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 칼럼
곽정수 선임기자
곽정수 선임기자

미국 대공황이 한창이던 1933년. 루스벨트 행정부는 위기 극복을 위한 뉴딜정책의 일환으로 산업별로 ‘공정경쟁 협약’을 맺을 수 있는 ‘국가산업부흥법’을 제정했다. 과도한 시장경쟁을 막는다는 미명 아래 기업들의 가격 담합을 광범위하게 허용했다. 기업이 살아나면 고용도 회복되고 경제도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기대였다. 하지만 2년 뒤인 1935년 해당 법은 미 대법원에서 위헌결정을 받아 폐기됐다. 자유시장이라는 헌법정신에 반하는 것도 있지만, 제품가격 상승으로 인한 소비자 피해 등 큰 부작용을 낳았기 때문이다.


1974년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는 ‘유엔 정기선 동맹 행동규범 협약’을 체결해, 경영난이 심한 해운사들의 운임 담합을 인정했다. 하지만 역시 부작용이 커지자, 2002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운임 담합에 대해 공정거래법 적용을 면제하는 것을 폐지하도록 권고했다. 이어 유럽연합(EU)은 2008년 운임 담합에 대한 공정거래법 적용면제를 아예 폐지했다.


지난 9월28일 국회 농해수위 법안심사소위는 더불어민주당 위성곤 의원이 발의한 해운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해운사 담합에 대해 공정거래법 적용을 전면 배제하는 내용이다. 현행 해운법(29조1항)은 화주단체와의 사전협의와 해수부장관 신고, 경쟁을 제한하는 부당한 운임인상 금지를 조건으로 해운사들의 운임과 운송조건에 관한 담합을 허용하고 있다. 개정안은 한발 더 나아가 해운사 담합을 전면적으로 허용하자는 것이다. ‘해운사 담합 면죄부법’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유럽 사례에서 보듯 해운법 개정안은 큰 부작용이 우려된다. 일본 등도 우리와 유사하게 신고 조건부로 해운사 운임 담합을 허용하지만, 개정안처럼 담합을 아무런 조건 없이 무제한적으로 허용하는 나라는 찾기 힘들다. 이유는 간단하다. 해운사의 운임 담합은 화주인 수출입기업들의 부담 증가로 이어진다. 이는 제품가격 인상으로 전가되어 소비자 피해와 수출 경쟁력 약화를 낳고 궁극적으로 국가경제 전체에 악영향을 미친다. 서동원 전 공정거래 부위원장은 현직에 있던 2009년 “많은 미국 경제학자들이 루스벨트 대통령의 정책이 대공황 극복을 오히려 지연시킨 것으로 평가한다”면서 “경기가 어려울수록 소비자 피해로 연결되는 담합 등에 대한 감시와 제재는 철저히 지켜져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개정안은 세계 각국이 ‘시장경제의 암’으로 불리는 담합에 대해 엄격히 제재하는 ‘글로벌 스탠다드’에도 역행한다. 당장 공정위가 조사 중인 해운사 담합사건의 제재에도 제동이 걸렸다. 지난 5월 공정위는 3년여에 걸친 조사 끝에 국내외 해운사들이 화주 협의와 해수부장관 신고도 없이 한-동남아 항로에서 운임 담합을 한 것을 적발했다. 사건은 제재 수위 결정을 위한 전원회의 심판 절차를 앞두고 있다. 조성욱 공정위원장은 지난 29일 국회 정무위에서 “공정위 조사가 끝난 사건에 대해서도 심의·의결하기가 어렵다”고 우려했다.

해수부는 한술 더 떠 지난 28일 농해수위 법안소위에서 “지금 법개정을 하지 않으면 해외에서 오늘내일 조사가 들어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전 세계 해운업계가 이번 사태를 지켜보고 있는 상황에서 ‘우물 안 개구리’식 주장이 아닐 수 없다. 설령 한국 정부가 눈감아 준다고 해서 외국의 공정거래 당국이 모른척 할까? 공정위가 제재하면 외국 해운사들이 활개를 칠 것이라는 주장도 억지에 가깝다. 공정위는 “제재 대상에는 국내는 물론 해외 해운사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면서 “앞으로 외국 정부가 한국 해운사의 담합을 처벌해도, 한국 정부는 외국 해운사의 담합을 처벌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해운산업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유사한 특성을 가진 항공산업의 경우 그동안 담합을 예외없이 처벌했다. 공정위는 2010년 16개국 21개 항공사들이 항공화물 운임을 담합한 것을 적발해 1195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도 2002년 “해운 분야와 항공 분야의 차이가 없다”고 강조했다. 해운법 개정안이 도화선이 되어 앞으로 다른 산업에서도 공정위의 담합 제재 대상에서 제외해달라는 입법로비가 잇따를 가능성도 있다.

해운사들이 국가경제나 소비자의 희생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의 배를 불리려는 것은 최대 경영화두인 이에스지(ESG)에도 배치된다. 사회책임은 이에스지 경영의 핵심이다. 이에스지 경영을 강조하는 언론들이 광고주의 눈치를 보며 해운사의 무리한 주장을 대변하는 것도 딱한 일이다.

무엇보다 국회 농해수위 의원들이 국가경제와 국민은 안중에 없이 해운사의 이익만 대변하는 것은 황당한 일이다. 공정경제를 국정과제로 강조해온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법안 발의와 처리를 주도하는 것은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여당의 유력 대선후보인 이낙연 전 총리도 지난 7월 “한진해운 파산은 크나큰 패착으로 해운 재건은 불가피한 선택”이라며 해운법 개정안을 거들었다.

급기야 국회 정무위 여야 의원 6명이 지난 29일 해운법 개정안을 성토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더불어민주당의 이용우 의원은 “담합 혐의를 받는 해운사들의 로비스트냐”고 성토했다. 국회 농해수위 의원들과 해수부 공무원은 ‘국민의 공복’인지, ‘담합기업의 로비스트’인지 스스로 돌아보길 바란다. 곽정수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기자 jskwak@hani.co.kr
진실을 후원해주세요
용기를 가지고 끈질기게 기사를 쓰겠습니다.
여러분의 후원이 우리 사회에 드리운 어둠을 거둡니다.

 한겨레에서 보기: https://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1013519.html
서비스 선택
댓글
로그인해주세요.
profile image
powered by SocialXE
List of Articles

수익 잔치 은행은 ‘생산적 금융’했나?…시민이 대안금융 열자

임팩트 투자 플랫폼, 사회의 미래에 투자하는 문화 조성 사회 가치 창출하는 프로젝트·사업에 돈의 흐름 이어줘 임팩트투자 플랫폼 비플러스 누리집(benefitplus.kr) “내 돈이 지구 환경을 지키는 데 쓰였다니 기쁘네요.” 온라인...

  • HERI
  • 2021.11.22
  • 조회수 1090

“평생기술일 줄 알았는데…” 카센터 사장님의 ‘투잡’

인공지능과 자동화 시대에 안정적인 일자리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무어의 법칙’은 디지털 세상의 속도와 변화의 폭을 규정한다. 약 24개월마다 반도체의 집적도가 2배가 된다는 이 법칙은 기술 발전의 속도가 지수함수라...

  • HERI
  • 2021.11.15
  • 조회수 1472

지역에 사회적 금융 전문 중개기관을 만들자

[문진수의 사회적 금융 이야기] 지역에 사회적 금융 중개기관 설치해 사회 가치 실현하는 기업과 사업에 투자한다면 지역 문제 해결에 앞장서는 지역 밀착 금융 기관으로 발돋움 할 수 있어 수도권은 진공청소기처럼 사람과 돈...

  • HERI
  • 2021.11.05
  • 조회수 1859

[아침햇발] 산업화·민주화·탈탄소화 / 이봉현

문재인 대통령이 2일(현지시각) 영국 글래스고 스코틀랜드 이벤트 캠퍼스(SEC)에서 열린 국제메탄서약 출범식에 참석,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연설을 듣고 있다. 연합뉴스 이봉현|경제사회연구원장, 논설위원 대한민국은 ‘네다바...

  • HERI
  • 2021.11.05
  • 조회수 1287

[유레카] 최태원과 기업가정신 / 곽정수

에스케이(SK)에서는 지난 10월 말 올해를 마무리하는 시이오(CEO) 세미나가 끝난 뒤 격론이 벌어졌다. 최태원 회장이 폐막 연설에 ‘2030년 기준 전세계 탄소 감축 목표량 210억톤 가운데 1%인 2억톤을 기여하겠다’는 약속을 ...

  • HERI
  • 2021.11.04
  • 조회수 1494

[유레카] 항공기 사고와 소프트웨어 사고 / 구본권

1983년 9월26일 밤 모스크바 외곽에 있는 소련 핵전쟁 관제센터에 경보가 울렸다. 미국으로부터 소련 본토로 5기의 대륙간탄도미사일이 날아오고 있다는 경보였다. 핵탄두 탑재 전폭기를 24시간 공중 체류시키며 즉각적인 ‘상호확...

  • HERI
  • 2021.11.03
  • 조회수 1452

자조 금융이 만들어내는 집단지성의 힘

[문진수의 사회적 금융 이야기] 미국 뉴욕시 저소득층 거주지역의 지역밀착신협(CDCU) 활동을 소개하는 누리집(lespeoples.org) ‘보조금 24’라는 누리집이 있다. 국가가 제공하는 각종 지원금을 쉽게 확인할 수 있도록 만든 온라...

  • admin
  • 2021.10.26
  • 조회수 1173

[유레카] 법조공화국 / 곽정수

한국 근대사에서 변호사가 처음 등장한 것은 구한말이다. “1906년 법무령 제4호에 의해 홍재기 등 3명이 변호사 인가증을 받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00년 뒤인 2006년 변협에 등록한 변호사가 1만명을 돌파했다. 현재...

  • HERI
  • 2021.10.14
  • 조회수 1291

[유레카] 한국형 발사체 ‘누리호’에 실린 것 / 구본권

한국형 발사체 ‘누리호’가 오는 21일 고흥 나로우주센터에서 발사될 예정이다. 2010년 개발이 시작된 누리호는 설계, 제작, 시험, 발사 운용 등 모든 과정이 국내 기술로 이뤄졌다. 로켓 1단부는 75t급 액체엔진 4기를 묶어...

  • HERI
  • 2021.10.14
  • 조회수 1738

진짜와 가짜 ‘임팩트 기업’ 구별하려면?

[문진수의 사회적 금융 이야기] 사회적 가치 추구하는 ‘진짜’ 기업 찾으려면 ‘임팩트’ 평가하는 객관적 척도 필요 진정성 있는 투자·중개기관이 나서 진짜에 투자할 수 있는 환경 만들어야 주거, 환경, 보육 등 다양한 사...

  • HERI
  • 2021.10.07
  • 조회수 1677

로지, 미켈라…사고 안치는 ‘가상인간’ 모델계 대세될까

AI ‘버추얼 인플루언서’ 본격화 가상세계 익숙한 젊은층에 인기 명품모델 기용되며 높은 수익성 “과거엔 기술이 사람 따라했지만 현재는 사람이 가상인간 모방” “줄리엣·심청의 불멸은 스토리덕” 국내에서 모델로 활동하고 ...

  • HERI
  • 2021.10.04
  • 조회수 2723

[HERI 칼럼] 해운사 담합 면죄부 법 / 곽정수

곽정수 선임기자 미국 대공황이 한창이던 1933년. 루스벨트 행정부는 위기 극복을 위한 뉴딜정책의 일환으로 산업별로 ‘공정경쟁 협약’을 맺을 수 있는 ‘국가산업부흥법’을 제정했다. 과도한 시장경쟁을 막는다는 미명 아래 기...

  • HERI
  • 2021.10.04
  • 조회수 1522

서울시 사회투자기금을 둘러싼 논쟁을 바라보며

[문진수의 사회적 금융 이야기] 사회적 경제 기업, 소셜벤처 지원하는 지자체 기금 손실 보전 장치 부재·융자 중심 운용 문제 있지만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일 하는 기업 성장 도와 엑셀러레이터가 투자자로 참여하거나 민간기...

  • HERI
  • 2021.09.23
  • 조회수 1493

[유레카] 뉴 브랜다이즈 운동 / 곽정수

곽정수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기자 jskwak@hani.co.kr ‘뉴 브랜다이즈 운동의 3총사’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임명한 리나 칸 연방거래위원회(FTC) 위원장, 조나단 캔터 법무부 반독점국장(지명자 신분), 미국 정부의 경제정책...

  • HERI
  • 2021.09.15
  • 조회수 1661

[유레카] 안전하지 않은 ‘안전 극장’ / 구본권

20년 전 일어난 ‘9·11 테러’는 민간 항공기가 최고의 테러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걸 확인시키며 항공여행의 풍경을 완전히 바꿨다. 강화된 몸수색과 알몸 스캐너를 거쳐야 하고 액체는 휴대할 수 없게 됐다. 미국의 보안 ...

  • HERI
  • 2021.09.15
  • 조회수 1313

살아있는 실험의 장이자 오래된 미래 ‘공제’

[문진수의 사회적 금융 이야기] 조상들의 상부상조 전통 담긴 ‘공제’ 정부·시장 주도 사회보장체계 형성되며 밀려나 2010년 소비자 생협 공제사업 법적 근거 마련에도 정부 무관심으로 10년간 발 묶여 소비자 피해 막기 위한...

  • HERI
  • 2021.09.09
  • 조회수 1447

허드렛일 처리 ‘인간형 로봇’ 꿈…100년만에 실현될까?

일론 머스크 “내년에 시제품 공개” 성인 몸집에 짐 들고 걷는 기능도 “지루하고 위험한 일 사람대신 처리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로봇” 튜링 “사람닮은 로봇 어리석은 일” ‘범용’대신 기능별 로봇이 ‘대세’ 테슬라...

  • HERI
  • 2021.09.06
  • 조회수 2012

[유레카] 집권 탈레반이 마주친 ‘새로운 적’ / 구본권

지난 15일 탈레반 지휘부는 수도 카불의 대통령궁 집무실을 점령한 사진으로 20년 만에 아프가니스탄을 다시 장악했음을 알렸다. 소총을 든 무장대원들과 스마트폰으로 현장을 촬영하는 조직원들이 함께 담긴 사진이었다. 2001년 ...

  • HERI
  • 2021.08.30
  • 조회수 1689

균형 잡힌 투자 생태계는 어떻게 만들까?

[문진수의 사회적 금융 이야기] 정부, ‘사회적 금융’ 필요성 인정했지만 자금 공급 계획은 목표치 절반에 그치고 ‘사회적경제 기본법’은 국회서 장기 표류 수요-공급자 특성 맞춘 매칭 거래 등 사회적 금융 생태계 조성에 ...

  • HERI
  • 2021.08.27
  • 조회수 1706

기능차별 어려워진 스마트폰 성숙기 새 경쟁

스마트폰은 디지털 세상의 풍경을 바꾼 혁신의 상징이다. 2007년 아이폰 이후 스마트폰 업체들은 해마다 새 모델을 통해 혁신 경쟁을 벌여왔고, 기술과 보급률은 빠르게 올라갔다. ‘생필품 스마트폰’은 어떠한 차별화를 지향할...

  • HERI
  • 2021.08.23
  • 조회수 1838