국내에서 모델로 활동하고 있는 가상인간 로지가 자신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올린 사진들. 인스타그램
국내에서 모델로 활동하고 있는 가상인간 로지가 자신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올린 사진들. 인스타그램


‘가상 인간’이 사람 일자리를 속속 대체하고 있다.

보험사 신한라이프가 지난 7월 선보인 광고모델 ‘로지’는 지하철과 건물 옥상, 숲속을 오가며 열정적 춤사위로 시선을 사로잡는 22살 여성이다. 외모와 동작만으로는 사람이 아닐 수 있다고 의심하기 어렵지만, 로지는 싸이더스 스튜디오엑스가 인공지능 딥러닝 기술을 적용해 만들어낸 가상 인간이다. 로지는 지난해 8월 소셜미디어 인스타그램에 나미비아와 이집트 여행사진을 공유하며 친구를 끌어모았다. 주근깨와 점이 있는 얼굴, 맛집을 찾는 모습, 세계 곳곳을 여행하는 모습 등을 올려오다 넉달 뒤 로지는 ‘버추얼 인플루언서(가상인간)’라고 커밍아웃했다. 이후 활동이 본격화했다. 유튜브 등 소셜미디어에 사진과 글, 동영상을 올리고 10만여명 넘는 팔로어들과 댓글을 주고받으며 사람처럼 소통하고 있다. 명품 매장을 찾아 신상품을 만져보고, 추석땐 한복 입은 사진을 올렸다. 로지는 화장품, 자동차, 호텔 광고에 이어 최근 한국관광공사 모델로 활동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해마다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는 소비자가전 전시회(CES)에서 2020년 삼성전자는 가상인간 ‘네온’을 내세워 신제품을 발표했고, 2021년 엘지전자는 디지털 휴먼 ‘래아’에게 제품 소개를 맡겼다. 롯데홈쇼핑이 선보인 가상인간 ‘루시’는 성능 고도화 뒤 쇼호스트와 상담원 직무를 맡을 예정이다. 이전까지 사람이 해오던 역할들이다.

제페토, 로블록스, 마인크래프트 등 ‘메타버스’로 불리는 가상세계 플랫폼은 세대에 따라 인지도와 접근율이 크게 엇갈렸다. 메타버스가 미래 플랫폼으로 주목받고 있지만, 가상세계에서 아바타로 소통하는 방식은 10대 등 젊은 세대 위주였다. 하지만 메타버스를 모르는 기성세대도 ‘디지털 휴먼’으로 불리는 가상인간을 통해 가상세계와의 만남이 불가피해지고 있다.

세계적 유명모델로 활동하며 1년에 1천만달러 넘게 벌고 있는 가상인간 릴 미켈라. 인스타그램
세계적 유명모델로 활동하며 1년에 1천만달러 넘게 벌고 있는 가상인간 릴 미켈라. 인스타그램

국외에선 광고의 미래로 주목받고 있다. 미국 스타트업 기업 브러드가 개발한 가상인간 ‘릴 미켈라’는 2016년 4월 인스타그램에 데뷔한 뒤 캘빈 클라인, 샤넬, 프라다, 디오르 등 유명 브랜드의 모델로 활동하며 지난해에만 1천만달러(118억원) 넘게 돈을 벌어들였다. 19살의 로스앤젤레스 출신 브라질계 미국 여성이라고 소개하는 미켈라는 인스타그램 팔로어가 300만명이 넘으며 음원 발매 등 다양한 활동을 하는 인기 모델이다. 2018년 <타임>이 선정한 ‘인터넷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 25인’에 방탄소년단과 함께 포함됐을 정도다. 미국 정보기술 전문지 <테크크런치>에 따르면, 지난 1월 미켈라는 1억2500만달러(약 1475억원)의 투자를 받을 정도로 전망도 밝다.

국내에선 1998년 사이버가수 아담이 화제였다가 시들해진 바 있다. 왜 다시 가상인간이 주목받는 것일까. <메타버스>의 저자인 김상균 강원대 교수(산업공학)는 “과거 아담은 1~2분짜리 인터뷰를 찍으려면 엔지니어들이 며칠 밤을 새워 작업해야 했지만, 이젠 인공지능으로 학습한 캐릭터가 실시간으로 말과 동작을 재현해준다”며 “지난해 학교폭력 폭로가 잇따르면서 기업들도 실존인물이 지닌 위험성을 깨닫고 초기 비용이 들더라도 가상인간을 주목하게 됐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로지의 경우 영원히 22살이라는 점도 스토리텔링 측면에서 사람보다 훨씬 유리하다. 섬뜩하지만 장점일 수 있다”고 말했다. 가상인간 모델은 섭식장애를 겪는 다이어트도 필요없고 스캔들과 학폭 연루 위험도 없다. 감정 동요를 모르고 고객의 어떠한 요청도 거부하지 않고 24시간 가동된다.

싸이더스 스튜디어엑스가 개발해 모델로 활동하고 있는 가상인간 로지. 인스타그램.
싸이더스 스튜디어엑스가 개발해 모델로 활동하고 있는 가상인간 로지. 인스타그램.

<가상은 현실이다>의 저자 주영민씨는 “과거 가상세계는 현실과 분리된 별도의 공간이었지만 이젠 소셜미디어로 인해 가상과 현실이 융합된 상태가 된 것이 가상인간의 배경”이라며 “실감형 기술의 발달로 과거엔 기술이 사람을 따라했다면 지금은 사람이 도리어 가상인간의 무결성, 완벽함을 모방하려는 현상이 생겨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가상인간이 늙지 않는 완벽한 외모를 지니고 스캔들 리스크가 없다고 해서 성공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비너스나 줄리엣, 심청 등 문학과 신화를 통해 불멸하게 된 ‘가상모델’들의 비결은 완벽한 외모나 재능 때문이 아니었다. 약점을 지니고 실수하는 캐릭터이지만 공감을 형성한 이야기가 비결이다. 성공한 가상인간으로 여겨지는 미켈라도 고유한 정체성을 만들어내기 위해 오랜 기간 치밀하게 스토리를 쌓아왔으며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 사람처럼 적극적 발언을 내놓고 있다. 개발과 운영집단이 가상인간에게 어떠한 정체성을 부여하느냐의 문제다.

포스트휴머니즘 연구자인 신상규 이화여대 교수(철학)는 “과거 문학작품 속 캐릭터가 작가의 텍스트와 해석에 갇혀 있었다면, 오늘날 온·오프라인 경계가 흐릿해진 상황에서 가상인간의 정체성은 이용자와의 관계를 통해 형성되는 개방성과 유동성이 차이점”이라고 말한다. 기업이나 개발자가 처음에는 가상인간의 정체성을 이미지화해서 선보이지만, 실제 소셜미디어와 메타버스 공간에서 이용자들과 상호작용하기 시작하면 결국엔 개발자가 정체성을 100% 통제할 수 없을 것이라는 얘기다. 신 교수는 “디지털 가상현실 경험에 익숙한 세대는 뉴턴의 물질적 세계관 속에서 살아온 기성세대와 다를 것”이라며 “앞으로 30년 뒤를 내다본다면 가상인간 현상은 시작이자 실험단계인 만큼 성급한 찬반 결론보다 개방적으로 지켜보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구본권 사람과디지털연구소장 starry9@hani.co.kr
한겨레에서 보기: onebyone.gif?action_id=c2c8658fa8be93f87f2aa0e86133217https://www.hani.co.kr/arti/science/future/101372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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